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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좌담] 한국의 지식담론과 지식인 사회의 미래
[특별좌담] 한국의 지식담론과 지식인 사회의 미래
  • 진행 : 김재환 기자
  • 승인 2001.10.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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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0-17 16:00:34
연속기획의 마지막으로 유력한 세 계간지의 편집위원을 초대했다. 그중 최근 들어 예각적인 비판담론을 생산해내고 있는 '사회비평', 일상적 파시즘이라는 문제제기를 통해 우리안에 스민 억압적 기제를 통렬하게 드러내고 있는 '당대비평', 전통의 재해석과 재발견을 통해 자생담론의 구축을 시도하고 있는 '전통과 현대'를 주목하고자 한다.
이 잡지들보다 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계간지를 제외하고 이들을 주목한 까닭은 신생잡지이면서도 우리 시대의 담론적 쟁점에 대해 매우 역동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와 함께 이들 세 잡지의 이념적 지향이 각각 다른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특정 담론공동체 내부에 폐쇄된 담론은 한 사회의 지식담론의 발전에 그다지 큰 기여를 하지 못한다. 이번 좌담을 통해 서로 다른 입장간의 의사소통이 한층 활발해지기를 기대한다.

참석자
김진석 / 인하대 철학. 『사회비평』 편집주간
임지현 / 한양대 사학, 『당대비평』 편집위원
함재봉 / 연세대 정치학, 『전통과 현대』 편집주간
진행 : 김재환 기자

때·곳
2001년 9월 29일 교수신문사 회의실

입장차 확연한 우리시대 지식인 집단의 권력비판 …
“진보냐 보수냐는 이분법으로 현실 설명 못해”

신광영(이하 ‘신’) : 계간지가 주도하고 있는 한국의 지식담론과 지식인 사회의 문제를 짚어보도록 하자. 한국의 경우 전문 학술지도 취약한 마당에 대중적 계간지는 오히려 학술담론의 발전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계간지 작업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김진석(이하 ‘김’) : 교수업적 평가 등이 학술지, 학회중심으로 이뤄지고, 연봉제가 실시되면서 교수의 위상도 달라졌다. 학술지에 글을 쓰는 일이 중요하게 취급되면서 교수는 지식인이 아니라 전문인으로 내몰리고 있다. 학회지는 지나치게 세분화돼 있다. 잘 아는 처지이기 때문에 냉정한 비판도 별로 찾아볼 수가 없다. 계간지는 전문주의에 빠지는 경향을 수정한다는 의미가 있다.

임지현(이하 ‘임’) : 비슷한 생각이다. 지식인의 역할은 자기 사회를 ‘설명’하는데 있다. 그것은 전문적인 학술논문이 아니라 에세이를 통해서 이뤄진다. ‘설명’이라는 지식인의 책임을 짊어지는 통로가 계간지가 아닌가 한다. 유럽이나 일본의 좌파지식인들은 대단히 활발하게 에세이 작업을 하고 있다. 계간지 담론이 지식사회의 기반을 약화시킬 것이란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저널을 통한 글쓰기가 자기 사회에 대한 실천적 문제제기와 연결될 때 전문성도 더 날카로와 질 수 있다.

함재봉(이하 ‘함’) : 80년대는 사회과학의 전성시대였다. 그 당시 국내 사회과학에는 인문학적 바탕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회과학의 이론틀이 역사성과 유리돼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회과학과 인문학을 접목시켜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인문적 내용과 역사, 사상적인 것과 함께 사회를 분석하는 포괄적인 담론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시작하게 됐다. 전문 학술지에선 이런 크로스오버를 용납하지 않는다. 한국사회를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기존의 좌우, 진보/보수의 축 이외에 ‘전통과 현대’라는 축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 축을 도입한다면 보이지 않던 우리사회의 측면들이 드러날 것이라 생각했다.

