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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안의 한국학자’, 본질주의에 빠진 한국학 검증
‘벽안의 한국학자’, 본질주의에 빠진 한국학 검증
  • 교수신문
  • 승인 2007.05.06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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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조선왕조사회의 성취와 귀속> 에드워드 와그너 지음 | 이훈삼·손숙경 옮김 | 일조각 | 2007

본서는 고 에드워드 와그너 교수의 논문들을 모아 번역한 것이다. 번역자들은 단순히 원문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단행본으로 출판도 되지 않은 논문들을 취합하였고 연구자와 독자를 위하여 대부분 장절이나 제명이 없었던 논문을 모두 장절을 나누고 제명을 완전히 새로 달았다. 진실한 의미의 편집까지 하여 번역 출간에 완벽을 기하였다.
이훈상 교수는 서구 한국학의 대가라고 할 제임스 팔레의 <傳統 韓國의 政治와 政策>,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한국사회의 유교적 변환>을 번역한 위에 이제 가장 정점에 있다고 할 에드워드 와그너의 성과를 모두 집성하여 번역함으로써 국내의 한국학 연구자들도 서구 한국학의 대체적인 지형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를 열어놓았다. 사실 국내의 한국학 연구자들은 서구 한국학의 성과들에 대하여 거의 잘 모르고 있는데 이제 서구 한국학의 가장 중요한 성과를 일람할 수 있게 되었다.

