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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모방은 창조의 생모가 아니다
[딸깍발이]모방은 창조의 생모가 아니다
  • 전진성 / 편집기획위원· 부산교대
  • 승인 2007.06.11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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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어머니는 계모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모방은 창조를 길러낼 수는 있지만 스스로 창조를 낳지는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모방과 창조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간격이 있다. 그 엄연한 차이에 대해 딱 부러진 설명은 못하더라도, 뭔가 결이 다르다는 것쯤은 쉽게 감지할 수 있다. 특히 요즘 들어서 그 차이는 더욱 민감하게 느껴지게 되었다.
한동안 논문 표절 문제가 화제가 되었다. 정치적 역학관계에 따라 부추겨진 측면도 있긴 하지만, 어찌하였건 이러한 문제가 큰 사회적 이슈로 부각된 것은 우리 사회가 그간의 지적, 문화적 관행에 대해 자성하기 시작했음을 알려준다. 모방을 창조로 둔갑시켜온 관행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로부터 비단 학계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 전체가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예를 들어, 한국 현대 미술사의 한 획을 그었던 ‘앵포르멜’ 운동을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씁쓸하기 그지없다. 공연히 외딴 불어 개념을 사용하여 범접하기 힘든 문화적 성채를 쌓고 그 안에서 소수의 ‘전문가’들만이 자기들만의 암호로 소통해온 것이다. 물론 근본적인 문제는 이러한 미술이 소수를 위한 것이냐, 다수를 위한 것이냐 하는데 있지 않다. 오히려 문제는 이것이 세상에 둘도 없는 창조인 것처럼 치장하고 있지만 결국은 모방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서구에서 왜 비구상 회화가 나왔는지는 세기 전환기의 시대적, 미술사적 맥락에서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왜 한국에서 느닷없이 그와 엇비슷한 일종의 ‘짝퉁’이 출현했는지는 적어도 미술사적으로는 납득이 되질 않는다. 굳이 설명을 요한다면, 남보다 먼저 서구 ‘상품’을 수입하는 것만이 살길이었다는 사회사적 설명, 또는 서구 ‘자유 진영’의 대세를 좇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는 정치사적 설명 등이 가능할 것이다. 근래 한국 미술계의 특징적 현상인 ‘비엔날레’ 과잉도 이런 식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흐름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토착주의는 굳이 반박할 필요도 없이 한심한 행태다. 서구적인 것의 모방과 토착적인 것의 모방은 그다지 많이 다른 것 같지 않다. 양자에는 모두 깊은 열등감이 내재해있다. 그래서 어떤 권위적인 존재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것에 자아를 의탁하고자한다. 양자는 다들 솔직하지 못하다.
내 짧은 식견으로는, 창조란 정직한 노동의 결실이며, 그런 점에서 모방과는 아예 종자가 다르다. 지금 내게 직면한 현실을 외면하여 허상을 좇는 대신, 그 현실에 파고들어 고뇌하고 해결책을 찾을 때, 내 노동은 정직한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타인의 경험을 참조할 수는 있겠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참조일 뿐이다. 모방은 창조에 양분을 제공할 수는 있지만 원천적인 피와 뼈를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모방은 산고(産苦)를 겪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는 진통을 회피하지 않으며 그러기에 정직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 문화에 창조성이 결여된 것은 단지 기법상 미숙하거나 기발함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다들 잔재주를 부리고 너무 톡톡 튀는 것이 문제다. 이는 표면적으로만 창조적으로 보일뿐이다. 모방이라는 계모를 창조의 생모인 미 메시스와 견줄 수 없게 하는 것은 바로 참된 고뇌다.
전진성 / 편집기획위원· 부산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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