권력비판과 담론의 자율성

신 : 권력과 담론의 문제를 논의해보자. 정치권력이든, 학문권력이든, 여론이라는 익명성을 지닌 사회적 분위기이든 그러한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담론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함 : 지식인은 저항과 비판을 수행하는 사람이지만, 한편으로 ‘책임’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권력이 아니라 지식인이 책임져야할 더욱 중요한 영역이 있다. 국가, 민족, 민중, 사회 등이 아마도 그것일 것이다. 저항의 문제는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지금은 굉장한 책임감이 요구되는 시대라고 본다. 그래서 당위차원의 담론생산이 필요하다. 비판의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비판하는 상대와 공동으로 진리를 추구하려는 태도이다. 그것이 전제돼 있지 않은 비판은 논쟁과 토론을 가로막는다. 우리 사회의 ‘비판담론’들은 상대방을 원천적으로 진리에 접근할 수 없다고 보고, 그것을 배제하려는 전략적 움직임이 아닌가 한다.

김 :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비판이라는 문제는 좀 옛날 식의 문제제기다. 교수들은 매체에 가장 많이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미 기득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권력으로부터 분리돼 있느냐는 말을 하기도 어색하다. 한국사회는 일급의 이론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자면 날카로운 비판이 필요하다. 비판은 논의를 깨기 위해 하는 것은 아니다. 비판의 방식에 지나치게 주목하지 말자. 논점이 정확하다면 좀 거칠게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론적인 주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비판해야 한다.

임 : ‘당대비평’은 편집위원 사이에 공통된 합의같은 것은 없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권력의 문제에 대해 ‘주변의 시선’을 유지하자는 것이다. 주변의 시선으로 권력과 사태를 보고, 권력비판에 있어서도 또 하나의 중심을 만들기보다는 끊임없는 주변의 입장을 취하려 한다. 권력비판을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중심에 대해서도 성찰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제기한 ‘일상적 파시즘’의 경우도 중심으로 떠밀려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려하고 있다. 새로운 중심이나 당위를 만드는 것은 다른 집단에 대한 억압으로 작용한다.

신 : 교수들은 매체를 통해서 자신의 전문영역이 아님에도 사회적 권위를 빌어 입장표명을 하고 있다. 일반인이나 기자들도 할 수 있는 영역에 교수들이 교수로서의 권위를 빌어 의견표명을 하게 되면서 문제가 생기지 않나 한다. 시민단체에 교수들이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는데, 이런 참여의 방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김 : 교수들이 자기 전문영역을 넘어 공적 주제에 일반인의 시각에서 쓰는 것은 오히려 바람직할 수 있다. 전문가적 특권을 남용하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 지식인의 글이 일반인이 절실한 심정으로 쓰는 글보다 더 못할 수도 있다. 자기 기득권이 보장되지 않는 영역에 대한 글쓰기가 공적인 책임감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더 좋을 수 있는 것이다. 시민운동은 좀더 실천적일 수 있지만, 기득권적인 특권으로 후원되고 보장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그것만 가지고 사회적 실천이라 말할 수는 없다. 전문적 담론생산에서 시민운동으로 옮기는 것은 어렵지도 않고, 담론생산을 더 강화할 수도 있다. 실천이 좀더 사적인 차원으로 내려가야 한다. 참여자체는 좋지만, 그것이 자동적으로 권력비판이 되진 않는다.

임 : 시민으로 참여하는 것과 지식인으로 참여하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시민운동이 반드시 전문가에 의해 이끌어져야만 하는가. 시민운동은 건강한 양식과 상식을 가진 시민들이 운동을 통해 공공성을 획득해 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지식인이 시민단체에 참여할 때는 한사람의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전문가 지식인으로 참여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과정을 무시하는 측면이 있다. 시민운동이 발전하는데는 지식인의 역할이 컸지만, 동시에 장애가 된다는 생각도 든다. 건강한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참여하는 것이 느리고 더뎌 보이지만 더 나은 방식이다.

함 : 이론과 실천이라는 문제는 특수한 사상체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공부하면서 가장 인상깊은 이론가가 푸코였다. 사람들이 쾌락을 다르게 느낄 수 있고, 고통마저도 다르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 푸코가 말한 담론의 힘이다. 담론을 창출하고 유포시키는 행위가 실천보다 더 엄청난 일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이론과 실천의 문제도 달리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업적평가나 학술지 게재 등의 문제가 나오면서 교수로서 사실 답답한 느낌도 든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일급의 이론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과제다. 지식인 사회도 국제경쟁력을 제고해야 한다. 공부 이외의 것을 한다는 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 심하게 말하면, 학문에 충실하지 않은데 대한 변명으로 실천에 뛰어드는 측면이 있지 않은가 한다.