서구 한국학의 중심이 된 하버드대
에드워드 와그너 교수는 사실상 서구 한국학의 토대를 구축했다. 동시에 미국 내에서 한국사 강좌를 처음 개설하고 궤도에 올린 연구자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는 서구의 한국학이 한국의 주류 역사학과 다른 방향을 걷도록 만든 사실상의 장본인이라는 점이다.
와그너 교수의 성과 중 특징적인 것은 우선 그는 조선전기 정치적 갈등을 다룬 학위 논문에서 조선왕조의 원숙한 통치 이념의 발전과 활력을 논의하면서 중국이나 일본의 그것과는 구분되는 조선왕조의 독특한 특성을 제시하였다는 점이다. 조선왕조가 문인 귀족들에 의하여 유례없이 장기간의 생명과 안정을 유지한 사실을 강조하며 이것이 가능했던 기제를 조선왕조의 특성으로 치환하면서 조선왕조 통치의 한 장점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일본과 중국의 성과에 늘 비교하면서 추진하였다. 그 자신이 이야기하듯이 그는 ‘한국의 창조적이고 독특한 문화의 본질을 이해 못하고 중국이나 일본의 일개 지역적인 문화로 잘못 알고 있는 상황’에 맞서야 했다. 이렇듯 동아시아 전체의 구도 속에서 한국사에 접근하는 방식을 통하여 그는 종래 중국과 일본의 종속국으로 간주하면서 이들의 주변 사회 내지는 문화로 간주되어온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종래의 선입견을 바꾸려고 하였다. 
국내의 주류 한국사와 구분되는 그의 연구의 성과나 입장은 우선 국내의 한국사, 조선시대를 바라보는 입장에는 차이가 적지 않지만 대체로 주류 한국사는 이른바 내재적 발전론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역사는 세계사적 보편성을 밟고 있다는 전제 아래 한국사에서 그 같은 발전 궤도를 추적하려는 입장인데, 사실상 이것은 서양에 대한 추종에 불과했다고 하는 것이 요즘의 결론이다. 이와 달리 와그너 교수는 한국 자체의 역동성을 비교사적으로 추적하여 그 특성을 논의하려 하였다. 최근 이른바 내재적 발전론이 서구 중심, 내지는 근대성에 입각하여 한국사를 재단하려 하였을 뿐 아니라 이들이 모델로 삼은 서구도 사실상 허구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한국사의 실종을 초래하고 있는 반면 오히려 와그너 교수 등의 입장은 더욱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각별히 주목하여야 할 그의 역사 이해를 굳이 한 가지를 든다면, 사화에 대한 그의 초기 연구 성과에서 이미 그는 조선시대에 대한 탁월한 역사 해석과 설득력 높은 서술을 보여준 것이다. 정치사적 입장에서 다룬 글에서는(1980년), 무오사화에서 기묘사화에 이르는 기간이 본질적으로는 조선당쟁사의 서막이 아니라 주요한 제도가 발전한 시기로 보고 있다. 한편 이 시기의 현상을 당쟁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해서는 별다른 성과를 얻을 수 없다는 인상을 받는다고 했다. 어떠한 사회라도 권력배분과 정치대립의 해소를 위한 효율적 방식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며, 전통시대 한국인들이 시도한 방식은 다른 지역의 그것과 비교할 때 당쟁이 한국 특유의 현상도 아니며 한국의 당쟁이 다른 나라들의 그것에 비하여 더 유별난 것도 아니라고 덧붙이고 있다. 그리하여 전통기에 한국인이 택한 방식은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사화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왕조의 영속이라는 궁극적 목적의 달성을 위해 크게 이바지했으며, 고도로 발달된 간쟁제도가 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결론짓는다.
쟁점이 되는 논의는 사화와 관련된 학설이나 신분제 해체설의 문제 지적이다. 와그너는 사화에 연루된 일단의 인물들을 분석하여 그 성격을 밝힘으로써 사림파가 중소지주 출신으로 경상도 출신인 반면 훈구파는 대지주로 주로 한양 부근에 거주하는 상호 이질적인 집단인데, 일련의 사화를 거치면서 사림파들이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은 집권했다는 한국학계의 통설을 비판하는 방식을 채용하였다. 사화에 연루된 부류는 거의 대부분 한양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거주했으며, 양자는 이질적 집단이 아닌 정치적 이해와 이념에 따라 그때그때 가해자도 되고 피해자도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리적 또는 사회적 배경에서 상호 구분되는 이질적 세력집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어 그는 <文化柳氏嘉靖譜> 등을 분석하여 족보 출간 전의 문과급제자 1천5백65명 중 1천1백20명 그러니까 대략 70%가 찾아진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덧붙여 賢良科 급제자 28명 중 26명이 이 족보에서 찾아진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1982년). 다시 말해서 조선전기 지배 엘리트들은 한국학자들이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동질적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와그너는 조선전기 지배계급을 이질적인 두 집단 사이의 상충관계를 통해 형성된 존재로서 다룰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일체적이요 지속적인 존재로서 다루는 것이 올바른 연구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이라고 제안한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사회 이동을 둘러싼 논의는, 사화 외에 한국학계가 구축한 역사상과 와그너의 그것 사이에 가장 차이가 큰 논제일 것이다. 그는 1663년 서울 북부호적대장을 분석하여, 양반에서 평민이나 그 이하로, 그리고 평민에서 노비로 전락하는 하향 이동의 비중이 상당히 크며 증가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1974년). 뿐만 아니라 양반신분에 대한 규정도 한국학계의 통상적 이해와 거리가 있다. 
임진왜란 이후 신분제가 해체되기 시작했다는 가설은 오랫동안 한국사의 역동성을 입증하는 최고의 성과로서 꼽혀왔는데, 이것의 분석이나 논증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와그너 교수는 방대한 데이터베이스 등을 통하여 논박하고 있다. 이 가설은 전혀 경험적 근거나 논증 없이 만들어졌으며 와그너는 유명 연구자가 새로운 학설을 제시하면 증거가 뒷받침되지 않아도 통설로서 정착하는 한국학계의 문제점을 완곡하지만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오히려 그는 양반 사회 혹은 체제의 지속성 내지는 안정성을 강조하였다. 더불어 그 체제가 장기간 생명과 안정성을 유지한 것에 주목하여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학에 대한 배타적 연구, 본질주의
와그너의 연구성과를 통하여 국내 한국학 연구의 문제점을 볼 수 있다. 한국학계는 자민족중심주의가 매우 강하여 한국학은 마치 한국인들만이 이해하고 연구할 수 있거나 접근할 수 있다는 일종의 본질주의에 빠져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최근의 한국사학계는 역사 과잉에 빠져 있고 또한 이것이 역사학 본래의 비판적 기능을 상실한 채 현실 정치와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는 문제점도 성찰하여야 하지 않을까.

최재건 / 연세대·한국근대사


필자는 하버드대에서 ‘한국 가톨릭교회의 교리적·제도적 발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서학의 수용과 발전>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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