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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기획시리즈]조선 개화파 논의 반론
[역사비평 기획시리즈]조선 개화파 논의 반론
  • 교수신문
  • 승인 2007.05.21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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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부경대 교수(철학)가 이상익 영산대 교수(동양철학)의 글에 대한 반론을 보내왔다. 개화파가 중화체제로부터 벗어나고자 시도했던 것은 중국이 조선의 자주성을 제약했기 때문이라고 김 교수는 주장한다. 사대·자소의 관계는 언제든 약육강식으로 변질될 수 있었다는 것. 이에 대한 답변으로 이 교수는 중화주의를 패도적 중화주의와 왕도적 중화주의로 나누면서 유학과 위정척사파는 후자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1 유학의 중화주의에 대한 자각, 철학·문학 연구에 필수

성리학적 입장에서 조선 개화파를 논의했다는 이상익 교수의 글(<교수신문> 436호, 인권과 경제적 생활양식에 대한 ‘이견’)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중화주의로서의 주자학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의 방식인 양 말하고 있었지만 동의할 만한 주장은 거의 없었다. 
먼저 간단한 사실부터 지적하자. 개화파가 1880년대를 기준으로 조선을 중국에 예속된 국가로 규정한 것이 잘못된 현실 파악인가라는 문제가 있다. 만국공법 체계에 비추어 본다면 중국의 중화체제는 더는 유지될 수 없는 것이었다. 사대의 성격이 시대에 따라 성격에서 많은 변이를 보이는 것은 사실이나 자주성을 적지 않게 제약했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조선과 명청의 관계는 중국 고전에 따른 교과서적인 사대·책봉이므로 자주성이 적지 않게 손상되었다.
다음으로 “개항 당시에는 개화파는 제국주의의 대열에 동참하자는 이상을 내걸었었다”는 주장은 개화파의 일반적인 주장이라 보기 어렵다. 개화파가 현실 투항적, 실력 양성론으로 흘렀다는 주장은 크게 보아 틀린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위정척사파의 노선이 옳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중화주의적 교양을 가진 압도적 다수에 대한 절망이 개화파의 조급증을 낳고 일본에 의존하게 한 측면도 크다고 볼 수 있다. 

만국공법의 국제 질서는 평등했나
중요한 쟁점은 중화체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개화파는 근대적 공법질서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고, 전통적 禮의 질서에 대한 이해도 미흡했다”는 주장이 문제다.
만국공법을 국가들 사이의 평등한 국제 질서로 보았으나 실상은 약육강식의 국제 질서를 보지 못한 것이 그 ‘부족한 이해’의 실질적 내용을 가리키는 듯하다. 법률상의 평등한 국제 관계는 어디까지나 원론적이고 이념적 규정임을 개화파가 몰랐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유교적 교양 속에 자라난 그들이 예로 포장된 국제 질서를 몰랐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의존과 종속을 자연스런 것이라 아무리 속삭여도 그 본질을 감출 수는 없었다.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를 이룩해야 한다는 과제는 아직도 우리에게 커다란 숙제로 남아 있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분단도 중화 체제로부터 탈출할 때(1876, 1894), 외세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개화파는 독립이라는 과제를 자각하는 데서 단연 돋보였다. 특히 사대와 자소는 고대 중국의 특정 시기에 중국 국내에서 성립되던 여러 나라 사이의 관계가 다른 민족과의 관계에도 확대된 것이었다.
이런 관계를 동아시아 전체로 확대하고 이를 자연적인 질서라 세뇌해 온 중국 고전의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는 과제는 아직도 큰 숙제로 남아 있다. 강화도 조약의 제1조는 “조선은 자주 국가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로 되어 있다. 이는 사대 질서로부터의 이탈을 뜻한다. 일본이 중국의 개입을 막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긍정적인 면이 적지 않다.
전체적으로 보아 번속국에서 자주 독립국으로의 탈출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해양 세력이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조선과 베트남은 중국과 문화적 동질성이 크지만 중화 체제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륙의 티베트나 신장 지역은 한족과 문화적으로 크게 다르지만 끝내 중국의 한 부분으로 남았다.
사대·자소의 관계도 힘의 불균형을 전제하며 언제든지 약육강식으로 돌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상익 교수는 예에 기반을 둔 사대질서를 의리를 존중하는 평화로운 국제 질서의 모델로 보았으나 이는 소박한 생각이다. 조선과 청의 경우, 1636년에 힘의 우열을 확인한 후 정치적 사대가 성립하였다가 북학파에 이르러 문화적 우열 관계마저 현실적으로 인정하자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동아시아에서도 중국이 이웃 나라를 침략할 때에는 언제나 예나 의리와 같은 명분을 앞세웠다.
오늘날에도 인권이나 민주주의가 미국의 패권 관철을 위해 동원되는 경우가 더 많다. 만국공법으로 포장하든 예나 의리의 질서로 포장하든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 정치의 현실은 큰 차이가 없다. 위정척사파가 중화주의적 세계상의 보편성을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한 만국공법 체제가 중화체제와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할 수 없었다.
위정척사파는 지역적·인종적인 중화사상의 편협성은 물론이고 이를 기반으로 서구 문물을 단순히 오랑캐 문물이라 본 것이다. 시대착오라는 지적도 새삼스러운 것이다.
인권과 인륜은 한편으로는 배치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지양되어야 할 가치라는 데는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가치가 우리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여러 다른 가치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자유와 평등이 충돌할 수 있고 인권과 자유가 충돌할 수도 있다. 인륜하면 떠오르는 효라는 덕목은 원자화된 현대 사회를 치유할 대안이 될까?
전통 성리학은 인간의 욕구충족 구조와 자연의 순환적 재생산 구조를 일치시키려 한 것인바 이는 오늘날 더욱 절실한 과제일 것이라는 데도 우리는 쉽게 동의할 수 있다. 그런데 자연착취가 부른 환경오염에 좋은 대안이 될 것인가?
성리학이 자연의 질서를 본받는 사회 질서를 말하고 있지만 이는 동아시아 전통 사상이 크게 보아 전부 이 범주에 속하는 것이기도 하다. 유럽 전통에서도 그런 전통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우리에게 모자라는 것은 그런 형이상학이 아니다. 눈앞의 이익을 먼 앞날의 기대 이익을 위해 눈앞의 불편함을 얼마나 참을 줄 아는가가 핵심이다.