강준만 교수를 어떻게 볼 것인가

신 : 지식인들의 신문기고에 대해 공개적인 비판을 주도한 사람은 강준만 전북대 교수다. 새로운 비판문화를 만들고 있다는 평가와 함께 일부에서는 실명비판의 문제점을 비판하기도 하는데.

임 : 실명비판 자체는 찬성이다. 문제는 상대방의 언설에 대한 담론적 차원의 분석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선일보 기고 여부’와 같은 조그만 잣대를 가지고 인신공격적 비판을 한다는 게 문제다. 심지어 어떤 글을 썼는가도 묻지 않는다. 실명비판은 사실 학계에서도 이뤄지고 있다. 그게 금기였던 적은 없다. 강 교수의 추측에 입각한 인신공격이 사람들에게 통렬함을 주고 있다고 본다. 가학적 공격심리에 공감을 주면서 동시에 ‘조선일보’라는 수구반동적 신문에 대한 비판이라는 명분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남북문제에 대해선 ‘한겨레’보다 ‘조선일보’가 더 정확한 얘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냉전적 사고에 갇혀 있긴 해도 조선일보가 하는 모든 얘기가 틀린 것은 아니다. 강 교수의 글이 우리 사회의 중심적 논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우리 사회의 담론수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함 : 토픽으로 삼을 만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지식인의 역할은 공동체 내에서 진리를 함께 찾아가자는 것인데, 그런 작업에 방해가 됐지 도움은 안된다. 실명비판이 왜 강 교수에게만 적용되는가. 학술회의에서 실명비판은 대단히 신랄하다.

김 : 정치학회에선 그런지 몰라도 인문학 쪽은 그렇지 않다. 맑스, 칸트, 헤겔 등을 다루다보니 살아있는 사람에 대해선 그리 활발한 비판이 되지는 않고 있다. 강 교수의 비판에 인신공격적 요소가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일급의 이론을 만들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은 필요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비판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 점에서 강 교수의 작업은 긍정적이다. ‘조선일보’의 문제에 대해 지식인들은 원론적인 얘기만을 하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그 글이 실린 매체에 의해 악용되고 남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글쓰는 사람들의 태도가 애매한 거고, 어쩌면 매체에 기생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중층적인 현실, 담론과 실천 사이에서

신 : 한국 학계는 약한 아카데미즘과 강한 저널리즘이 특징인 것 같다. 아카데미즘이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은 학계 내부에 비판의 풍토가 형성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선후배, 스승-제자 사이로 얽혀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교수들의 논의의 준거가 아카데미 커뮤니티 ‘안’이 아니라 ‘밖’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학문적 검증없이 저널에 실리는 것으로 인정받았다고 여기는 풍토도 있다. 임지현 교수는 이전에 ‘이념의 진보성과 삶의 보수성’을 말한 적이 있고, 김진석 교수도 ‘사적 실천’의 문제를 말했는데, 담론과 실천의 문제에 대해 논의해보자.

임 : 그 글을 썼을 때 두 가지 고려가 있었다. 하나는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생각과 이념을 삶 속에서 얼마나 구현하고 있는가하는 실존적 측면이다. 나 자신이나 주변 동료들도 솔직하지 못하다는 느낌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사회의 ‘결’이 자신의 사고를 삶을 통해 실천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리버럴한 사람들은 자기 삶을 실현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어릴 적부터 일상적 파시즘이란 코드속에 갇혀 살다보니, 사고는 그것을 벗어났더라도 코드 자체가 이미 내장돼 있기 때문에 벗어나질 못한다. 지난 80년대 우리는 권력에 대항했지만 거기서 얼마나 벗어났는가. 90년대 내내 폴란드 현대사와 씨름했다. 폴란드는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사회시스템을 바꾸었지만, 사회의 모습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 사회 도처에 있는 파시즘적 구조, 파시즘적 결을 없애지 않는다면 또다른 종류의 억압적인 체제를 낳을 수 있다. 문제는 오히려 약한 아카데미즘, 약한 저널리즘에 있다. 아카데미즘이 약하면 절대로 좋은 저널리즘이 나올 수 없다.

