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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기획시리즈]동학과 농민운동의 관계
[역사비평 기획시리즈]동학과 농민운동의 관계
  • 이영호 / 인하대ㆍ한국근대사
  • 승인 2007.06.11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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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호 인하대 교수는 “동학이 농민전쟁을 지도했다고 보는 ‘동학혁명론’적 견해는 납득하기 어렵다”면서 “19세기 중엽이후 현실변혁적 흐름과 동학운동적 흐름은 현실인식과 대처방식에서 차이를 보이면서 1894년 농민전쟁 종결 이후에는 확실하게 결별하였다”는 입장이다.  박맹수 원광대 교수는 ‘농민전쟁’이라는 용어 대신 ‘혁명’이나 ‘대봉기’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당시 역사적 상황을 정확하게 드러낸다고 말한다. 박 교수는 사상적 차원의 보국안민지계에 머물러 있던 동학이 정치사회적인 보국안민운동인 1894년 ‘혁명’으로 나타났다고 보고 있다.

동학의 사상적 역할,  1894년 농민전쟁 이후 결별

박태원의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1963)는 1862년 익산민란을 그린 역사소설이다. 주인공 오덕순은 민란의 주동자로 처형되지만 그의 아들 수동은 처형장에서 남긴 아버지의 유언을 이어받아 반봉건의식에 충만하여 변혁운동에 나선다. 충의계를 조직하여 갑신정변에 참가하고 또 일심계의 조직을 토대로 1894년의 농민전쟁에 가담한다. 오수동의 아들 상민은 전봉준의 제자로서 농민전쟁에서 영웅적인 활동을 벌이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민란의 흐름이 30여년 뒤 자연스레 농민전쟁으로 연결된 역사의 소설적 형상화는, 이어지

