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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무덤서 광개토왕 유물 ‘미스터리’
신라 무덤서 광개토왕 유물 ‘미스터리’
  • 조유전[토지박물관장]
  • 승인 2007.05.14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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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전의 발굴 뒷이야기]최초 국제발굴 ‘경주 호우총’

올해가 서기 2007년이다. 일제의 통치에서 벗어나 우리나라가 광복된 지도 62년이 흘렀다. 이제 환갑의 나이를 넘어 고희의 나이를 향해 가고 있다.
왜 광복 운운하는가 하면 광복 후 우리나라 최초의 고고학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유적이 경주에 있었던 호우총이고 그 발굴조사가 광복 이듬해인 1946년이기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 살 차이긴 해도 나이가 같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우리나라에 고고학이란 학문의 도입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통치하면서였다. 통치목적으로  그들의 고대역사책에 기록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즉 고대 한반도의 남부지방을 그들의 식민지로 통치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유적을 파헤치면서 고고학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광복을 맞아 경복궁내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접수하면서 초대 국립박물관장 김재원(金載元) 박사가 주선해서 이루어진 것이 바로 호우총발굴이다.
초대관장을 지낸 김재원은 1909년 함경남도 함주 홍상리에서 태어나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하여 뮌헨대학 철학부에서 1934년 문학박사를  취득했다.
귀국 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전신)와 경성제국대학교(현 서울대학교 전신)에서 출강하고 있다 광복을 맞았다. 광복되자 바로 인수한 것이 조선총독부박물관이었고 아울러 36세의 나이로 초대박물관장에 취임하면서 그해 12월 3일 정식으로 국립박물관을 일반에 공개하는 개관식을 가졌다.
흥미를 끄는 것은 박물관을 인수할 때 패망 당시 조선총독부박물관 책임자였던 아리미츠(有光敎一)를 통해 박물관의 유물을 비롯 모든 업무를 인수했던 것이다.
아리미츠는 박물관의 모든 업무 인계가 끝날 때까지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런데 인계가 끝나고 국립박물관으로 개관까지 했는데도 귀국시키지 않고 붙잡아 두었다가 이듬해 5월 호우총 발굴조사 지도까지 하게 했다.
아무리 연구자로 대접을 받으면서 인수인계를 한다고 하더라도 패망한 입장에서 본다면 귀국이 한시가 급했을 것임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되고도 남는다. 이 호우총 발굴은 김재원 관장. 일본인 아리미츠, 그리고 미국인 크네츠비치(Engene Knezevich) 3인의 합작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호우총발굴은 우리나라 최초의 國際發掘이라는 수식어를 얻게 된 것이다.
광복은 되었지만 우리나라에는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를 독자적으로 할 전문 학자가 없었다.
김재원 관장은 총독부박물관을 인수하자 제일 먼저 우리 손으로 발굴조사를 하고자 했지만 발굴조사에 필요한 경비와 장비는 물론 가장 중요한 발굴을 실질적으로 담당할 전문가가 없었다. 마침내 생각한 것이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 유적 발굴의 경험이 많은 아리미츠의 도움을 받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판단하고 발굴이 이루어질 때까지 귀국시키지 않고 있었다.
광복 당시 대한민국정부수립이 되기 전까지 우리나라는 미군정청이 다스리고 있었다. 유적의 발굴조사 역시 미군정 하의 문교부 교화국의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했다. 이때 교화국의 한국미술과 역사유산보호를 담당한 장교가 바로 크네츠비치 대위였다.
그는 김관장의 발굴계획에 흥미를 가졌다. 그러나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동경에 있는 미군사령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했다. 노력 끝에 발굴동의를 얻게 되었고 아울러 발굴조사비는 김재원 관장이 직접 해결했다.

□ 호우총에서 발굴전 모습

이렇게 되어 광복 후 최초로 우리의 손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지만 당시 사회의 여건으로 볼 때 어떻게 보면 매우 무모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일본에게 빼앗겼던 나라의 주권을 찾은 지 1년도 되지 않아 당시 사회는 형언할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있었고 더구나 미군정청의 통제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한가하게 유적발굴이나 하고 있을 형편이 못 되었다.
그런데도 이루어지게 된 것은 오로지 김관장 특유의 불굴의 의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발굴조사 대상유적이 정해져야 했는데 이 또한 흥미 있는 일화를 간직하고 있다. 발굴의 대상을 경주에 있는 고분 가운데 하나로 정하고 나서 이를 물색하면서 나름으로 가능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기로 했다.
어떤 사람은 기왕에 처음 할 바에야 경주평지에 단일 무덤으로서 제일 큰 봉황대를 발굴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아무튼 호우총이 발굴대상으로 정해진 것은 역시 일본인 아리미츠씨의 조언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파괴되었지만 이 무덤을 발굴하면 금제품을 비롯해서 많은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많다고 자신의 조사경험을 알려주었고 김관장은 이를 받아들였다. 발굴조사를 위해서는 무덤과 같이 있는 민가를 철거하는 등 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이를 모두 헤치고 발굴조사는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결국 호우총 발굴조사를 보면 주체는 우리나라가, 지도는 일본이 그리고 자금과 장비 등은 미국이 제공함으로써 이루어졌고 이로써 광복 후 최초의 고고학적인 발굴조사가 국제적인 발굴이 되었던 것이다.
발굴성과는 무엇보다도 문자가 새겨진 뚜껑을 갖춘 청동그릇이 발굴되었다는 데 있었다.
이 그릇의 밑바닥 뒷면에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 16자를 새겨 놓아 고구려 정복왕 광개토대왕과 관련 있는 유물임이 밝혀지고 아울러 글자가운데 壺(호우)라는 글을 따서 호우총이라 작명한 것이다. 그리고 글자 가운데 을묘 년은 광개토대왕이 죽고 3년째 되던 해로서 서기 415년에 해당된다. 하지만 왜 고구려 광개토대왕 관련 유물이 신라무덤에 묻히게 된 것인지는 추측만 분분할 뿐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조유전 토지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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