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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격의 순간, 가뭄 잊은 천둥번개
감격의 순간, 가뭄 잊은 천둥번개
  • 교수신문
  • 승인 2007.05.28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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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전의 발굴 뒷이야기]시험발굴에서 건진 천마총 신라금관

□ 천마총 출토 금관.

관광도시 경주를 방문하면 시내 중심에 신라고분공원이 조성돼있다. 경주시 황남동에 분포하고 있다고 해서 황남동신라고분군이라고 하는데 발굴조사와 정비를 통해 고분공원을 조성하고 관람료를 지불해야만 공원 내로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이 가운데 신라무덤의 내부를 관람객이 들어가서 볼 수 있도록 관광자원화 한 것이 유명한 천마총이다.
1971년 경주관광개발 10개년 계획이 청와대 주관으로 마련되었는데 이 계획은 당시 박정희대통령의 특명이나 다름없었다. 이때 마련된 계획이 오늘날 경주의 모습으로 변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경주 평지에 분포되어있는 신라무덤들 가운데 추정이지만 부부무덤으로 남아있는 가장 큰 무덤이 소위 98호 고분으로 이 무덤을 발굴조사한 후 내부를 공개해 관광자원으로 하고자 했던 것이다. 무덤의 외형이 표주박처럼 생겼다고 표형분(瓢形墳)이라고 하기도 하고 무덤 두 개가 쌍둥이처럼 붙어있다고 쌍분(雙墳)이라고 부르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높이가 25미터에 이르고 동서 길이가 1백20미터가 넘는 어마어마한 큰 규모의 무덤을 발굴한다는 것은 당시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대형의 신라무덤발굴기술이 축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상과제로 떨어진 발굴조사를 한가하게 발굴이 가능 하냐 마냐를 놓고 설왕설래 할 일이 못되었다. 경주개발계획이 청와대에서 주도적으로 하지 않았다면 아마 어떤 이유를 달아서라도 어려움을 토로하고 천천히 하는 방법을 강구했겠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고민하다 생각해낸 것이 실험발굴이었다. 즉 실험적으로 파괴는 되었지만 부근에 있는 비교적 큰 신라무덤 하나를 먼저 조사하면서 발굴기술의 노하우를 획득한 후 본격적으로 조사하고자 한 것이다.
1973년 봄, 경주고분발굴조사단이라는 이름으로 발굴조사단이 구성되고 전원 합숙생활을 하면서 발굴조사에 임했다. 완전히 군대조직이나 다름없는 일사불란한 조직의 발굴단 운영이었다. 결과적으로 광복 최초로 신라금관이 엉뚱하게도 실험발굴용 무덤에서 출토되는 영광을 맞았다. 발굴결과 순금으로 만든 금관을 비롯 무려 1만1천5백여점에 달하는 엄청난 신라시대 고급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발굴이 진행되는 가운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커다란 관심을 가져 현장을 방문했는데 발굴단 조사원들을 가장 신나게 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격려금이었다. 최고통치권자가 주는 것이라 하여 하사금(下賜金)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무려 1백만 원을 격려금으로 주었던 것이다. 오늘날 돈의 가치로 따진다면 그렇게 크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1970년 당시는 인부 하루일당이 겨우 6백 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가치로 계산한다면 무려 1억 원에 해당되는 돈이었다. 대통령이 직접 준 격려금의 사용처는 청와대에 보고되어야 했다.  
발굴이 진행되던 1973년 여름은 유난히도 가뭄이 심했다. 경주시민들은 신라시대의 무덤을 발굴하는 것을 그렇게 반기고 있지는 않았다. 심지어 가뭄이 계속되는 것은 무덤을 파고 있기 때문이라고, 발굴을 중단하라는 시민들의 대모 움직임도 있었다. 그러한 어수선한 분위기가 계속된 가운데 7월 25일 오전 1천4~5백년의 깊은 잠에서 깨어난 신라금관이 발굴대원의 눈앞에 나타났다. 우리 손으로 아니 발굴조사에서 생각하지도 않았든 신라금관의 모습에 흥분과 감격의 순간을 맞았다. 그런데 이 무슨 조화인지 그렇게 가뭄으로 불볕이 내려 쪼이던 하늘에 갑자기 서쪽으로부터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암흑천지로 변함과 동시에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 놀란 조사원들과 작업인부들은 작업을 중단하고 우선 피신하기 바빴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나서 일단 비가 소강상태를 보이자 다시 조사현장으로 나가 금관을 수습하여 유물상자에 안전하게 옮겨 놓자 그렇게도 기승을 부렸든 하늘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맑게 개었다.
여름날의 소나기 한줄기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가뭄이 계속되고 있던 당시의 분위기로 봐서는 자못 심각할 뻔했던 일이 금관의 출토로 진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천수백 년이 넘도록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있던 주인공의 넋이 크게 노해 벼락과 함께 비를 내린 모양이라고 조사원들은 이심전심으로 느꼈다. 이 금관이 출토된 이후부터 유언비어도 사라졌고 가뭄도 해소되었지만 하늘의 조화는 인간의 힘이 미치지 않는 것이다.
뜻밖에도 실험발굴에서 금관까지 발견하게 되어 개가를 올렸지만 유감스럽게도 주인공의 이름을 밝혀 줄 유물은 없었다. 명칭 부여에 있어서 논란도 있었지만 천마총으로 결정했다.  이유는 출토유물 가운데 금관이 가장 중요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벌써 3개나 출토된 바 있고 또 네 번째 금관출토라 제4금관총으로 이름 짖기도 곤란했다. 그래서 금관을 재외 한 유물 가운데 학술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는 유물이 천마도가 있는 말다래(障泥)를 꼽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그림이 신라회화를 대표할 수 있는 그림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신라회화사를 가름할 수 있는 천마의 그림이 출토된 큰 무덤’이란 뜻에서 작명하고 1974년 9월 23일 문화재위원회에서 천마총으로 결의했다.
이 천마총에서 출토된 유물은 경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공개된 무덤내부의 진열된 유물은 모두 다시 만든 것인데 일반인들의 눈에는 진품의 유물로 착각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만큼 모조품을 잘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이야기를 간직한 천마총의 주
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에서도 밝혀진 바 없지만 언젠가 주인공이 신라왕으로 밝혀진다면 누구의 왕릉인지 이름을 되찾게 될 것이다. 

 

조유전 / 토지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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