는 박태원의 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1977~86)에서 웅장하게 그려진다.  
송기숙의 역사소설 <녹두장군>(1989~94)은 동학의 북접교단과 남접세력이 분열 대립하는 양상을 추적하면서 농민전쟁의 주도세력으로 남접을 지목한다. 남·북접의 분열은 북접교단이 1893년 서울 복합상소, 보은집회 등을 통해 교조의 사면과 포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운동을 벌일 때, 남접세력이 서울에서 반외세 선전활동, 금구원평집회 및 보은집회 참가를 통한 반외세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 대비된다.
민란은 군현의 이해관계가 얽힌 조세문제를 중심으로 일어나는데 반하여, 농민전쟁은 조세개혁 뿐 아니라 신분제 폐지, 토지문제도 거론하고 개항 이후의 외세침투에 반대하는 활동에까지 이르기 때문에 자연발생적인 성격을 지닌 민란의 조직이나 힘만으로 광역적으로 확산된 농민전쟁의 조직적 기반을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박태원은 동학과는 무관하게 일심계, 충의계 등의 사조직, 활빈당 조직을 설정하고 있으나 이러한 조직은 지도층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광역적인 농민전쟁의 기초조직으로 작동하기는 어렵다.
송기숙은 동학의 남접세력을 중심으로 농민전쟁을 전개하는데, 동학 包接조직의 역할을 주목한 것은 역사적으로 보아 마땅하다. 1869~71년 李弼濟의 난에 동원된 동학조직이나, 남접의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이 휘하에 거느린 동학의 포접조직이 군현을 뛰어넘는 연대와 조직의 매개 고리로 작용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농민전쟁에 있어서 동학의 사상적 역할이다. 동학의 조직 뿐 아니라 이념에 있어서도 동학이 농민전쟁을 지도했다고 보는 ‘동학혁명론’적 견해는 농민전쟁을 중심에 두고 그 이전과 이후에 있어서, 동학교단 지도부와 남접세력 및 일반 민중의 운동노선을 대비할 때 납득하기 어렵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19세기 중엽 이후 현실변혁적 흐름과 동학운동적 흐름은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추구하는 기본노선 상에서는 일치하지만, 현실인식과 대처방식에서 차이를 보이면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고, 1894년 농민전쟁의 종결 이후 확실하게 결별하였다.
동학은 1860년 4월 崔濟愚의 득도에 의해 창립되었다. 최제우는 체제내적 위기보다도 외세에 대한 위기의식을 강하게 느꼈다. 중화의식을 바탕으로 반일·반청의식의 연장선상에서, 특히 서학의 위협에 대한 대응을 위해 동학을 창도했다. 최제우의 생각은 輔國安民으로 요약되는데, 이에 대한 해석은 최제우 사후 두 갈래로 계승되었다.
崔時亨은 修道생활의 정진과 경전체제의 정비를 통해 교단의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1866년 한불조약 이후 격심해진 신구 기독교의 공세적 포교에 대항하는 한편,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의 사면과 동학의 공인 및 포교를 요구하는 敎祖伸寃運動(1892~93)을 적극 전개하였다.
반면 1869~71년 이필제의 난을 통해 드러난 보국안민의 현실인식은 1890년대 초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남접세력의 변혁운동으로 결집되었다.  
1894년 1월 전봉준이 주도한 고부민란은 동학교도들의 참여에도 불구하고 동학의 이념과는 무관한 민란적 성격을 지닌 것이고, 그해 봄 제1차 농민전쟁도 기왕의 연구에서 강조된, 동학교단과 남접봉기세력의 갈등설을 수용하지 않더라도 상호 동조노선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동학교단이 농민전쟁에서 지분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제2차 농민전쟁 참여에 의한 것이다. 동학교단의 전면적 참여는 이미 조선정부를 장악한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굳히면서 동학교도 및 봉기군에 대한 전면적 진압에 나섰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동학교단이 제2차 농민전쟁에서 수행한 역할이나 희생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봉기의 혐의를 동학교단이 모두 뒤집어쓰게 된 상황이 놓여 있었다. 농민전쟁 이후 내려진 수배령은 흔적 없는 일반농민이 아니라 동학의 꼬리표를 붙인 동학교단과 신도들에게 집중되었다. 혐의의 해소, 그리고 교단을 공인받는 일은 기독교를 비롯한 외래종교가 왕성한 포교활동을 벌이고 있는 현실에서, 생존을 위한 유일한 길이었다.
동학의 창도가 서학의 차단에 있었는데 거꾸로 서학의 왕성한 포교와는 달리 동학은 존망의 기로에 놓인 것이다. 
남접 두령 중 하나인 손화중의 제자들이 1896년, 숨어있는 최시형을 방문하여 재차 봉기를 건의하다가 쫓겨난 것은 동학교단이 반체제 봉기집단의 혐의를 계속 짊어지고 갈 수 없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동학교단은 봉기를 꾀하는 세력과의 접촉을 거부하고 그들 포접과의 연결고리를 끊었다. 의도적으로 삼남지방을 피하고 서북지방에 포교를 집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시형은 피신생활 끝에 1898년 체포되어 左道亂正律에 의해 교수형을 당했다. 1900년을 전후해서는 동학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령이 내려져 동학교도를 비롯한, 유사한 변혁운동의 활동가들이 대대적으로 희생당하였다.
최시형을 이은 동학교단의 3대 교주 손병희는 정부의 대탄압이라는 위기를 넘기기 위해 1901년 일본으로 망명했는데, 거기서 개화파들과 교류하게 되면서 반일 반외세노선을 접고 개화노선으로 180도 생각을 바꾸었다.
동학교단의 젊은 청년들을 일본으로 유학시켜 일본의 문물과 개화정책을 습득하도록 주선했다.
1860년 이래 탄압만을 당해온 동학교단으로서는 조선정부, 대한제국정부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의 힘을 빌어서라도 정부를 ‘개혁’하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동학교단이 망국에 앞장선 일진회와 결합한 것은 아무리 한국정부에 대한 적대감이 앞섰더라도 지울 수 없는 큰 오점으로 남는다.
반면 손화중의 제자들은 재봉기를 꾀하다 최시형에게 쫓겨난 뒤 英學黨이라는 이름으로 세력을 확대했다. 이들은 1899년 전라도 지방에서 다시 봉기하는데 성공했다.
놀라운 것은 이들이 1894년 농민전쟁을 그대로 모방하여 봉기했다는 점이다. 봉기의 지역 뿐 아니라 진군의 과정, 서울점령이라는 진군의 목표, 영학을 표방한 동학의 조직적 기반, 보국안민의 기치 등에서 거의 똑같다. 농민전쟁의 정신을 계승한 변혁운동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최제우의 보국안민이념이 後天開闢의 우주론적 변혁을 꿈꾸는 이상주의로 흐르거나 현실적 변혁을 위해 희생을 각오한 무력봉기로 나아가거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아니다. 농민전쟁에의 참여여부를 가지고 지금 훈장을 수여하려는 것은 아니다. 농민전쟁에의 참여가 훈장감이라면 일진회 가담은 무엇이겠는가. 동학의 사상적 독창성과 위대성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1894년에 일어난 농민전쟁의 진실에 접근하려는 것이다.
동학과 농민전쟁의 관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농촌공동체의 해체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농민의 처지에 밀착해 들어가 볼 때 농민전쟁 이후 농촌의 보수유생층과 농민층은 화해할 수 없는 대립관계에 놓이게 되고, 농민층은 동학이나 농민전쟁에 가담한 것으로 혐의만 쓰면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고향에서 쫓겨나고 가족들은 흩어졌다.
농민층분화에 의해 점진적으로 해체되어 가던 농촌공동체는 농민전쟁을 통해 일거에 붕괴와 재편의 사회적 대변혁을 겪게 된 것이다. 

