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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게 먹힌 한국 지식계
신문에게 먹힌 한국 지식계
  • (강준만/전북대·신문방송학)
  • 승인 2001.10.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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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0-17 16:01:17
‘말의 권력, 담론의 윤리’를 테마로 내건 ‘연속기고’에 참여한 세 분의 글 가운데 홍윤기 교수의 글과 윤평중 교수의 글엔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진우 교수의 글엔 동의하기 어려웠는데, 내가 가장 주목한 건 이 교수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었다.

“언제부터인지 언론개혁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면 ‘반개혁’이라는 낙인을 찍고 지식인의 자격마저 박탈하려는 ‘분위기’가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다.”

이 주장은 ‘조선일보’의 ‘위기의 지식인 사회’라는 기획에 참여한 교수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씀이다. 과연 그런가. 나는 그들의 과장에 동의하기 어렵다. 언론개혁 운동 진영 일각에 그런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는 것엔 동의할 수도 있겠지만, 그 진영의 일각을 ‘우리 사회’로 간주하는 이 교수의 과장법은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진실로 ‘우리 사회’에 그런 분위기가 팽배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조선일보’가 지금처럼 ‘1등 신문’으로 건재할 수 있다는 건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다.

易地思之에 충실할 필요

늘 강력한 주류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마치 무슨 핍박이라도 받는 희생자처럼 묘사하는 건 소설가 이문열씨의 행태에서 원없이 구경해 온 터이라 크게 놀랄 일은 아니지만, 지금 이 자리는 ‘선전·선동’이 아니라 객관적인 분석을 위한 자리임을 유념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언론개혁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易地思之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언론개혁을 역설하는 사람들이 입을 수 있는 피해에도 눈을 돌려보자는 것이다. 예컨대, 연고대 교수들에겐 두 대학의 재단을 장악하고 있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비판할 자유가 있는가. 없다. 행여 비판하면 즉각 어디에선가 전화가 와 자중자애할 것을 요구한다. 물론 그 요구를 뿌리치긴 대단히 어렵다. 언론개혁 논란의 와중에서 두 신문을 옹호한 교수들 가운데 연고대 교수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연고대 교수들 가운데 나의 이러한 주장에 이의가 있으면 반론을 해주시기 바란다.

정도의 차이일 뿐 한국의 대학교수들은 ‘표현의 자유’를 마음대로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나는 한국의 ‘지식인 문화’를 말하기에 앞서 한국의 대학 교수들이 얼마나 취약한 입지에 서 있는 봉급 생활자들인가 하는 점이 먼저 규명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학연에 의한 통제도 규명돼야 할 것이다. 이론적으론 제 아무리 진보적인 자세를 취하더라도 자신을 교수로 뽑아준 스승 또는 선배 교수의 뜻에 반하여 현실 문제에서도 진보 또는 개혁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는가. 결코 쉽지 않다는 데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리라 믿는다. 우리 학계에서 ‘앎’과 ‘삶’이 따로 노는 경향이 강한 이유도 바로 이러한 내적 통제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모든 외적 통제로부터 자유롭다 하더라도 명예를 얻고자 하는 교수의 ‘인정 욕구’가 지식인으로서의 ‘표현의 자유’를 통제할 수 있다. 한국의 신문들만큼 인문사회과학 교수의 학술 영역에까지 깊숙히 개입하는 신문이 또 있을까. ‘조선일보’가 ‘나를 바꾼 ‘知의 순간’’이라는 연재물로 교수들의 연구실 탐방을 하더니 이젠 ‘동아일보’가 ‘나의 연구노트’라는 연재물로 교수들의 연구실을 공개하고 있다. 신문들은 교수들의 저서 소개는 물론 무슨 학회를 소개한다며 전면을 할애하는 서비스에도 충실하다. 신문의 외부 칼럼니스트들도 교수들이 거의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다. 여태까지 정관계에 진출한 교수들의 거의 대부분이 칼럼니스트로 획득한 명성의 덕을 보았다는 걸 누가 부인하랴.

언론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은 한국 신문시장의 7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는 조중동(조선-중앙-동아)의 ‘보복’을 감수해야만 한다. 자기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어떤 형식으로건 보복을 한다는 점에서 이 신문들은 결코 사회적 公器가 아니다. 저급한 ‘편 가르기’는 바로 이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것이다.

신문에 의한 ‘편가르기’

한국 지식계에 공론 영역이 있다면 그건 신문들에 의해 먹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신문에 의존하지 않는 독자적인 言路를 갖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면 자신의 ‘자율성’에 대한 환상을 재점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선일보’의 문제는 결코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적 성향’의 문제도 아니다. 이 신문은 이진우 교수가 강조해마지 않는 ‘개방적 합리성’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식인 문화’마저도 황폐하게 만든 주범인 것이다. 그 신문에 그 신문을 옹호하는 글을 쓰면서 ‘개방적 합리성’을 강조하는 건 그 신문의 후안무치한 상술에 놀아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조선일보’에 대한 문제 제기의 방식이 다 옳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히 적지 않은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문제는 외면하거나 용인하면서 그 신문에 대한 문제 제기의 방식에만 주목해 ‘위기의 지식인 사회’ 운운하는 건 너무도 불공정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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