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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기획시리즈]조선 개화파 논의
[역사비평 기획시리즈]조선 개화파 논의
  • 교수신문
  • 승인 2007.05.14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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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범석 명예교수는 조선이 자주적으로 근대화를 모색할 수 있었던 시기를 1894년 이전으로 보았다. 그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근대화를 불러올 수 있는 계기를 가지고 있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한편 한철호 교수는 일본보다는 청국의 외압으로 실패한 갑신정변 등 당시의 상황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개화파의 노력이 실패로 끝났지만 한국근대변혁운동사상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고 평가한다.

#1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근대화 가능성 보이다

1876년 ‘대일본국’과의 강화도조약체결로 조약을 주요 法源으로 하는 국제법의 세계에 편입된 ‘대조선국’은, 1910년에 이르러 自主之邦을 제1조에 내건 그 조약의 상대방에게 병합됨으로써 국제무대에서 사라졌다.
이 같은 痛史를 지닌 우리는 결정적 시기에 어떻게 대처했더라면 亡國을 겪지 않았을 것인가를 되씹어왔고, 주어진 논제도 같은 맥락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근대화에 관한 합의된 개념은 도출된 것이 없어 보이나 부국강병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만국공법이란 열가의 세력균형을 반영하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었다는 국제법학자 오펜하임(L. Oppenheim)의 지적은 열강이 세계도처에서 세력권형성을 에워싸고 불꽃을 튕겼던 19세기 후반기 제국주의시대에서는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
따라서 경합을 벌인 강대국이거나 뒤쫓아 근대국민국가 형성을 기하는 약소국이거나 할 것 없이 내걸었던 슬로건은 모두 부국강병이었다.
청일전쟁(1894~1895년)에서 청국이 패전하기까지 조선국은 한청종속관계라는 전통적인 아시아 국제관계에 포섭되고 있었다. 1894년 8월 1일의 선전포고에 앞서 한반도에 旅團규모로 대거 투입된 일본군은 7월 23일 느닷없이 왕궁(경복궁)을 점거했다. 그러나 이 폭거에 대해 조선국과 조약을 맺었던 열강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한청종속관계를 인정하거나 묵인해왔던 열강은 청일전쟁을 계기로 한반도가 일본의 세력권 안에 들어가게 됐다고 은연중 인정한 것이나 같았다.
경복궁점거사건이래로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군사적 우위는 보기에 따라서는 1910년의 한일합병까지 지속됐다. “군사적 승리가 현지의 정치적 상황을 규정한다.”(G. Kolko)는 명제를 받아들인다면, 조선국이 자주적으로 근대화를 모색할 수 있었던 시기는 1894년 이전이었다고 한정할 수 있게 된다.
자주적이 아닌 개혁은 ‘개혁’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간섭이 되기 때문이다.

