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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지성사회의 반성과 과제
한국 지성사회의 반성과 과제
  • 교수신문
  • 승인 2007.05.0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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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교수신문 창간 15주년 기념 특강 / 정운찬 서울대 교수

교수신문 창간 15주년 기념식 및 <최고의 고전번역을 찾아서 2> 출판기념회가 지난 4월 19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실에서 열렸다. 기념식에는 20여명의 전현직 대학총장과 1백여명의 교수, 정`관`재계 인사, 언론`출판계 인사 등 2백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이날 정운찬 서울대 교수(경제학부)가 '한국지성사회의 반성과 과제'라는 주제로 기념특강을 했다. 정 교수는 " 지성인의 영향력을 확대시키기 위해 특히 법조인과 언론인, 그리고 학자의 역할과 책임이 막중하다"며 지성인의 역할과 헌신을 강조했다. 정 교수의 기념 특강 원고 전문을 싣는다. / 편집자

    
정운찬 / 서울대 경제학부 

저는 오늘, 우리 지성인들이 갖추어야 할 자세와 좌표에 대해 평소의 저의 생각을 여러분께 말씀드리려고자 합니다.

1. 참다운 지성인이란?

먼저, 지성인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요? 지성인이라 하면 흔히 학문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을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전문지식을 갖춘 지식인과 지성인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대학교수 같은 학자들만이 지성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모든 학자가 다 지성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학자는 물론, 법조인, 언론인, 정치인, 문필가, 교육가, 예술인, 영화인, 기업인  등등 전문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훌륭한 지성인이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전문직에 종사하지는 않더라도, 思考의 폭과 깊이가 전문가에 못지않게 넓고 깊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지성인들도 우리 주변에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직업이야 무엇이든, 나이가 많든 젊든, 배우기를 좋아하고, 깊은 사색의 힘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모두 지성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참다운 지성인이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참다운 지성인이란 빛을 찾아내는 사람입니다. 동시에 그 빛을 통해 어둠을 밝히는 사람이 참다운 지성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동굴의 비유’를 보면, 처음에는 누구나 캄캄한 동굴 속에서 벽에 비친 자기의 모닥불 그림자만 보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어떤 사람이 동굴 바깥으로 나오게 됩니다. 밝고 넓은 세상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주어집니다.

첫째, 동굴 속 사람들에게 바깥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고 그들을 어둠 속에 남겨둔 채 혼자만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가는 경우입니다. 그렇게 하면 본인 스스로는 빛 속에서 자기의 높은 뜻을 즐기면서 만족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휩싸고 있는 어둠을 몰아내는 일에는 참여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성인들의 현실참여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름 높은 지성인들에게 竹林七賢처럼 草野에 묻혀 살아주기를 기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거, 지식인들이 政爭에 휘말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몸을 망친 경우가 긴 역사에 걸쳐 하도 많다보니 그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우리사회의 훌륭한 분들을 아끼는 마음에서 우러난 생각 같습니다. 

‘동굴의 비유’에서, 바깥세상을 구경한 사람이 택할 수 있는 두 번째 선택은 캄캄한 동굴로 다시 들어가는 경우입니다. 자기 그림자만 보고 살아가는 동굴 속 사람들에게 여기가 동굴 속이라는 사실과, 저 바깥에 밝은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 더 편안한 길을 뒤로하고, 자신이 발견한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힘든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만약 동굴 속 사람들을 설득하고 빛으로 인도해 낸다면 이 세상을 보다 나은 곳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캄캄한 어둠에 싸여 앞이 보이지 않을 때,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갈림길에 마주쳤을 때, 우리나라 지성인들은 얼마나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요? 과연 빛을 찾는 일을 제대로 하고 있으며 찾아낸 빛을 통해 어둠을 벗겨내려는 사명감을 얼마나 갖고 있을까요? 歷史家도 아닌 제가 이렇다 저렇다 단정적으로 평가를 내릴 자격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지금의 지성인들이 충분히 그런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평가를 얻고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전문가는 넘쳐나지만 존경받는 지성인은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전문가들이 反知性的인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도 하나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지성인으로서의 원칙을 지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할 텐데도 오히려 매우 예외적인, 칭송할 만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렇게 되어서는 국가의 元氣가 살아날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도 원칙을 잃어버린 채,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이,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굴러가고 있습니다. 나라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점점 더 어려운 도전이 닥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학자를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이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성인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지식인은 시대가 요구하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짠 맛을 잃은 소금이요, 가리워진 등불이 되기 쉽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 지식인들은 뼈를 깎는 자기반성이 있어야 합니다.

