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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무덤서도 금관” 허위보도에 놀라
“남성 무덤서도 금관” 허위보도에 놀라
  • 교수신문
  • 승인 2007.06.04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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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유전의 발굴 뒷이야기] 여성 무덤서 최초 순금관 출토 ‘황남대총’

경주시내 중심가에 자리하고 있는 신라고분공원 가운데 가장 큰 무덤이 바로 황남대총이다. 이 무덤은 무덤번호가 98호였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에서 경주시내 평지에 분포하고 있는 크고 작은 무덤들의 현황을 파악해 각 무덤에 번호를 부여했는데 모두 155호까지 부여되었다. 이 가운데 황남대총이 98호분으로 등제되어 있었고 외형상 두 무덤이 남북으로 붙어있어 부부무덤으로 알져져 왔다.

“왕릉 파헤쳐선 안돼” 발굴저지운동
천마총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시험발굴을 통해 금관출토의 개가를 올린 조사단은 발굴조사의 기술도 어느 정도 축적되어 98호분의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잔존해 오고 있는 신라 최대의 무덤을 우리 손으로 발굴조사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무리한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조사단은 흥분과 함께 자부심으로 충만했다. 아울러 이미 파고되었고 규모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155호분에서도 금관이 출토된 예를 보아도 분명히 이 무덤에서도 금관하나는 틀림없이 출토될 것이란 기대 또한 부풀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사단의 부푼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일어났다. 사학계의 일부에서 비판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유로써 첫째, 천마총발굴로 학술연구목적을 충분히 달성했고 둘째, 발굴 후 공개시설은 불가능하고 셋째, 부부묘로서는 가장 크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두어야하고 넷째, 발굴비용 역시 천마총의 10배는 필요할 것인데 그 돈으로 급한 다른 고분발굴이나 복원에 투입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학계의 반대에 급기야 경주의 박, 석, 김씨의 후예들을 중심으로 발굴저지 운동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문화재발굴도 좋지만 조상의 뼈와 얼을 지키기 위해서도 왕릉을 마구 파 해치는 일 따위를 후손으로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주장의 진정서를 청와대를 비롯 관계기관에 보내 호소하는 한편 반대운동에 나섰다. 국립경주박물관도 공공연히 반대의사를 개진했다. 같은 문화공보부(현 문화관광부)장관 소속의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과 국립박물관의 견해차이라고 보이지만 발굴조사가 문화재관리국의 단독의지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말하자면 국책사업으로 이루어진 이상 변경이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발굴조사는 당초의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1973년 7월 6일, 북쪽의 무덤에 첫 삽을 뜸으로써 북분의 조사가 먼저 시작되었다. 이로부터 1년 4개월이 지난 1974년 10월 29일 드디어 기대했던 신라금관이 발굴단의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로부터 이 금관을 완전히 수습하기까지 4일간의 기간이 필요했다. 11월 1일, 하늘이 붉게 물든 상태로 계속되다 금관을 완전하게 옮기고 나자 평상시의 하늘로 돌아갔다. 이로써 광복 후 우리 손으로 두 번째의 신라금관을 발굴한 것이다.

허위보도 다음날 박 대통령 발굴현장 방문
북쪽의 무덤에서 금관을 발굴하는 개가를 올렸지만 역시 주인공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찾지 못했다. 그런데 출토된 유물가운데 글자가 새겨진 허리띠 장식품이 있었다. 글자는 夫人帶(부인대)라는 한자인데 夫人이란 글자는 고대에 임금의 부인인 왕비 또는 왕의 어머니란 의미로 쓰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의 허리띠라고 해석되었다. 그래서 신라 어느 왕의 부인허리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여성의 무덤인 것임은 분명하게 되었다. 이로써 신라시대 여성의 무덤에서 최초로 순금관이 출토된 무덤이 되었다.
북쪽의 무덤이 여성무덤임이 밝혀진 후 이어 남쪽의 무덤조사가 진행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무덤에서는 기대되었던 금관은 출토되지 않았다. 다만 무덤의 주인공이 남성임이 밝혀졌으나 역시 주인공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무덤이 먼저 마련되고 이어 북쪽의 무덤이 마련되었음을 발굴결과 밝혀냈고 출토 된 수많은 유물은 당시의 문화상을 밝혀 줄 훌륭한 자료가 된 것만은 분명했다. 그런데 이 무덤발굴조사 당시 웃지 못 할 엉터리 보도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북분에서 금관이 출토되고 난 후 이듬해인 1975년 7월 1일 서울의 한 일간지에 “남분에도 신라금관 출토”라는 특종기사가 보도되었다. 조사단도 모르는 금관이 출토되었다는 보도에 모두들 대경실색했다.
그런데 그 허위보도가 있은 다음날인 7월 2일 당시 박정희대통령이 발굴현장을 방문했다. 그 날 현재의 국립경주박물관이 신축 준공되었는데 준공과 아울러 박물관개관식이 거행되어 주빈으로 참석하고 이어 남분 발굴현장을 찾았다. 자신이 손수 쓴 大陵園(대릉원)간판이 붙어있는 고분공원 정문 앞에 내려 한창 진행 중인 남분 발굴현장을 방문하고 조사단을 격려하면서 발굴되지 않은 또 다른 신라무덤을 하나 더 파 보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왕관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
하지만 더 이상의 조사는 명분도 없고 학계의 반대가 거셀 것을 감안해 어렵다는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당시의 조사단장은 감히 대통령의 지시에 거역하는 행동이었지만 나름대로 소신 발언을 함으로써 또 다른 신라무덤의 발굴을 막았던 것이다. 
발굴이 완료되고 난 후 가장 관심이 큰 것은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데 있지만 역시 주인공을 밝힐 수 없어 경주황남동에 있는 신라무덤 가운데 가장 큰 무덤이란 뜻에서 황남대총으로 이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당초 발굴조사 목적은 이 무덤을 공개하여 관광자원화 하기로 되어있었다. 하지만 시험 발굴한 천마총과 비교할 때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많아 대신 천마총을 공개하기로 계획을 바꾸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이 황남대총의 경우 유물은 모두 발물관에서 보관하고 외형만 복구하여 둠으로써 그 웅장한 자태가 이곳을 찾는 사람을 압도하고 있다. 아울러 북분의 금관은 새로 개관된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대접을 받으며 전시되고 있다.

조유전 토지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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