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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그는 선구자인가 반역자인가
김옥균, 그는 선구자인가 반역자인가
  • 교수신문
  • 승인 2007.05.28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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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기획시리즈 ]조선 개화파 논의<1>

허동현 교수는 개화기 근대화의 주체를 둘러싼 논쟁에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민족·민중주의는 억압의 기제로 작용할 위험성이 있다. 내발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은 편향적이고, 대한제국 근대화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은 둘 다 우파적 역사해석이라고 허 교수는 비판한다.

역사는 반복하는가? 냉전 붕괴 후 다시 돌아온 힘이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세상을 맞아 다시 돌아 본 우리의 현재는 한 세기 전과 너무도 흡사하다.
제국주의의 시대이자 국민국가의 시대였던 개화기(1876∼1910)의 시대적 소명이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막고 근대 국민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면, 지금 우리는 혼혈인과 이주노동자라는 이 시대의 상놈에 대한 차별을 넘어서는 사회 통합 이루기, 남녀동권의 양성 평등 사회 이룩하기, 미완인 민족을 단위로 하나 된 국민국가 세우기, 그리고 동아시아와 더불어 사는 지역 공동체 만들기라는 현재적 요구에 답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근대 국민국가 만들기와 더불어 제국주의 열강의 침입에 맞서 나라를 지켜야 할 이중의 과제를 짊어졌던 한 세기 전 이 땅의 사람들 마냥 우리들도 동시대 다른 나라 사람보다 과중한 책무, 즉 남북이 하나 되는 근대 국민국가 만들기와 국민을 넘어 시민으로 거듭나기라는 미완의 근대과제와 함께 타자·타민족과 더불어 살기나 양성 평등사회의 실현과 같은 근대 이후 과제를 양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

자주·타협·지역 공동체의 대안들
열강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을 묘책은 무엇일까? 한 세기 전 이 땅의 사람들을 고뇌케 한 화두가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오늘 우리 지식사회는 세 가지 해법을 내 놓는다. 한국사학자들은 제국과 당당히 맞설 민족을 단위로 하는 자주적 국민국가의 완성을, 경제사학자들은 제국과의 타협을, 그리고 서양사학자들은 유럽공동체(EU) 같은 동아시아 공동체 건설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시대를 앞서 이를 먼저 고민했던 대표적 개화파 인물 김옥균(1851~1894)은 분명 선각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일본이란 외세에 기대고 무력에 호소하는 유혈쿠데타 갑신정변(1884)을 일으켜 국민국가 만들기를 시도했으며, 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후 한·중·일 삼국이 힘을 모아 서구의 침략을 막자는 三和주의를 제창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을 단위로 한 국민국가를 세우려 하면서도 제국과 타협하려 했으며, 민족을 넘어 일종의 동아시아 공동체도 모색했던 이중성과 모호함이 그에 대한 평가를 어렵게 만든다.
그만큼 시대와 지향에 따라 肯否가 엇갈리고 好惡가 교차하는 역사적 인물도 드물다. 정변 동지 서재필은 그를 “시대의 추이를 통찰하고 조선을 힘 있는 근대국가로 만들기를 절실히 바란” 위인으로 기억하지만, 정변에 불참한 윤치호는 “위로 나랏일을 실패하게 하고 아래로 민심을 흔들리게 한 경망스런” 인물로 깎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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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동시대를 살고 생각을 함께 한 개화파 인사들의 평가가 엇갈릴 뿐만 아니라, 항상 같은 내용이었을 것 같은 북한학계의 그에 대한 평가도 늘 변해왔다. 주체사상이 대두되는 1950년대 중반을 경계로 그에 대한 평가가 “친일 주구”라는 악평에서 “부르주아 개혁운동을 주도한 혁신관료”라는 찬탄으로 뒤 바뀌었으니 말이다.  