조선, ‘정통성’ 시비가 정치문화의 바탕
획기적인 현상변혁은 새로운 사회세력이 형성되고 이에 뒷받침된 정권이 출현해야 가능하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느 국가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1894년 이전 시기에 실제로 어떤 정권교체 세력의 대두를 바랄 수 있었는가.
조선국은 君主政體이나 국왕은 성리학으로 이론무장한 사대부 층의 강한 견제를 받았으므로 왕통과 도통(학통)의 ‘통’, 즉 정통성을 에워싸고 벌어지는 시비가 정치문화의 바탕을 이루었다.
정치적 타협이 아니라 黑白邪正의 준엄한 시비가 선행하고 是非混雜하는 정치풍토는 이윽고 1575년의 동서분당, 다시 동인의 남북분당과 서인의 노소분당을 거쳐 17세기에 이르러 남인, 북인, 노론, 소론의 4색 黨論을 낳았다. 衛正斥邪는 조선국의 기본이념과도 같았다.
1860년대 이후의 民亂의 시대는 조선국의 사회변동을 반영한 것이었고 양반지배에 저항했으나 정치적 국면을 결정적으로 새롭게 할 새 사회세력을 析出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19세기 하반기의 세력변동에는 역사적인 4색 당론이 여전히 반영되고 있었다.
19세기에 들면서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의 소수 문벌이 지배하는 勢道정치가 계속됐는데, 모두 노론을 중심으로 한 집권이었다. 노론이 비롯된 서인의 집권은 1623년 서인중심으로 감행된 궁중 쿠데타인 仁祖反正이래이므로 세도정치의 연혁은 길다.
개화기의 세력판도를 교과서적 설명으로는 개화파 대 위정척사파라고 하지만, 청일전쟁 이전에 있어서는 두 세력을 병립시킬 수는 없었고, 비유해서 말한다면 후자의 큰 지붕 밑에 전자가 안겨 있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서인과 대립한 동인계통의 남인은 17세기 후반기에 얼마동안 집권했으나 정치적으로 오랫동안 소외당했다. 그러므로 노론계통에서 北學이 제기됐으나 實學과 西學이 소외당한 남인에 의해 주로 탐구된 것은 섭리와 같았다. 실학의 개념이 어떻든 백과전서적인 폭넓은 사회개혁방안이 실학탐구를 통해 제시됐던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노론과 남인은 한반도에서 정치적으로 양대 산맥을 이루어왔다고 볼 수 있다. 저 禮訟은 서인과 남인간의 대립이었고, 쇄국의 분수령이 된 1801년의 辛酉邪獄은 천주교탄압인 동시에 서학을 수용했던 남인탄압이었고, 1855년에 上疏경합을 벌인 斯文之變 역시 노론과 남인간의 경합이었다. 그러므로 역대 노론세도정치를 타파하고 획기적인 구조개혁을 추진하려면 대항세력이 돼왔던 남인 세력부활로 상징되는 새 세력의 형성이 필요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換局이 있어야 했다.
1894년 이전에 새 세력이 정치적 수평선상에 떠오를 수 있는 기회는 두 차례 있었다고 생각된다. 1863년의 고종등극과 함께 10년간 계속된 興宣대원군 이하응의 섭정은 역대 노론세력간의 타협의 산물이었다. 대원군은 양반의 거점이기도 했던 書院의 정리, 세제개혁을 포함한 획기적인 구조개혁을 추진했으나 대원군 정권이 궁극적으로 의지해야했던 세력관계는 노론세력이었으므로 제약을 받아야했고, 그로인해서 퇴진해야했다.

역사적으로 축적된 역량으로 진전 가능
이렇게 두고 볼 때 1882년의 임오군란은 달리 보게 될 측면이 드러난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후의 민씨 세도정치는 근대화에 나름대로 진력했으나 획기적인 개혁은 기할 수 없었다. 大院位分付의 위령을 떨쳤던 그는 당시의 대원군 대망론을 배경으로 재등장을 시도하려한 것이 아닌가. 급전직하로 전개된 양상에 비추어 볼 때, 급여불만으로 우발적으로 폭발한 군병의 난동이 아니라 기존세력관계를 극복하고 재등장을 시도한 대원군의 쿠데타로 봐야할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청국에 拘引되어간 것이다. 이하응은 “그 근원이 패와 위의 관계처럼 남인과 가까웠다.”(<매천야록>) 또 넓은 의미의 과학기술이 역대로 축적돼온 中人층을 중용하려 했다. 쿠데타가 좌절하지 않았으면 새 사회세력형성의 빌미가 될 수 있었다. “만약 대원군이 아니었다면 개화를 막고 완고를 지탱하기는 어려웠고, 또 다른 날 완고를 바꾸고 개화를 추진하는 것도 바라기 어려울 것이다”는 <근세조선정감>의 구절은 음미할 만하다.
1884년 12월 6일 거사에 실패한 김옥균 등이 창덕궁을 탈출할 때 홍영식은 “한 사람은 남아서 진보주의자들이 천명한 주의원칙에 부끄러움이 없었음을 세계에 알려야한다”며 궐내에 남아 죽었다고 전해진다. 갑신정변에는 사대부, 중인, 상민, 천민의 각층이 참여했으며, 천명한 주의원칙뿐만 아니라 참여층의 확대에서 근대적 계기를 찾을 수가 있다.
청에 14년 앞선 變法의 시도였다. 그런데 청군출동으로 좌절된 이 정변은 “대원군을 불일내로 모셔올 것”(<갑신일록>)을 정령의 첫머리에 내세우고 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은 연관 지어 재조명돼야할 측면이 있어 보인다. 갑신정변도 임오군란과 마찬가지로 청군의 출동으로 좌절됐다.
일본의 군사적 우위를 문제 삼고 1894년 이전에 구애된다면 청의 군사적 우위도 응당 문제를 삼아야한다는 이의가 제기될 수 있다.
袁世凱는 조선국정치는 “크게 개혁돼야한다”면서 “김옥균 등이 만약 나에게 (사전에) 물었다면 나는 당연히 중립을 지켜 정변은 성공했을 것”이란 말을 “김윤식에게서 들었다”고 황현은 적고 있다.(<매천야록>) 믿기 어려운 김윤식의 전언이지만, 상호의존관계의 전통적인 한청관계는 한일관계와는 다르다는 것을 전하려하

고 있는 것 같다.
우리 근대사의 1880년대에 일어난 두 정변은 근대화를 지향하고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품고 있었고, 역사적으로 축적된 특색 있는 역량으로 뒷받침되어 진전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두 벽두에서 失機한 것이다.