김 : 좀더 복합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학문적으로는 보수이면서 진보적인 부분도 있을 수 있다. 문제의 층은 더 중층적이다. 푸코를 공부하고 푸코에 대해 시민단체에서 발표한다고 해서 비판활동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건 굉장히 추상적인 작업이다. 구체적 현안문제에 있어서는 입을 닫아버릴 수도 있다. 문제는 고전적 담론이 아니라 어떤 맥락인가이다. ‘사적 실천’은 현실적 층위에서 어떤 색깔을 드러내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이념과 삶에서 진보와 보수의 문제는 대단히 다층적이고 분열돼 있다.

임 : 내 문제제기는 우리의 이념적 지형이 80년대처럼 진보와 보수로 나눌 수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현실은 중층적이고, 전선은 대단히 불연속적이다. 우리 삶의 굽이굽이마다 복잡하게 전선이 얽혀 있기 때문에 섬세한 검증이 필요한 거다. 단순화를 극복해야 한다. 강준만 교수는 전형적인 80년대적 이분법을 구사한다. 조선일보가 중요한 현안이긴 하지만, 모든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인가. 21세기에 와서 지형이 변했다고 했지만, 사실은 원래 그랬던 것이다. 80년대라는 극한 상황에서는 못 보았다가 이제야 보게 된 것이다.

김 : 강 교수가 조선일보에 제한시켜 생각하는 것은 문제라고 본다. 하지만, 그의 방식은 일종의 충격효과가 아닌가 한다. 초기의 이분법은 벗어났다고 본다.

함 : 임 교수의 문제제기에 동의한다. 현실이 중층적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좌우를 넘어 우리안에 깔려있는 파시즘을 비판하고 있는데, 그것을 파시즘이 아니라 ‘전통’으로 부르고 싶다. 좌우가 아무리 분석해도 잡히지 않았던 문제가 바로 유교이자 전통의 문제다. 그런데 과연 그것을 비판적으로 봐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뭔가 긍정적인 것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사적 실천의 문제를 말했는데, 나는 오히려 가장 비유교적인 자유주의자라 할 수 있다. 실제 사생활에서 담론을 어떻게 연결시키느냐는 다른 문제이다. 거죽만을 보고 진보다, 보수다라고 해버리면 왜곡될 수 있다.

‘전통’과 ‘현대’, 자생담론의 가능성

신 : 자생적 담론의 가능성에 대해 논의해보자. ‘전통과 현대’의 경우 두 계기를 시간적 연속이 아니라 접목하자는 의도에서 그런 타이틀을 붙인 것으로 보이는데.

함 :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가장 얘기가 잘 통한 사람들이 한국사, 동양사상 전공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얘기들을 담아낼 수 있다면 뭔가 재밌는 얘기가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방법론의 문제도 있다. 정치학에선 글쓰기와 논문형식 등에서 굉장한 디시플린(discipline)이 있다. 그 틀 안에서는 지식인의 글쓰기가 끼어들 틈이 없다. 그래서 우리 내부에서 논의한 것은 60매 짜리 칼럼이다.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 사이에서 60매 칼럼을 쓰는 것이다. 한학과 국사학, 사회과학자가 모여 학문적 디시플린과 경계를 넘어선다면 뭔가 새로운 논의가 나올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임 : 우리 사회는 미셀러니(micellany)와 에세이(essay)의 구분이 없다. 함 교수가 말한 건 에세이다. 그것은 형식면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내용면에서 보자면, 자기 사회의 현실과 치열하게 대면하면서 솔직하게 응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외국의 좋은 이론을 망라해서 우리 사회에 대입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일각에서 일상적 파시즘론에 대해 들뢰즈 가타리도 읽지 않고 얘기한다고 비판한다. 나는 그들을 읽은 적이 없다. 다만 역사학을 공부하면서 우리사회의 문제에 천착했을 뿐이다. 오히려, 그들을 그렇게 읽었던 사람들은 그동안 뭘 했는가 반문하고 싶다.

