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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유럽과 한국의 대학 도서관 비교 체험
[진단] 유럽과 한국의 대학 도서관 비교 체험
  • 교수신문
  • 승인 2001.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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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0-19 13:46:01
박노자 / 오슬로 국립대·한국학

한국 대학에서 3년 동안 몸담았던 필자는, 한국 대학 도서관의 문제점을 몇 가지 범주로 분류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장서(특히 洋書)의 만성적인 부족을 낳은 장서 구입의 문제고, 두 번째는 이용자의 수를 제한하는 장서 관리의 문제고, 세 번째는 도서관 전문가 양성의 문제다.
장서 구입의 문제는, 고질적인 예산 부족으로 말미암은 구입 규모의 제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특히 양서 구입에 있어서 뚜렷한 구입 전략의 부재다. 즉, 제한된 자금을 인문·사회과학·이공계 등 가장 긴요한 분야의 핵심도서 구입에 쓰는 대신, 뚜렷한 체계 없이 주변적인 출판물들을 마구 사들이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필자가 재직했던 대학 도서관에서는 민족주의에 대한 논문을 위해 절실히 필요했던 가장 기본적인 사회 과학 도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최근에 출판된 안데르손(B.Anderson)이나 겔네르(E. Gellner), 스미스(A.Smith) 등의 명저들은 물론이거니와, 칼 마르크스의 고전급 저작물마저도 구할 수 없었다. 영문으로 된, 그리고 서방 굴지의 출판사들이 낸 유명한 출판물들마저도 없는 도서관에서, 독일어나 러시아어 등 ‘희소 유럽 언어’로 된 학술 서적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한 사항이었다.
유학 시절 필요한 저서를 사 놓은 교수들은 별다른 어려움이 없겠지만, 아직 장기적인 외유를 거치지 않은 젊은 연구자들에게는 사실상 두 개의 선택만이 있다. 필요한 책을 개인적으로 구입하거나, 연구실 안에 ‘나만의 도서관’이 구비된 교수와 가까운 관계를 맺는 정도의 선택이다. 돈이나 ‘가까운 관계’ 없이, 대학 도서관에만 의존해서 공부할 수 없는 현실은, 공적 영역보다 사적 영역이 훨씬 중요한 한국 대학의 전반적인 현실과도 일맥상통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학이 드문 스칸디나비아 대학들의 도서관에서는 ‘퇴계 전서’나 ‘승정원일기’, ‘조선조 실록’ 등 한문 해독 능력이 있는 주변 분야(중국학 등)의 전문가들이 필요로 하는 한국학의 기본 자료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용 빈도는 낮지만, 연구자의 잠재적 욕구를 미리 헤아려 기본 자료를 잘 모아 주는 것은, 체계적인 구입 전략의 일단을 잘 보여 준다.

‘지식의 공유’는 대학도서관의 의무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오슬로 대학의 도서관은, 명색은 대학 도서관이지만, 실제로는 ‘시민 도서관’이다. 물론, 대학 관계자가 아닌 이용자들의 도서 대출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모든 시민들은 개가(開架)에 놓인 책들을 읽거나 복사할 수도, 도서관의 무료 인터넷을 무제한 사용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자유 이용’의 관례는, 대학의 지식이 대학의 전유물이 되어서 안 된다는 ‘지식 공유’의 기본 원칙에 의거한다. 참고로, 이와 같은 차원의 또 하나의 관례는, 학생으로 등록돼있지 않은 일반 시민도 대학 강의를 마음대로 청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학 도서관 입구에서 신분증을 확인하는 수위 아저씨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은, ‘지식 자유’의 원칙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러나, 한국 대학 도서관 입구에 맨 먼저 보이는 것은 바로 수위실이다. 교직원·학생의 신분증이 없는 사람들이 도서관 문턱을 넘어갈 수 없는 것은, 대다수 대학의 현실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많은 경우 타 대학 학생들의 도서관 이용을 막기 위해, 다름 아닌 ‘학생회’가 이용 권리의 제한과 신분증 확인 절차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물론, 도난 사건과 자리 부족 등 만성적인 문제들을 감안한다면, 이와 같은 요구를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개방적이어야 할 학생 운동가들이 오히려 외부 세계와 담을 쌓는 대학을 정상적인 일로 생각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현재의 문제들은 예산 투입과 도서실 증축 등의 대책으로 해결할 수 있겠지만, 학생증을 보여주면서 도서관에 들어가는 경험으로 생기는 ‘우리’와 ‘남’을 구별짓는 차별적인 세계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가본 호주나 지금 살고 있는 노르웨이에서 대학 도서관 사서는 연구직에 가까운 고등 전문 직종에 속하며, 처우도 교직자와 별다른 차별이 없다. 서지학적 학술 논문을 쓰는 사람도, 해외 도서 구입의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사람도 다름 아닌 사서다. 기능이 전문적인 만큼 수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일본, 한국, 중국의 언어별로 원어도서를 관리하는 사서가 따로 있다. 노르웨이뿐 아니라 대부분 서방 도서관들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학구적이며 전문적인 사서들이다. 그러나, 한국 대학에 전문 사서는 매우 적다. 독일어·러시아어 도서를 따로 관리할만한 전문 사서를 찾아보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이 상황에서 이들 ‘희소 유럽 언어’ 도서 구입 계획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는 것이 과연 놀라운 일일까? 물론, 충분한 수의 사서를 고용할 수 없는 대학 재정의 문제이겠지만, 고급 전문 사서를 양성하는 도서관학과를 두는 대학이 많지 않다는 것도 하나의 요인인 셈이다.

근본적 해결책은 국고지원
자리와 전문 서적, 그리고 사서 부족의 근본적인 원인이 재정의 턱없는 부족에 기인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 문제는, 한국 대학의 80%를 차지하는 사립 대학들에 대한 국고 지원이 늘지 않는 한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장서(특히 외국 장서)구입에 있어서, 있는 자금이라도 합리적으로 쓰고, 도서관 이용에 있어 배타적인 정책의 재고 등 나름대로의 개선책이 가능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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