UPDATED. 2024-03-28 22:35 (목)
왕족·귀족 주무른 수완가vs 민중해방 관심 ‘고단한 삶’
왕족·귀족 주무른 수완가vs 민중해방 관심 ‘고단한 삶’
  • 박희숙 / 서양화가·시인
  • 승인 2007.06.11 12: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양미술 인물 ‘극과 극’]정치적 행적 다른 페테르 파울 루벤스 vs 귀스타브 쿠르베

역사 속에서 화가의 역할은 현대의 화가의 역할보다 더 사회적으로 책임이 컸다. 왕족이나 귀족들은 자신의 권력이 주는 카리스마를 남기고 싶어 했다. 과거의 초상화는 지금의 정치 포스터 같은 역할을 한다.
정치가는 어떤 이미지를 대중들에게 보여주는가에 따라 달라지듯이 당시 초상화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예술가에게 맡기느냐에 따라 모습이 천지차이였다. 그래서 유능한 예술가는 늘 권력자의 주문에 쫓기었다. 그때부터 궁중예술가라는 직업이 등장하게 되었다. 유능한 화가를 곁에 두고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하기 위해서다.
화가에게 궁정화가의 자리는 놓칠 수 없는 매력적인 직업이다. 다른 화가보다 뛰어난 능력(예술가로서)이 입증되는 것은 물론이고 돈 많은 의뢰인을 고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권력의 중심부에 서서 화가로서 외교관으로서 영광스러운 삶을 살았던 루벤스와 사회 개혁을 꿈꾸었던 쿠르베. 이 두 사람의 정치적 행로는 시대적 산물이다.
 

왕족·귀족 주무른 수완가

‘루벤스가 그린 초상화를 모으면, 서유럽 17세기의 귀족 명사의 기록이 된다’고 할 정도로 전 유럽의 군주와 귀족들로부터 끊임없이 작품을 의뢰받았던 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1640)는 자신이 택한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재능이 어떻게 활용되어야 하는 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화가였다.
루벤스의 친구 암브로시오 스피놀라 장군의 말에 따르면 “루벤스의 재능 가운데 회화는 가장 하찮은 것이다”라고 찬탄했다.
루벤스는 풍부한 학식과 라틴어와 프랑스어, 스페인어 그리고 영어까지 유창하게 구사했다.
그가 먼저 화가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사업가적 기질이 바탕이 되었다. 그가 화가로서의 길을 가게 되면서부터 세례를 받았던 개신교를 멀리하게 된 이유는 궁중화가나 교회의 주문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평생 가톨릭 신자로서의 선택은 돈에 대한 그의 감각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루벤스는 많은 양의 주문을 받은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공방을 운영했다. 세부적인 그림들이 뛰어난 공방의 화가들은 루벤스가 그림을 완성하기 쉽게 그림의 배경은 물론 모델의 의상 등을 그렸고 공방의 생산라인은 주문일자에 맞추어 한 치의 오차가 없었다.
하지만 루벤스는 작품 제작에 손을 댄 만큼 작품의 등급을 매겨 돈을 받았다. 혼자 제작한 것은 거기에 합당한 금액을 서명만 한 작품은 2등급으로 취급해 낮은 가격을 받았다. 효율적인 공방 운영 덕분에 루벤스는 주문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루벤스는 자신이 그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스튜디오에서 그림을 주문한 귀족이나 왕족들을 초청했는데 공방의 젊은 화가들은 스튜디오에 모습을 보이지 않게 했다. 스튜디오에서 마지막 이벤트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 비서에게 편지를 쓰게 하거나 책을 읽게 함으로써 다방면에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구매자들에게 보여주는 일을 했다. 또한 그는 유럽을 여행하면서 다른 예술품도 수집했는데 예술품을 자신의 작품과 함께 끼워 팔기도 했을 정도로 그는 마케팅의 천재였다.
세속화, 종교화 신화, 초상화를 장르를 불문하고 루벤스의 작품들은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극적이고 에로틱한 효과를 나타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작품 유럽의 모든 궁정과 모든 교회에 걸리게 만들었다.
귀족이나 왕족들은 전 유럽의 왕족들의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루벤스에게 예술가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외교적 역할까지 요구하기에 이른다.
루벤스는 외교관으로서 영국과 스페인의 관계를 성공적으로 해결함으로서 1629년 스페인 펠리페 4세에게, 1630년 영국의 찰스 1세에게 작위를 받음으로서 신분상승이 이뤄진다.

민중해방 관심 ‘고단한 삶’

미술사에서 지나치게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화가 중에 한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쿠르베다. 프랑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귀스타브 쿠르베<1819~1877>는 자신이 집필한 <쿠르베의 전기>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무렵부터 우리나라의 수많은 미술관에 있는 최고의 작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작품을 그렸다.’고 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쳐 흘렸던 화가다.
쿠르베는 만국박람회에 사실주의적 새로운 작품 13점을 출품하지만 <오르낭의 매장> <화가의 아틀리에>가 주최 측에 의해 거부당한다. 그는 거기에 굴복하지 않고 1855년 개인전을 계기로 기성 화단에 도전을 하지만 그를 지지하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고 있었지만 쿠르베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고집한다. 리얼리즘이 그것이다.
쿠르베는 화가로서 만족하지 못했다. ‘타고난 공화주의자’라고 자처 할 만큼 사회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처음에 푸리에 사상에 심취했고 뒤에는 당시 전 유럽에 이름이 알려진 사회주의자 프루동에 영향을 받는다.
프뤼동 사상에 매료된 쿠르베는 자산이 공화주의자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그림을 도구로 삼는다. 그는 사상을 표현하고자 작품 속에 가난한 농부나 노동자를 등장시킨다.
쿠르베는 1848년 혁명과 제2공화정을 짓밟아버린 나폴레옹 3세에게 반발을 느껴 정치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예술가의 삶보다 사회개혁의 정열에 불타올라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그것이 그에게 돌일 킬 수 없는 파란만장한 삶을 선사한다.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폭풍 속으로 밀어 넣는다. 
1871년 파리에서 일어난 폭동은 파리 코뮌을 성립시켰고 쿠르베는 그 일원으로 가담하게 된다. 그는 예술가 협회 대표자로 임명되어 루브르 미술관을 관리하는 총책임을 맡게 된다. 그의 사회적 정치적 관심은 그림을 뛰어 넘어 소외 받는 민중의 해방을 위해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열정적으로 기존의 정치세력과 싸운다. 정치 소용돌이는 그의 열망을 저버린다.
정부군에 의해 코뮌이 무너지자 그 중심에 있었던 쿠르베는 기존 정치인들의 증오의 대상자로 변했다.
그것은 쿠르베의 예술성보다는 그의 인간성에 대한 증오였다. 쿠르베는 3개월간의 감옥 생활에서 벗어났지만 정치 가담은 무리한 벌금형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그의 경제적 파산으로 이어진다.
정치적 행적으로 인해 고난은 점철되고 희망 없는 삶만 그에 곁에 남았다. 쿠르베는 고향에서 탈출해 스위스로 망명한다.

박희숙 / 서양화가·시인


 

필자는 성신여대 조형대학원을 졸업하고, 화가이자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그림은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클림트>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