김 : 그런 문제제기가 없었던 건 아니다. 초기에 나 자신도 근대적 독단을 막기 위해 탈근대 담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 해체론, 들뢰즈, 가타리가 한국사회에선 서구만큼 파괴력을 갖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적인 맥락에서 겉도는 것이다. 좀더 차분하게 구체적인 맥락으로 내려가야 한다.

함 : 우리가 배워온 민족주의, 좌파적 역사관을 가지고는 우리 모습을 제대로 알 수 없다. 90년대 이후로는 그런 시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우리 자신도 한국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사실 한국이라 불러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한국의 모습이 무엇인지 새로 찾아내야 한다. 작은 풍습, 禮의 의미등을 새로 찾아가면서 자생담론이 나올 수 있다고 본다.

김 : 한국을 모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의 문제를 연구하는 것과 현재와 미래의 문제를 고민하는 공부는 구분돼야 한다. 자생담론이 잃어버린 우리와 동양의 과거를 찾는 작업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문제를 찾고 담론화하는 작업과는 다르다고 본다. 많은 교수들이 이 두 작업이 같다고 생각한다. 과거를 연구하는 사람에게 현재나 미래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다.

임 :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이미 현재의 문제일 수 있다. 전통은 끊임없이 발견되는 것이다. 전통을 어떻게 찾아내고, 어떤 시각에서 재해석할 것인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지금의 전통은 박정희 시대에 만들어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함 교수의 작업은 어떤 시각에서 전통을 재공식화하는가에 따라 현재의 문제와 연관될 수 있으리라 본다. 인도의 서발턴연구(subaltern study)를 보자. 역사학자들인 이들은 민족주의 시각과 맑시즘 역사학이 억압적 측면이 있고, 인도 지배엘리트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논리라는 비판에서 출발했다. 이들이 만들어 내는 인도적인 것은, 과거회귀와는 전혀 다른 해방적 논리를 지향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자생담론과 관련해 참고가 될 만하다. 서구와 동양이라는 이분법에 매몰되지 않고 서구의 것을 자기방식으로 전유하는 힘을 인도의 서발턴연구자들이 보여주고 있다.

함 : ‘전통과 현대’는 민족주의라는 오해를 많이 받고 있다. 우리는 맑스주의와 민족주의를 동시에 넘어서고자 한다. 맑스주의를 비판하면 내셔널리즘으로 오해한다. 강고한 이분법이다. ‘현대’는 안 보고 ‘전통’만 보려 한다.

신 :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적 축이 계속 문제되고 있는 것 같다. 학계는 보수적인 부분이 90%이상이다. 이런 편향은 학문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이기도 하다. 좌파, 우파를 막론하고 더욱 활발한 의사소통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마지막으로 이런 이념적 지형에 대해 토론해보자.

김 : 언론사 세무조사를 두고 벌어진 대립은 허구적 측면이 많다. 조선일보의 기획은 유감스러웠다. 몇구절을 두고 해방후보다 더 심한 좌우대립이라고 했는데, 그런 대립이 있는 건 아니다. 제대로된 보수라면 자유주의적 시장경제를 옹호하고 전통적 가치를 중시하는 입장일텐데, 조선일보에서 말하는 보수는 그렇지 않다.

임 : 주변부 국가의 특징은 자유주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된 보수도 없다. 좌파의 경우도 극우 국가주의와 싸우다보니 좌파적 에토스를 상실하게 됐다. 80년대 식 논리는 반공사회든, 군부독재든 기존의 중심을 다른 중심으로 대체하겠다는 논리다. 그것이 진보/보수의 이분법으로는 진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중심으로 대체하는 것에 불과하다. 새로운 중심으로 대체했을 때의 문제는 현실사회주의가 잘 보여주지 않는가. 진보/보수의 이분법은 ‘실재’를 드러내지 못한다. 자기의 위치를 명확히 드러냈을 때 오히려 차이를 인정하면서 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근대적 사고방식으로, 객관적 진리를 말하게 되면 의사소통의 길이 막히게 된다.

