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00:10 (토)
정조가 주자서 편찬에 매달린 이유
정조가 주자서 편찬에 매달린 이유
  • 김재호 기자
  • 승인 2007.05.06 11: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깊이읽기]<정조의 제왕학> 김문식 | 태학사 | 2007

 일반적으로 영·정조 치세를 조선의 문예부흥기로 평가한다. 그것은 15·16세기 무력해진 통치기제의 회복이라는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다.
최근 소개된 <정조의 제왕학>(김문식, 태학사, 2007)은 바로 이 시기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확대·심화해주는 역작이다. <정조의 제왕학>은 정조 치세를 전공한 연구자의 오랜 공부와 세심하고 구체적인 분석의 結晶으로 그 내공의 깊이를 보여준다. 또한 유려하고 완정한 글쓰기는 평자에게 난공불락의 성채 같은 아찔함을 가져다준다.

학자로서의 정조에 초점
연구자는 머리말에서 ‘正祖’라는 특정 정치주체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명확히 한다. 고대의 ‘君主’를 연상할 때 ‘전쟁영웅’을 그리는 일반적인 경향으로부터 태조, 태종, 세조와 같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한 조선 초기의 군주들 역시 ‘武’의 이미지를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학자’로서 정조의 연구는 일반적인 관념과 다른 것임을 시사한다.
여기에서 연구자는 ‘학자군주’로의 지향을 조선 국왕들의 특징으로 전제하고, ‘정조’를 국왕교육시스템의 완결로 규정한다. 이로부터 ‘정치가’로서 ‘정조’보다 ‘학자’ 또는 ‘사상가’로서 ‘정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것은 스스로 ‘제왕학’을 완성할 수 있는 진정한 군주라는 의미도 내포한다.
그렇다면 ‘정조’는 자신의 ‘제왕학’을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어 나갔을까? 연구자는 ‘정조’ 자신이 삼대의 이상적인 군주, 즉 정치와 학문, 통치와 교육의 책무를 동시에 이행했던 ‘君師’로의 역할을 자부하고, 이로부터 大一統의 계승이라는 맥락에서 조선의 정계와 학계를 주도하여 개혁을 추구했음을 지적한다(총설, 4).
그것은 정조 자신의 방대한 저술과 經學의 재정립을 위한 경서편찬과 보급으로 구체화된다. 이에 따라 연구자는 정조 개인의 자질과 노력, 영조의 제왕학 훈육(1장 1부)을 출발점으로 <弘齊全書>의 편찬과정을 통해 정조의 학문관과 도통의 계승자라는 학자군주로서 정조의 자임의식을 소개한다(1장 2부).
가장 주목할 부분은 ‘2부 제왕학의 내용’이다. 앞서 소개한 정조의 방대한 학문체계는 경학문헌과 주자서 선본의 편찬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나며, ‘정조의 제왕학’이 무슨 내용으로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웅변한다.
연구자는 당대에 활발히 진행된 경학문헌 편찬이 경학과 치국(경세학)을 접합시켜 삼대의 이상을 실현하려