‘예’라는 추상성은 허구에 불과해
정통 주자학의 눈으로는 서양은 오랑캐였고, 서양인의 눈으로 보면 그들의 삶의 방식이 문명이었고, 전통적인 조선은 개화된 문명국이 아니었다. 온갖 구습이 온존하여 외부의 충격이 없이는 깨어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중화·오랑캐, 문명·야만의 구분은 그 자체가 매우 폭력적인 이분법적 도식으로 침략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작동하며 이는 동아시아나 유럽이나 큰 차이가 없다. 만국공법을 내세우나 약육강식의 질서가 지배하는 체제와 사대를 예로 미화했던 중화주의의 천하 체제는 힘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 문명, 예, 인권, 보편성 등 이런 추상적인 표현들은 현실의 이해관계를 분칠하는 허구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
유학의 이런 중화주의는 결코 우연적인 특성이 아니다. 존왕양이라는 시대의 과제에 대한 응답으로서 나온 유학의 주요 관심은 중국의 정치적 통일이다.
아울러 그런 통일된 나라를 운영하는 기본 원칙이요, 밑그림이기도 했다. 특히 <주례>는 통일된 나라의 관료 기구표까지 제시하고 있다. 유학은 존왕양이란 정치적 과제에 이념적 문화적 색채를 덧칠해 놓은 것이다. 중국사를 보면 유학은 통일을 이루는 데는 무력하였으나 통일된 나라를 운영하는 데는 그 효용성이 입증되었다.
중국이 혼란하던 시기에 방어적 성격이 강했던 존왕양이의 이념은 통일된 뒤 중국에 평화가 찾아오면서 몹시 공격적이고 팽창주의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한 무제와 당 태종의 조선 침략은 바로 이런 구조의 산물이다. 
팍스 시니카의 값은 언제나 중국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치렀다. 겨우 멸망을 면한 나라들은 사대, 모화, 조공 등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중화 체제에서 우리말은 ‘방언’으로 비하되는데, 이는 <춘추> 공양전의 천하 대일통을 전제한 표현이다.
<사기>도 이러한 천하관을 전제한다. 이 천하관 속에서는 겨레의 고유문화는 중국에 동화되어야 할 ‘오랑캐 풍속’으로 된다. 대동아 공영권의 논리가 허구라면 그 뿌리가 되는 중화사상은 더욱 문제가 많은 것이다. 대동아 공영권의 논리는 중화사상의 근대 일본판이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오랫동안 중국 중심의 천하 질서가 유지될 수 있었는지 그 원인에 대한 치밀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한다.
엇비슷한 크기와 힘을 가진 여러 나라로 나누어진 유럽과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힘의 우위를 가진 중국이 있었다는 점에서 중화 체제는 좀 더 안정적이었다.
또한 이런 중화 체제를 유지하는 한 지주로서 한자와 한문의 역할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에서 오랫동안 ‘문자’는 곧 한자를 의미했고, 이는 문화는 오직 한족만이 갖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한족 우위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유학의 중화주의적 성격에 대한 자각은 전통 철학과 문화의 연구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우리를 이끄는 새로운 빛이 될 것이다.