강범석 / 히로시마시립대 명예교수


필자는 오사카시립대에서 근대일본의 국가권력 기반을 굳힌 메이지6년(1873년)의 정변을 다룬 ‘정한론 정변’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잃어버린 혁명 -갑신정변연구> 등의 저서가 있다.

 

#2 개화파 시도는 ‘민주국가 형성의 귀중한 밑거름’

□ 고종(사진 왼쪽)과 순종. 고종은 역사적 변혁의 중심에 있었다.
우리나라는 1876년 개항을 계기로 세계자본주의체제로 편입된 후 전통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근대적 국민국가를 수립함과 동시에 외세의 국권침탈을 막아내고 자주독립을 유지해야 하는 역사적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세력들이 각각의 계급적·사상적 기반을 바탕으로 다양한 운동을 펼쳤지만 외세의 간섭과 침탈, 국내의 개혁조건 미숙과 세력들 간의 갈등으로 좌절되었다.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치욕을 겪었으며, 해방과 동시에 민족과 국토의 분단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처럼 우리는 제대로 된 근대화 과정을 경험하지 못한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현재까지 근대 국민국가의 수립이란 화두를 떨쳐버리지 못한 처지에 여전히 놓여 있다.
따라서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여러 움직임 가운데 개화파가 전개했던 위로부터의 개혁운동은 시사해주는 바가 적지 않다.
진보적 관료와 지식인들이 중심을 이루었던 개화파는 해방 후 식민사관의 극복을 위한 내재적 발전론과 ‘조국근대화’를 배경으로 삼은 근대지상주의로 말미암아 과대평가되었고, 민중사학이 주류를 이루면서 지나치게 한계성이 부각되었으며, 최근에는 고종에 대한 재평가와 맞물리면서 형편없이 폄하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개화파에 대한 평가는 단순히 개화파를 비롯한 정치 혹은 개혁 세력의 성격을 규정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한국근현대사의 전체상을 조감하는 작업과 직결되어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존재한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당시의 역사적 조건을 정확히 고려한 전제 아래 개화파에 대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평가를 내릴 필요가 있다.
개항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외압이 가중되면서 이제 조선사회는 내부의 완만하고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 열강의 침략에 맞서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따라서 외세의 침탈을 막아 자주독립을 이룩하고 부국강병과 체제개혁을 통해 국민통합을 달성해야 하는 절실한 과제가 주어져 있었다.
특히 부국강병은 시공을 초월해서 정치세력이 내걸어왔던 모토였지만, 문제의 핵심은 근대적 생산력의 발전과 군사력의 증강을 달성하는 방법, 그리고 체제개혁의 지향성에 있었다.