이영호 / 인하대ㆍ한국근대사

필자는 서울대에서 ‘1894-1910년 지세제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근대 지세제도와 농민운동>, <동학과 농민전쟁>의 저서가 있다.


 

동학과 혁명과의 관계 ‘종교적 외피설’ 벗어나야

1894년 이 땅 조선에서 일어난 민중 대봉기와 동학은 어떤 관계일까? 이 문제는 역사학계의 해묵은 쟁점이자 미해결의 쟁점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 필자는 ‘농민전쟁’이란 표현 대신에 ‘대봉기’ 또는 ‘혁명’이라는 표현을 쓰고자 한다. ‘농민전쟁’이라는 용어로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정확하게 드러내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며, 자세한 내용은 후술한다.
서세동점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19세기는 대전환의 시대였다. 당시 서세는 정치적으로는 국민국가,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체제의 틀을 갖추고 근대적인 과학기술로 무장한 채 조선, 중국, 일본 등 이른바 중화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던 동아시아 삼국에 심대한 충격을 가하면서 도전해 왔다.
이러한 서세동점 현상은 다른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에서도 유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의 서세는 이른바 전 근대의 구체제에서 근대의 신체제를 구현한 문명 세계로 상징되고 있었고, 그들의 동점 대상이던 아시아와 아프리카 각국은 미개 또는 야만의 세계로 표상되었기 때문에, 서세의 동점행위=침략행위는 오랜 동안 문명개화라는 이름으로 미화되어 왔다.
바로 이 같은 서세의 동점에 맞서고자 유불도 전통사상 뿐만 아니라 서학(西學)에도 주목하고, 나아가 <정감록> 등과 같은 민중 신앙마저 새롭게 해석한 동학(東學)이 1860년 수운 최제우(1824-1864)에 의해 성립된다.
동학은 한 마디로 서세동점의 엄혹한 시대에 맞설 수 있는 “조선의 학문, 조선의 종교”를 지향하고자 했다. 이러한 동학의 사상적 지향을 최제우는 1861년에 지은 <덕을 펴는 글>(布德文, 1861년)에서 보국안민지계(輔國安民之計)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다.
동학 성립의 역사적 배경이나 최제우 자신의 문제의식을 통해서 보면, 동학의 역사는 한 마디로 보국안민지계를 실현하고자 했던 역사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보국안민지계로써 성립된 동학이 당초부터 곧바로 정치사회적 차원의 보국안민운동으로 나아갔던 것은 아니다. 성립 당초의 동학은 오히려 사상적(학문적, 문화적) 차원의 보국안민지계에 가까웠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사상적 차원의 보국안민지계에 머물러 있던 동학이 어떻게 정치사회적인 보국안민운동, 즉 1894년의 ‘혁명’으로 나타날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동학사상 및 동학조직 내부의 변화 발전, 동학 외부의 상황 변화라는 필요충분조건이 충족될 필요가 있었다.
이 글에서는 주로 동학 내부의 조건이 어떻게 변화 발전되었는가를 개관해 보기로 하겠다.
첫째, 동학조직이 중심적 역할을 했던 1892~3년의 교조신원운동을 통해 1894년의 ‘혁명’을 이끌 혁명조직과 지도부가 형성된다는 사실이다. 동학은 성립 당초부터 1894년의 ‘혁명’이 있기까지(물론 ‘혁명 실패 후에도 1904년까지는 지속적인 탄압을 당한다) 지배층의 탄압 때문에 교조를 비롯한 많은 신자들이 희생당해 왔다.
이 때문에 동학교단은 오랜 기간에 걸쳐 교조신원(敎祖伸寃; 동학공인을 의미함)이란 비원(悲願)을 키우고 또 키워오기에 이르러, 마침내 1892년부터 이듬해까지 두 해에 걸쳐 전국 각지를 무대로 공공연하게 대대적인 집단적 시위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른다.
전 근대의 우리 역사에서 민중들이 2년에 걸쳐 전국 각지를 무대로 자신들의 정치사회적 요구를 내걸고 집단적이며 공개적인 시위운동을 한 역사는 동학의 교조신원운동 밖에 없다.
이 같은 교조신원운동의 강력한 조직성, 장기지속성,  광역성 등은 조선후기 이래 빈발하던 민란의 수준을 일거에 뛰어넘는 것인 동시에, 사상적 차원의 보국안민지계에 머물던 동학으로 하여금 정치사회적 운동, 즉 보국안민운동으로 적극 나서도록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이화, 정창렬, 조경달을 비롯한 선행 연구자들이 이미 구체적으로 실증한 바 있다.
둘째, 동학 조직망인 접포(接包) 조직의 전국적 확산이 1894년 ‘혁명’의 조직적 기반이 되었다. 1862년에 처음 시행된 인맥 중심의 동학 접(接) 조직은 지배층의 강력하면서도 지속적인 탄압 아래에서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1893년 보은취회를 전후해서는 몇 개의 군현(郡縣)을 포괄하는 지역조직의 성격을 띤 포(包) 조직 확립으로 이어지는데, 교조신원운동은 물론이고 1894년의 ‘혁명’ 당시 조직된 농민군 조직 역시 이 같은 접포 조직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미 학계의 정설이 되어 있다.