김영환 / 부경대·철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주희 철학의 마음 개념’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언어 철학 및 언어 정책, 중국 사상에 관심이 많다.

 

#2 ‘패도적’ 중화주의와 ‘왕도적’ 중화주의 구별부터

필자가 <교수신문> 436호에서 ‘개화론에 대한 성리학적 비판’을 개진한 것에 대해 김영환 교수님은 ‘유학의 中華主義에 대해 비판적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는 취지로 반론해 주셨다. 이 글은 이에 대한 답변이다.
김 교수의 주장대로 “중요한 쟁점은 ‘중화 체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일 것이다. 김 교수는 “유학의 中華主義에 대해 비판적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비판하는 중화주의가 무엇인지는 명확히 규정하지 않았다.
다만 김 교수의 논지로 보자면 중화주의란 ‘중국이 大國으로서 천하의 중심을 자처하면서 事大와 禮라는 이념을 통해 주변 국가들의 복종을 유도하고, 때로는 침략하기도 하는 것’이다.
김 교수의 이러한 논지에 대해 필자는 먼저 ‘두 종류의 중화주의’를 명확히 구별할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때로는 ‘팽창주의’가 중화주의로 규정되었고, 때로는 ‘우호와 선린의 추구’도 중화주의로 규정되었다. 중국은 천하의 중심국가로서 주변 나라들을 정치적으로 服屬시켜야한다는 논리는 ‘중국중심적 팽창주의’로서 필자는 이를 ‘패도적 중화주의’로 규정하겠다. 중화주의는 중국이 천하의 중심국가로서 주변 나라들에 대해 모범을 보이고 우호와 선린을 다져야 한다는 논리로도 전개됐기에 필자는 이를 ‘왕도적 중화주의’로 규정하겠다.