고종과 민씨척족은 시대변화에 부응하지 못해
당시 향촌사회에 지배기반을 두고 있던 유생계층은 외세의 침략성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척사론에 입각해서 항전을 다짐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근대적 생산력과 군사력의 수용 자체를 강력히 거부하였으며, 전통적 세계관과 사회질서를 고수함으로써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기 어려웠다.
또한 국왕과 민씨척족을 비롯한 일부 집권층은 국제정세와 근대문물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한 뒤, 청·일 양국에 영선사·조사시찰단을 파견하여 군기제조방법 등을 습득하고 제도개혁과 운영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개화정책을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재정 확보도 여의치 않은데다가 운영 미숙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임오군란이란 역효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 결과 개화정책에 대한 민의 불신은 팽배해졌으며, 그 상징적 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은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개화정책의 추진과정에서 김옥균 등의 개화파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해 나갔다.
그들은 박규수 등으로부터 조선 후기 실학적 전통을 이어받는 동시에 해외시찰을 통해 각국 외교관과 폭넓게 접촉하면서 세계사의 변화와 흐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의 독립을 보전하고 부국강병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외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함과 아울러 근대적 제도와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된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다만 이 시기 서구의 근대적 생산력을 수용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는 측면에서 개화파와 고종을 비롯한 집권세력의 이해는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그러나 임오군란으로 조선의 역사적 조건은 질적으로 크게 달라졌다. 청국은 병자호란 이후 246년만에, 일본은 임진왜란 이래 284년만에 각각 군대를 파견하였다.
특히 청국은 국부인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고 군란을 잔혹하게 진압해 조공관계에 입각한 전통적 종속관계의 허울을 내던지고 제국주의적 마수를 드러냈다.
군사력을 바탕으로 청국이 가한 정치적·경제적 외압은 조선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던 것이다.
청국의 도움으로 정권을 되찾은 국왕과 집권층은 통리기무아문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과 통리군국사무아문으로 재편하였다.
이 가운데 후자는 ‘부국강병’과 ‘裕國利民’에 관련된 군사·재정문제와 개화정책을 포함한 국정의 전반적인 현안을 처리하였지만, 근대적 제도와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한 채 점차 고종과 민씨척족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는 기구로 변모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집권층이 제도혁파를 통해 물적 토대를 확보하기보다 전통적 수취구조 속에서 착취를 강화함으로써 오히려 국가재정의 위기를 초래하는 등 권력유지에 집착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보빙사 파견 전 개화파와 교류하면서 개화에 관심을 보였던 민영익이 구미와 조선의 현격한 차이를 목도하고 귀국한 후 유교도덕과 기존체제를 고수하는 ‘완고수구’의 입장으로 되돌아간 데에서 잘 드러난다.
한편 임오군란을 계기로 개화파는 부국강병을 달성하는 차원을 넘어 사회체제의 변혁을 모색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그러나 개화파 내부에서는 청국의 외압에 대한 대응, 서구식 제도문물의 수용 방법, 개혁방법과 지향 등을 둘러싸고 분화가 일어났다.
김윤식·어윤중 등이 청국으로부터 “자주는 가할지 모르지만 독립은 아니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청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그 보호 아래 점진적인 개화를 추진하려 했던 반면 김옥균·박영효 등은 청국의 속국임을 부끄럽게 여기면서 “속박을 물리치고 독립자주국을 수립하는 일”에 역점을 두고 정치제제의 전면적인 개혁을 도모하였다.
김옥균 등은 청국의 간섭이 심화되고 민씨척족의 견제로 정치적 입지가 좁아지는 상황 속에서 청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여 근대적 개혁을 단행하기 위해 무장정변을 일으켰다.
그들이 내걸은 기치는 청국에 대한 조공허례의 폐지로 상징되는 독립국가의 실현, 왕권제한을 통한 통치체제의 혁신, 신분제도 철폐에 의한 인민평등권의 제정, 근대적 자유산업의 장려와 국가재정의 일원화 등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전통체제의 모순을 철저하게 극복하지 못한 측면도 적지 않고, 정변 단행과정에서 전략상이라 하더라도 조선에 대한 세력확대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던 일본을 끌어들인 한계도 존재한다.

청국의 외압이 조선사회 발전 저해
그렇지만 당시 조선에 가해졌던 최대의 외압은 일본보다는 청국이었다는 현실적 상황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아가 개화파가 단행했던 갑신정변은 내부의 반발과 청국의 무력진압으로 실패로 돌아갔지만,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역사적 단계에 부응해서 국민국가의 건설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한국근대변혁운동사상에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실제로 외압이 가중되는 조건 속에서 위로부터의 변혁의 가능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희박해져갔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소앙이 1930년 한국독립당을 창당한 직후 당의 기원을 ‘갑신혁명’으로 설정하고, 귀족분자 선각자인 김옥균 등 소장 벌열파가 ‘聯日反淸’을 기치로 내세운 궁극적인 목적은 해방을 자구하고 국가독립의 보전을 도모하려는 데 있었다고 평가한 것은 시사해주는 바가 있다.
우리의 근대는 그야말로 일그러지고 실패한 역사이다. 국내의 모순을 해결하고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전개되었던 각계각층의 노력은 그 한계를 노정한 채 좌절되었고 결국 망국의 비극을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적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려던 다양한 시도는 향후 국권을 회복하고 민주국가를 형성하는 귀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처럼 소중한 경험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복잡다단하고 역동적·중층적으로 전개된 근대의 역사를 균형 잡힌 객관적인 시각에서 올곧게 규명해내야 한다.
그 기준은 열강의 침략 아래 근대적 사회변혁이 요구되는 역사적 조건 속에서 어떠한 세력이 시대적 당면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정으로 고민하고 노력했는가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한철호 / 동국대·한국근대사


 

필자는 한림대에서 ‘1880-90년대 친미개화파의 개혁활동 연구-정동파를 중심으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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