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18:50 (목)
‘성적 쾌락’ 다르게 푼 구스타프 클림트 vs 프랜시스 베이컨
‘성적 쾌락’ 다르게 푼 구스타프 클림트 vs 프랜시스 베이컨
  • 교수신문
  • 승인 2007.05.26 23: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양미술 인물 ‘극과 극’]

섹스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가장 기본 수단이자 죽음보다 깊은 쾌락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섹스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가 필요하다. 섹스는 인간이 가지는 가장 친밀한 표현 수단임에는 틀림없지만 섹스 상대가 없다면 절대로 쾌락을 느낄 수 없다.  옛날부터 결혼을 통해 성적 욕망을 공식적으로 쉽게 해결했지만 미혼 남녀나 동성애자들에게는 섹스 상대를 구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클림트는 성적 욕구를 풀 수 있는 방법으로 모델에게 돈을 주었고 베이컨은 동성애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에서 자신의 욕구를 매춘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풀었다.

모델이 성욕 상대…정신적 사랑 따로

성적인 욕망을 생생하게 표현한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화실은 성적 환상과 그의
억눌린 욕망을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였다.

□ 1912년경, 작업실 정원에서 작업복을 입고 고양이를 안고 있는 클림트. 빈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 소장. (클림트는 자화상을 남기지 않았다)

19세기에 남자들은 싫증나지 않고 쾌락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그 대상자가 하류층 여성들이었다. 하류층의
여성들은 그들의 무자비한 욕망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성적 쾌락을 끊임없이 추구했던 클림트는 19세기 남성이
가지고 있었던 전형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클림트의 화실에 있는 모델들도 하류층 출신으로 그들이
돈을 벌지 않으면 생활을 할 수 없었던 여성들이다.
클림트는 자신의 작품의 모델로 그리고 자신의
욕망의 배출구로 그녀들을 고용했다.
클림트는 모델에게 풍족한 금전 혜택을 줌으로써 모델
삶까지 지배했다. 모델은 그의 일시적 성욕의 대상자로서
그의 난잡한 성생활의 피해자였지만 결국 그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야했다.
클림트와 문란한 성관계를 가겼던 모델들은
그의 요구대로 화실에서 풍만한 엉덩이를 드러낸 채
모델끼리 동성애를 즐기고 있든가 아니면 자위행위를 하면서
성적인 것을 드러내고 자유스럽게 표현했다. 
여러 모델들과 육체적 관계를 가진 클림트에게 모델들과의
섹스는 아무런 친밀감을 주지 못하고 성적 쾌락을 위한
도구였을 뿐이다.
그런 모델들 가운데 클림트와 오랜 시간 동거했던
여인이 미치 침머다.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 두 명을
낳았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모델들과 다르게 클림트의
애정을 받았지만 그녀의 지위는 향상되지
않았다. 클림트는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을 철저히
분리시켰기 때문이다. 그의 정신적인 사랑의 여인이
의상디자이너 에밀리 풀뢰게다. 그녀와 클림트는 매년
여름휴가를 같이 보낼 정도였지만 두 사람은 평생 육체적인
관계는 갖지 않았다.
클림트의 모순된 생각은 여성의 초상화들을 보면 알 수
있다.
클림트의 초상화 속의 인물들의 특징 중에 하나가
귀부인들과 모델의 표현방식이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귀부인들은 장식적인 의상에 육체가 가려져 있고
모델들은 벌거벗은 채로 화면에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작품 속에 나오는 모델의 노골적인 포즈는 남성적인
호기심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제공되었을 뿐이다.

 

거리 누비며 동성애 매춘까지 즐겨

프랜시즈 베이컨(1909~1992)은 어린 시절 매춘부와 딱
한 번의 경험을 제외하면 평생 여자와 섹스를 하지 않았다.
그는 완전한 동성애자였다. 동성애가 수치였던 시대에도

□1973년, 캔버스에 유채, 198*147, 개인소장.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결코 숨기지 않았다. 베이컨의
동성애 성향은 예술세계를 이끌어주는 계기가 된다. 그는
스스로 불안정하고 폭력적인 삶을 선택했고 그것이
베이컨 예술 세계에 바탕이 된다. 내면에서 숨겨져 있던
자아를 형상화시켰던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군인 출신의 그의 아버지는 베이컨이
여성스러운 행동을 하면 집안의 일꾼이었던 마부를 시켜
폭력을 행사했다. 그것이 그를 자극했다. 그는 마부들의
폭력이 성적 쾌감을 준다는 것을 알고부터 그들과
정기적으로 성관계를 가졌을 정도다.
베이컨의 성적 취향은 그를 집안의 수치로 여기게 한다.
집에서 쫓겨난 베이컨은 런던에서 생존을 위해 부유한
동성애자들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그는
부유한 남자들과의 성관계를 통해 성적 쾌락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베이컨의 가족들은 그의 방탕한 생활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결국 가족들은 베이컨의 동성애 취향을
바꾸기 위해 베를린에 살고 있는 삼촌에게 보낸다.
그 당시 베를린은 동성애 매춘이 성행 해 당국에 허가를
받은 동성애 클럽이 170여개가 있었을 정도다. 베를린은
베이컨에게 천국이었다. 삼촌마저 베를린의 그런
분위기에 빠져 있어 그를 통제하지 못했다. 진정한
편안함을 동성애 클럽에서 느꼈던 베이컨은 베를린을 떠나 프랑스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피카소의
전시회를 보고 충격을 받아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런던으로 돌아온 그는 그림과 생활을 위해
여전히 매춘을 한다. 항상 새로운 동성애자를
원했던 베이컨에게 매춘은, 돈은 물론 최고의
쾌락을 주었다. 그는 매춘을 하면서 가학적이고 변태적인 행위를 탐닉하기 시작한다.
동성애가 불법이었지만 그는 화장을 한 채
거리를 활보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림은
계속 그렸고 전시회에 출품하기도 한다.
전시회에서 그의 작품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절망에 빠진 그는 그림을 포기하고 점점
변태적인 섹스에 심취하기 시작한다.
그런 와중에 베이컨의 정부였던 공무원
에릭 홀이 도움을 주기 시작한다. 그가
그림을 편안하게 그릴 수 있도록 15년 동안
도움을 주지만  후미진 곳에 위치한 남자 화장실에서
충동적인 섹스를 좋아했던 그에게 후원자와의 섹스는
자극적이지 못했다. 특히 그의 성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것은 돈을 받고 섹스를 하는 일이었다.
베이컨은 중년이 되면서 어린 남자들에게 빠져든다. 거칠고
가학적이고 재미있는 그들과의 성관계는 그에게 창작의
세계를 더 활짝 열어준다. 이제 돈을 위해 매춘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화가로서 성공 하고 있어도 그는
여전히 싸구려 동성애 클럽에 있는 것을 더 좋아했다.
60대와 70대에도 여전히 동성에 클럽을 찾아다닐 정도로
문란한 성생활을 즐겼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