주자학과 왕도적 중화주의
역사적으로 볼 때 漢·唐이 ‘패도적(패권적) 중화주의’에 가까운 시기였다면, 宋·明은 ‘왕도적 중화주의’에 가까운 시기였다(이와 관련해서는 전원섭의 <平和를 위한 歷史>, 道道, 1991 참조). 한국을 침략하여 가장 심대한 고통을 강요했던 시기는 元·淸일 것이다. 元·淸은 異民族이 中原을 정복한 시기인 바, 元·淸에 대해서도 중화주의라는 개념을 적용시킬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굳이 적용한다면 물론 ‘패권적 중화주의’에 해당될 것이다.
필자가 김 교수의 논지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두 종류의 중화주의’를 전혀 구분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김 교수는 “중국이 이웃 나라를 침략할 때에는 언제나 예나 의리와 같은 명분을 앞세웠다”고 하면서, ‘유학이나 주자학’은 이것을 ‘事大·禮·義理’ 등으로 포장하는 이념체계였다고 규정했다.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유학의 경전이나 주자학이 추구한 것은 ‘왕도적 중화주의’였다는 점이다. 왕도적 중화주의는 중국을 ‘仁義道德의 모범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주변의 국가들과도 우호와 선린의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자.
孟子는 “큰 나라로서 작은 나라를 섬기는 것은 樂天者로서 천하를 보존할 수 있고,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畏天者로서 자기 나라를 보존할 수 있다”고 했다. 맹자가 覇道를 ‘緣木求魚’로 비판하고, 王道를 ‘仁者無敵’으로 옹호했음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 <中庸>에서는 ‘먼 지방 사람들을 부드럽게 대하면 사방이 귀의하며, 제후들을 회유하면 천하가 두려워한다’고 한 다음, ‘제후들을 회유하는 방도’로서 ‘많이 베풀고 적게 받으라’고 하였다. 朱子는 일세의 영웅이었다고 칭송하는 漢高祖·唐太宗을 覇道로 규정하고 가차 없이 비판했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유학의 경전이나 주자학에 있어서 침략적 팽창주의는 항상 비판의 대상으로 규정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김 교수가 침략적 팽창주의와 유학·주자학을 연계시키는 것에 대해 필자는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위정척사론과 대동아공영론
흔히 한말 위정척사파 역시 중화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런데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위정척사파가 추구한 중화주의는 ‘왕도적 중화주의’였다는 점이다. 위정척사파는 이념적으로 ‘北伐論’을 계승하고 있었다. 오랑캐 淸은 무력을 앞세워 조선을 능멸했으니 王者가 아니라 覇者라는 것이다. 따라서 淸은 復雪恥의 대상이었지 결코 事大의 대상이 아니었다. 위정척사파가 추구한 事大는 ‘尊淸事大’가 아닌 ‘尊明事大(尊周事大)’였다. 김 교수는 위정척사파가 당시의 朝·淸 관계를 이념적으로 승인한 것으로 간주하는데 이는 재고해야 할 것이다.
김 교수는 일제가 내세운 ‘대동아 공영권의 논리는 중화사상의 근대 일본판’이라 하면서 그 뿌리를 중화사상에 두었다. 김 교수의 논지대로 본다면 위정척사론의 뿌리도 중화사상이고, 대동아공영론의 뿌리도 중화사상인 것이다.
김 교수의 이러한 관점은 일견 정확하면서도 또 매우 부당한 것이다. 자국의 우월한 지위(국력)를 중심으로 세계질서를 편성하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대동아공영론과 팽창적 중화주의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왕도적 중화주의란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우월한 국력’을 바탕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보편적 도덕’을 바탕으로 삼는 것이다.
위정척사파는 ‘유학(주자학)의 보편적 도덕의 논리’에 입각하여 ‘제국주의의 힘의 논리’에 저항했던 것이다. 위정척사파의 이러한 논리에 대해 ‘현실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모두의 주권이 존중되는 평화로운 국제관계가 우리의 이상이라고 한다면 보편적 도덕을 외면하고서는 그것을 달성할 수 없음도 사실일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왕도적 중화주의’를 옹호했던 유학의 의의는 거듭 천명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 밖의 논점들
필자는 “개화파는 근대적 公法秩序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고, 전통적 禮의 질서에 대한 이해도 미흡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점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근대적 공법질서’는 본래 서구 국가들만을 ‘평등한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그 밖의 국가들에 대해서는 불평등조약을 강요하거나 침략과 착취의 대상으로 규정한 것이었다(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김용구, <세계관 충돌과 한말 외교사, 1866-1882>, 문학과지성사, 2001, 63쪽 참조). 반면에 ‘전통적 禮의 질서’는 외면적으로는 ‘事大字小의 階序’로 표현되었지만, 여기에서는 침략과 착취는 본래 부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필자의 “개화파는 개항 당시에는 제국주의의 대열에 동참하자는 이상을 내걸었었다”는 주장에 대해 김 교수는 “개화파의 일반적인 주장이라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김옥균의 <會社說>·<池運永事件糾彈疏>, 서재필의 <回顧甲申政變> 등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논지였다. 필자도 이것을 ‘개화파의 숙고된 立論’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것은 ‘열혈청년들의 豪氣’였을 것이다. 김 교수는 또 “개화파는 독립이라는 과제를 자각하는 데서 단연 돋보였다”고 했다.
그러나 필자는 개화파의 독립의식을 ‘자각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일본을 왕래하면서 ‘조장된 것’이라고 본다. 김옥균은 日本公使 竹添進一郞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들은 貴國에 依賴하여 우리나라의 獨立을 도모해야 한다는 깊은 뜻을 지니게 되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옥균은 <朝鮮改革意見書>를 ‘日本人’ 後藤象次郞에게 제출했던 것이다. 개화파의 독립의식이 자각된 것이었다고 한다면 開化論이 그렇게 쉽사리 親日論理로 전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왕도적 중화주의가 ‘각국의 고유문화’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왕도적 중화주의가 추구하는 것은 ‘보편적 도덕원리’를 각국이 공유하자는 것일 뿐이다.
필자는 세계 각국이 보편적 도덕원리를 공유하면서도 자신의 고유문화를 얼마든지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본다. 또한 필자도 우리 한국이 통일을 이루고 완전한 자주국가가 되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유학이나 주자학이 그것을 방해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필자는 오히려 “유학·주자학은 각국의 자주독립과 세계평화를 양립시킬 수 있는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익 / 영산대·동양철학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韓末 節義學派와 開化派의 사상적 특성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기호성리학논고>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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