셋째, 가장 중요한 변화는 바로 동학사상 자체가 변화와 발전을 이룩함으로써 1894년 대봉기의 혁명이념 또는 변혁이념으로 기능하게 된다는 점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1860년에 성립된 동학은 어디까지나 사상적 차원의 보국안민지계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사상 내부에 이미 ‘보국안민’이라는 정치사회적 지향을 내포하고 있었던 까닭에 개항 이후 심화되어가는 사회경제적 모순 상황과 결합된 동학은 그 내부에서 질적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동학사상의 질적 변화는 특히 1880년대 후반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는데, 예를 들면 80년대와 90년대 초반의 동학교단의 동향을 알려주는 통문(通文) 속에는 당시 사회경제적 모순에 시달리고 있던 일반 민중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내용이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 (필자가 발굴 소개한 <해월문집> 소수의 통문 참조)
이것은 사상적 차원의 보국안민지계로 등장했던 동학이 사회경제적 모순 상황과 결합하면서 정치사회적 차원의 보국안민운동의 이념으로 변화 발전하고 있는 유력한 증거의 하나로 해석할 수 있다. 동학사상 내부의 변화 발전에 대해서, 재일(在日) 연구자 조경달은 1860년 성립 당초의 동학을 ‘정통동학’, 1894년 대봉기의 혁명이념으로 기능하는 동학을 ‘이단동학’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하여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비록 정통동학, 이단동학이라는 구분을 하긴 했지만 1894년의 대봉기 과정에서 동학사상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경달의 관점은 종래 금과옥조처럼 여겨 왔던 동학의 ‘종교적 외피설’을 극복한 탁월한 관점이라 할 만하다.
끝으로 종래 유력한 학설이었던 동학의 ‘종교적 외피설’과 관련해서 한두 가지 의견을 피력한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동학을 서양식 ‘종교’로 간주함으로써 1894년의 ‘혁명’에 있어 동학은 그저 ‘종교적 외피’ 역할만 했다는 종래의 ‘종교적 외피설’은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동학이 성립될 1860년 당시, 조선에서는 서양의 Religion이란 말을 번역한 ‘종교(宗敎)’라는 말이 없었다. ‘근본적인 가르침’이라는 뜻의 ‘宗敎’ 또는 ‘宗旨’라는 말만 있었을 따름이다.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 역시 자신이 상제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도즉천도(道則天道) 학즉동학(學則東學)’이라 하여 ‘도(道)’와 ‘학(學)’으로 표현한 바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독일농민전쟁을 설명하면서 등장한 ‘종교적 외피설’을 1894년 혁명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동학 속에 종교적 색채나 요소가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동학 속에도 엄연히 종교적 요소가 존재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최제우가  1860년 음력 4월 5일에 했다는 이른바 ‘천사문답(天師問答)’이라는 신비체험이다. 그러나 이 같은 신비체험에도 불구하고 동학은 어디까지나 서세동점에 주체적으로 맞서기 위한 보국안민지계(輔國安民之計)로써 등장한 ‘조선의 학문’이었다는 점이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그간 너무나 오래도록 동학과 1894년 ‘혁명’ 과의 관계를 ‘종교적 외피설’에 의존하여 해석해 왔다.
필자의 눈에는 ‘종교적 외피설’이야말로 우리 학계가 여전히 수입이론과 방법론에만 의존한 채, 주체적인 해석의 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구태(舊態)로 비친다.

박맹수 /원광대 원불교학과


 

필자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해월 최시형 연구-주요 활동과 사상을 중심으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전남 동학농민혁명사> <동학농민전쟁 사료총서 전 30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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