는 정조의 정치적 의지와 실천임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大學類義>의 편찬은 삼대의 정치와 학문을 계승한 유일한 군사로서 정조의 정치적 자신감과 왕권계승의 정통성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2부 1장). 더욱이 경학문헌의 편찬과 보급과정에서 기존 경학의 주석체계를 과감히 삭제하거나 집성하는 정본과 선본사업은 정조의 학문적 자신감과 지지 세력으로서 규장각, 성균관, 사학, 지방유생들의 존재감이 어우러진 결과로 평가함으로써(2부 2장), 이른바 ‘文體反正’으로 알려진 정조의 정책이 단순히 학술적인 범주에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주자전집’ 편찬기획은 정통성과 관련
연구자는 정조의 제왕학을 구성하는 결정적인 요소야말로 바로 정조의 ‘주자’존숭과 다양한 주자서 ‘선본’ 편찬에 있었다고 강조한다(2부 3장). 특히 정조가 일생에 걸쳐 주자서의 선본작업에 전력했던 사실에 주목한다.
왜 정조는 주자서 편찬에 매달렸던 것일까? 정조의 야심적인 <朱子全書> 편찬기획은 그의 정통성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연구자는 정조 스스로 주자 이후의 도통을 계승하고, 삼대의 군주로부터 정치적·학문적 정통성을 계승한 군사임을 분명히 하려는 것과 함께 명 멸망 이후 문화의 보존자로서 조선의 학문적 능력에 대한 적극적 평가, 정학의 정립을 통한 기풍의 확립을 의도했던 것으로 평가한다. 또한 정조 개인적으로 자신의 학문적 열정을 유지하고 인생의 관조를 위한 목적이 담겨있다고 평가한다.
연구자는 정조의 제왕학이 어떻게 실천되었는지를 ‘3부 제왕학의 적용’에서 다루고 있는데, 1차 자료의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 정조의 통치술이 용의주도하게 행사되었음을 밝힌다.
즉 정조 자신이 젊은 초계문신,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 지방의 유생들을 선발하고(3부 3장, 5장) 신민의 교육을 직접 담당함으로써(3부 1장), 외형상 도통의 계승자로서 正學을 확립하려는 모습을 취한 반면 실질적으로 이들을 사도세자의 복원과 개혁정치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뒷받침하는 친위세력으로 양성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연구자는 정조 제왕학의 적용과정을 담담히 기술함으로써 굳이 ‘정치가’로서 정조를 강조하지 않고도 그의 탁월한 통치술을 드러내는 데 성공한다.
결론에서 연구자는 고도의 학문적 능력을 갖춘 정조의 통치술이 오히려 人治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국왕중심적 사고와 과도한 열정으로 공론을 위축시킨 역기능을 지적한다.
이로 인해서 정조 이후 조선의 군주들이 정조의 정책과 조치를 제대로 계승하는 데 부담으로 작용했다고 평가한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정조 스스로가 제왕학을 완성했던 군주였기에 가능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정조의 제왕학>은 ‘학자군주’로서, 또한 ‘유가 성왕론’을 직접 실현했던 군주로서 정조의 면모를 정확히 알려주는 성과라고 판단된다. 따라서 평자는 비평이기보다 다른 시각에서 좀 더 부각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말하고 싶다.
연구자의 평가처럼, 정조는 그 학문적 능력과 열망, 여기에 정치적 정통성과 정국주도권의 확보라는 현실적 문제해결을 위해서 자신만의 제왕학을 완성해 나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정조가 보여준 명백함, 즉 ‘주자를 존숭하고 강조했던 것’ 이상으로 주자에 대해 과도할 정도의 집중은 어떤 이유에서 그랬던 것일까.

정조가 주자에 집중한 이유
즉 주자의 글과 논리, 그리고 주자 해석을 전부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정조가 직접 선별한 내용으로 구성한 이유는 그에게 주자의 논리와 정치적 사유 또는 수사를 절실히 필요로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물론 연구자의 분석에서도 드러나듯이, 그 목적은 주자 이후의 도통을 계승했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정치권위의 정당성을 합리화하려는 데 있었다.
따라서 만약 주자와 주자관련 서적들의 어떤 내용들이 정조에게 정치적 영감을 주었는지 그 상호성을 분석하는 범위까지 연구가 이루어졌다면, 물론 정조가 직접 편찬한 <朱子會選>, <紫陽子會英>, <朱文手圈>, <朱子選統>, <雅誦> 등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가장 역점을 두었던 주자서의 편찬과 보급 사업이야말로 ‘학자’로서 정조뿐 아니라 자신의 권위의 정당성을 교육시켜서 정치적 이상상으로 끌고 가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군주’로서 정조를 분명히 보여주는 지표일 것이다. 그것은 ‘정조의 제왕학’을 통해 ‘제왕으로서 정조’를 이해하는 단서로 작용할 것이다. 즉 ‘君師’로서 정조는 조선의 통치기제가 성공적으로 작동한 최후의 결정체이다.

윤대식 / 충남대·동양정치사상


필자는 한국외대에서 ‘맹자의 정치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민세 안재홍 심층 연구> 등의 저서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