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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서평]『국가의 퇴각』
[쟁점서평]『국가의 퇴각』
  • 최진우 한양대
  • 승인 2001.10.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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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퇴각』(S.스트레인지 지음, 양오석 옮김 푸른길 刊)
최진우 / 한양대·정치학

정치란 크게 두 가지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그 하나는 공공재의 제공이요 또 하나는 사회적 가치의 배분이다. 과연 무엇이 공공재인지, 누가 이를 규정하는지, 그리고 무엇이 공공재화의 제공을 촉진 또는 저해하는 요인인지 등에 관한 토론이 정치학에 있어 규범적·과학적 논의의 중요주제가 되어 왔던 것이다. 나아가 권력과 부, 명예 등의 가치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배분되는지의 문제 또한 정치사상 및 경험적 정치이론의 핵심주제로 다루어져 왔다.

국가를 공공재의 제공을 위해 개인들간의 계약을 통해 태어난 ‘리바이어던’으로 간주한 토마스 홉즈의 국가관이 바로 첫 번째의 정치학적 관심사를 대표하는 것이라면, 라스웰 (Harold Laswell)의 ‘정치: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획득하는가?’는 두 번째 주제에 대한 관심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수잔 스트레인지의 역작 ‘국가의 퇴각’(필자로서는 국가가 과거의 유물로 사라져 버렸다는 인상을 주는 ‘퇴각’이라는 단어보다는 국가의 역할이 축소된다는 의미에서 ‘위축’이 적확한 역어라고 생각한다)은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확립된 주권국가 중심의 국제체제가 큰 변화 없이 지속되고 있다고 보는 주류 국제정치학자, 특히 현실주의자들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저자에 의하면, 지금 세계는 상전벽해의 거대한 변화 속에 있으며, 국제관계 연구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변화의 핵심은 국가의 위축이다. 이러한 변화의 근저에는 기술의 급격한 발전과 금융자본의 유동성의 폭발적 증가로 인한 시장의 약진이라는 현상이 자리하고 있다.

저자에게 있어 정치의 의미는 주로 사회적 가치의 배분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학문적 관심사는 지금도 과연 국가가 사회적 가치를 배분하는 주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가의 문제에 집중된다. 이러한 관심사는 한 국가 내에서 사회세력 간에 전개되는 가치의 분배과정은 물론이거니와, 전지구적 수준에서의 분배 과정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과거에는 국가가 가치의 배분자로서의 역할을 독점적으로 수행했다고 한다면,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국가가 소멸되고 있다거나, 다른 권위체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과거 사회적 가치의 배분의 역할이 전적으로 국가에 귀속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그 역할이 국가뿐만 아니라 다른 행위자들에 의해 분점되어 가는 추세라는 것이다.

현실이 이러할진대 국제관계에 대한 연구의 초점은 당연히 국가 외의 행위자들이 어떠한 활동을 전개하며 그 결과는 무엇인지에 대해 두어져야 한다고 본다. 즉 국가에 대한 배타적 관심만으로는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정치현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으며, 다국적 기업, 초국적 범죄조직, 국제기구, 비정부기구 등 사회적 가치를 배분하는 권위를 국가와 공유하고 있는 다른 행위자에 대한 관심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세계화라고 부르는 현상에 의해 법적 규제와 과세 등을 통한 개인과 기업의 경제적 및 사회적 행위에 대한 국가의 통제능력이 심각하게 손상되고 있음을 고려할 때, 더 이상 국경선을 기준으로 구획된 국가라고 하는 단위가 국제관계의 유일한 주체일 수가 없으며, 따라서 ‘국제정치’라는 용어에 함축되어 있는 바와 같은 ‘국가간의 상호작용’이 전지구적 수준에서의 정치경제적 현상의 결정 요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분석적 통찰력과 풍부한 지식의 독창적 종합을 바탕으로 한 스트레인지의 저작이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변화의 단면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참고가 됨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앞서 언급한 바처럼 정치의 의미를 공공재의 제공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 책에서 서술되고 있는 국가의 위축은 어느 정도 과장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마도 사회적 가치의 배분자로서의 역할은 국가 외의 행위주체들에 의해 상당부분 침식되었을지 모르나, 공공재의 제공자로서의 역할은 국가 이외의 행위자들, 특히 범죄조직이나 기업 등에 의해서는 수행되기 힘들다. 이들은 속성상 사적재화를 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공공재 제공자로서의 국가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위축의 정도가 작을 것이며, 이렇게 볼 때 오늘날 국가의 위상은 저자가 묘사하고 있는 수준으로까지 낮아진 것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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