김옥균에 대한 엇갈린 평가들
오늘 우리학계의 김옥균관도 평자가 서 있는 곳과 지향하는 바에 따라 서로 충돌한다. 남의 국민과 북의 인민이 하나 되는 민족을 단위로 한 국민국가의 완성과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가슴에 품고 있는 한국사학자들은 근대 국민국가를 세우려 한 그의 이상에는 공명하되 일본에 의존하고 민중의 힘을 도외시 한 그의 전략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대한민국이란 국민국가의 자본주의적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 민족에서 인민을 분리할 것을 주장하는 경제사학자들은 민족을 넘어 제국의 품안에서 발전을 도모한 그의 개혁 방법론을 긍정하나, 당시 그를 비롯한 개화파의 역량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이들은 모두 근대화를 역사의 필연으로 보기에 그를 부국강병 프로젝트를 이끈 ‘근대화 운동의 선구자’로 호평한다.
하지만 민족과 자주를 중시하는 이들의 눈에 비친 그는 ‘조국을 외세에 판 반역자’에 불과할 뿐이다. 또한 갈수록 거세어지는 신자유주의의 압박과 제국의 지배에 맞서 싸우기 위해 민족과 국가를 넘어선 지역공동체의 수립이 필요하다고 보는 탈민족의 시각으로 볼 때 그는 최초의 ‘동아시아 공동체주의자’로 비칠 것이지만, 근대성을 더 이상 구현해야만 할 역사적 진보나 보편적 선으로 보지 않는 탈근대주의자에게 그는 ‘근대화를 빙자해 마구 살육을 범한 범죄자’일 뿐이다. 이처럼 김옥균에 대한 평가가 크게 엇갈리는 것은 연구자들의 정치지향과 세계인식이 현격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화기 근대화의 주체를 둘러싼 논쟁의 추이와 학설들에 보이는 세계관의 차이 및 문제점은 무엇일까.
첫째 한국사학계의 경우 1970년대까지 민족주의 담론에 의한 개화파가 주도하는 근대화의 가능성 모색에 초점이 맞춰지다가, 1980년대 들어 민중에 의한 근대화를 ‘올바른’ 근대화의 길로 보는 민중주의사관이 주류학설의 지위를 점하였다. 이 두 학설은 모두 일본의 침략이 없었다면 개화기에 자력으로 근대화를 이루었을 것이라는 내재적 발전론과 일제 침략자론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냉전이 해체된 1990년대 이후 민중주의사관은 민중을 주어로 민족을 품는 민족·민중주의의 입장을 취했다. 즉 남의 국민과 북의 인민이 하나 되는 민족을 단위로 한 국민국가의 수립이라는 근대기획의 완성과,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여전히 가슴에 품는 ‘민중혁명필연론’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근대성을 더 이상 반드시 구현되어야 할 역사적 진보나 보편적 선으로 보지 않는 신좌파들과 차별성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외세의 침략에 맞선 저항담론으로서의 민족·민중주의는 어찌 보면 개인에게는 외세와 마찬가지로 억압과 통원의 기제로 작용할 수도 있는 거대 담론이기에 다원적 시민사회를 사는 오늘에는 시대착오일수도 있다.
둘째 민족·민중주의라는 한국사학계의 주류담론에 대한 비판은 냉전이 무너진 1990년대 이후 조선후기 연구자로부터 촉발되었다. 이태진과 한영우 한국사학자들은 서양과 유사한 근대로의 길이 조선후기에 이미 주체적으로 모색되었다는 내발론을 대한제국 시기에 연장·적용한 반면, 경제사가인 이영훈은 ‘조선후기 위기론’을 바탕으로 한국을 근대로 이끈 힘은 일본이라는 외세였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을 제기한 바 있다. 전자가 외세를 배격한 민족의 자주만을 강조하는 국수적인 민족주의 계열이라면, 후자는 대한민국이란 국민국가의 자본주의적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 민족에서 인민을 분리할 것을 주장하는 뉴라이트 계열의 정치지향을 대변한다. 특히 후자는 자국과 자민족을 중시하는 미국과 일본의 신보수주의자들과 달리 민족을 넘어 제국의 품안에서 발전을 도모하는 역설을 범한다. 

우파적 역사해석은 경계해야
셋째 역설적이게도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한제국 근대화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은 둘 다 우파적 역사해석이며 개발독재를 옹호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전자는 과거사에 대한 성찰이라기보다 근대화 실패와 망국의 책임을 일본에 떠넘기기라는 과오 감추기라는, 그리고 산업화만을 근대화의 지표로 삼아 근대화의 주체가 일제라도 무관하다는 식민지근대화론도 식민지화의 필연성을 주장한 식민주의사가들과 식민지 시혜론을 펼치는 오늘 일본의 우익들의 논리를 뒷받침하는데 이용될 수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넷째 왕실을 근대화의 주체로 보는 대한제국 근대화론은 우파적 견해이지만, 민족을 수사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보는 민족·민중주의와 공통분모를 갖는다. 따라서 이 두 학설은 공히 일본을 침략자로 그리고 그 연장인 식민지 시대를 수탈론의 시각에서 본다. 한국사학계의 주류격인 민족·민중주의 담론이나 대한제국 근대화론은 근대화 주체에 대한 이견이 있을 뿐 모두 근대화필연론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나 이 두 학설은 모두 1990년대 후반 이후 남녀차별과 환경파괴, 그리고 대량살육이 자행된 근대가 무엇이 좋아 따라하지 못해 안달이냐고 비판하는 탈근대·탈민족 계열의 역사사회학자나 서양사학자들의 눈에는 근대지상주의라는 점에서 한 배속 쌍생아로 비칠 뿐이다. 
이처럼 개화기의 근대화 주체에 대한 기억의 편차가 크다는 것은 갈가리 나뉜 우리 사회의 난맥상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고 세계사의 보편적 흐름에 거스르는 우리역사의 특수성 때문일 수도 하다. 하지만 생각을

달리하면 다원화된 우리 사회의 성숙도를 재는 시금석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허동현 / 경희대·한국근대사


필자는 고려대에서 ‘1881년 조사시찰단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 수원캠퍼스 교양학부장이다. <근대한일관계사연구>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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