지식인의 이념지형, 무엇이 문제인가

함 : 한국에는 좌파적 전체주의와 우파적 전체주의밖에 없다. 자유주의는 설자리가 없다. 나 자신은 보수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무엇을 保守할 것인가다.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수할 것인가를 묻는다면 제대로 말할 사람이 없다. 박정희식 개발독재와 요즘의 보수인 신자유주의는 서로 상극이다. 그러니 결국 기득권유지라는 식으로 얘기되고 만다. ‘전통과 현대’는 외부에서 보수주의로 평가되고 있지만 내부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지난 역사를 통해서 해왔던 것들 중에서 우리가 보수할 것, 긍정할 것이 무엇인가를 이제 찾아야 한다. 우리 공동체의 정체성을 다지는데 있어 진보적인 측면만 있어서는 안된다. 신자유주의나 개발독재와 같은 지금의 ‘보수주의’와 우리의 동질성을 찾기는 힘들다. 그런 면에서 다소 억울하기도 하다. 앞으로 진정한 보수, 긍정할 수 있는 보수의 축을 만들어가야 한다.

김 : 자유주의에 대한 논쟁이 필요하다. 나는 크게 보아 자유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데, 다만 자유주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방법적으로 좌파적인 것을 지지해야겠다는 입장이다. 좌파든 보수든 평등에 대한 문제를 묻어두고 있다. 평등과 불평등을 얼마나 인정하느냐에 대해 사회적, 정치적, 성적인 측면에서 솔직한 견해를 밝혀야 한다.

임 : 대화가능한 비판의 룰이 마련돼야 한다. 룰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얘기도 평행선을 그어 버리고 담론시장이 형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입장을 분명히 밝히면서 한 문제를 인식의 극한까지 밀고 나가는 방식이 필요하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좌우를 막론하고 ‘망라주의’의 문제를 안고 있다. 좋은 것을 다 끌어오는 방식으로는 토론도 문제제기도 안된다. 이 점에서는 우파들이 차라리 솔직했다. 좌파들은 도망가기를 취했다. 우리 사회의 지형을 기존의 틀로 읽어선 안된다. 인종주의, 국가주의, 남성국수주의는 우파만이 아니라 좌우가 모두 공유하지 않았나. 다층적인 이념적 지형으로 문제를 풀어가야 담론시장이 형성될 것이다.

함 : 자신과 이데올로기적으로 다른 입장을 대할 때 항상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는 것도 문제다. 유교를 말하면, 복고주의 아니면 파시즘으로 바라본다. 선의가 있다고 이해하기 보다는 기득권을 유지하려 한다는 식이다. 선의를 서로 인정해주면서 토론을 한다면 더 풍부한 토론이 나올 것이고, 학술담론이나 사상적 지평도 훨씬 넓어질 것이다.
김재환 기자 weibliche@kyosu.net
약력
신광영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위스콘신대 사회학 박사. 『경제와 사회』편집위원을 맡고 있으며, 우리신문 편집기획위원. 저서로는 『계급과 노동운동의 사회학』, 『동아시아 산업화와 민주화』 등과 다수 역서가 있다.
김진석
서울대 철학과 졸업, 동일 하이델베르크대 철학 박사. 『문학과 사회』, 『포에지2000』의 편집위원을 역임한 바 있으며, 지난해부터 『사회비평』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탈형이상학과 탈변증법』, 『초월에서 포월로』, 『이상현실 가상현실 환상현실』 등의 저서가 있다.
함재봉
미 칼톤대 경제학 학사. 존스홉킨스대 정치학 박사. 대통령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을 역임한 바 있으며, 『전통과 현대』를 창간,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유교, 자본주의, 민주주의』, 『탈근대와 유교』 등의 저서가 있다.
임지현
서강대 사학과 졸업, 동대학원 역사학 박사. 역사전문지인 『역사와 문화』 편집위원과 『당대비평』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으며,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그대들의 자유, 우리들의 자유』, 『이념의 속살』 등의 저서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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