2. 지성인과 선비정신

오늘날 지식인이 지성인답지 못하고,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며, 일반인의 존경을 받지 못하게 된 이유는 철학이 투철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문적인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는 데에만 힘을 기울여왔을 뿐, 습득한 정보와 지식을 어떤 방식으로 사회에 환원하느냐,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를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고민은 소홀히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원칙을 잃지 않으려는 자기훈련이 부족하였고 스스로의 규율을 세우는 데에도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오늘날의 지식인들은 옛날의 선비정신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반성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의 학자나 전문가들은 옛날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지식을 갖고 있지만 강건했던 정신과 투철한 철학에서는 옛날에 비해 훨씬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더 풍부하고 더 폭넓은 지식을 갖춘 오늘날의 전문가들이 옛 선비정신으로 무장할 수 있다면, 우리사회의 어둠을 밝히는 역할도 훨씬 더 잘 해 내는 지성인이 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선비정신이라는 정신세계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집어내어 오늘날의 사람들의 그것과 비교분석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다만, 오늘 저는 孔子家語의 儒行解에서부터 몇 가지만 간추려 봄으로써, 우리 시대 지성인이 가져야 할 자세와 좌표에 대해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볼까 합니다. 아무리 古典이라 해도 먼 옛날의 가르침이었던 孔子家語의 내용이 오늘날 무슨 의미를 가질지 회의적인 분들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지성인의 모습을 우리 스스로를 비추어보는 데에는 충분히 유익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지성인은 自立하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실력을 닦기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열심히 학문에 전념하는 사람입니다. 지성인이라면 무엇보다 자기분야의 연구에 철저해야 합니다. 밤늦도록 불을 밝히면서 자기 분야에 최고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학자든, 법률가든, 언론인이든, 예술가든, 영화인이든, 기업인이든, 자기 분야에서 만큼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지성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첫 번째의 사명입니다. 이를 통해서만이 지성인은 우리사회의 어둠을 밝혀 줄 새 빛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지성인은 남의 힘에 기대려는 구차한 생각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보배로운 資質에 忠心과 信義를 품고 힘써 행하면서도, 자기의 가치가 저절로 남의 눈에 띌 수 있도록 해야지, 자격도 갖추지 않았으면서 자신을 과대선전 한다든지 남의 문전에 기웃거리며 스스로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자립한다는 것은 이런 정도의 자기 節制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수 천 년 전과 지금의 사회풍토가 아무리 달라져 때로는 자기 PR이 필요한 시대라고는 하지만 오늘날 우리 지성인이 다시 한 번 반성하고 되새겨볼 필요가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째, 지성인은 인격을 갖춘 사람입니다. 지식을 많이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성인은 충직한 마음과 신의를 자기 몸을 지키는 갑옷처럼 생각하고, 어짊과 덕망을 가지고 행동하며 처신하는 사람입니다.

金과 玉이 아니라 忠信을 보물로 삼으며, 仁義를 토지 얻는 것처럼 귀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고리타분한 말이 아니냐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돈 때문에 자살하고 돈 때문에 이혼하고 돈 때문에 자식과 부모를 버리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우리 국민들이 모두 다시 한 번 되새겨봐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지성인이라면 財物 자체를 추구하기 보다는 좀 더 높은 가치관을 추구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돈 잘 버는 것을 최고로 생각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지만 원래 ‘자본주의 정신’은 돈 자체에 목적을 두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 바탕을 이루었던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에 따르면 돈 자체 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재능을 최선을 다하여 발휘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나에게 돈 버는 재주가 있다면 게으름 피우지 말고 최선을 다하여 돈을 벌자는 것이었지, 그 돈을 자기가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었고, 돈을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윤리와 정신이 퇴색한 오늘날 우리사회는 돈이면 제일이라는 천박한 풍조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며 누구보다 우리 지성인들이 반성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넷째, 지성인은 옳은 것을 지키는데 의지가 굳세고 강인한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이 겁을 주어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병기로 위협하여도 겁내지 않습니다. 죽는 경우를 당하여도 자기의 지키는 바를 바꾸지 않고 친하게 지낼 수는 있어도 겁을 내게 할 수는 없으며,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이 굳세고 강인해야 합니다. 지성인의 굳세고 강인함이란 그저 적당히 고집을 피우다 마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종교적 신념에 못지않은 차원 높은 경지인 것입니다.

이 밖에도 선비의 자세에 대해 여러 가지 귀감이 될 만한 말들이 많지만 제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런 정신들이 이 시대의 지성인에게 요구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가지 기준을 다 충족시키는 완벽한 지성인이 되기 어렵더라도 우리는 늘 지성인됨에 부끄러움이 없는지 자신을 성찰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3. 법조인, 언론인, 학자의 역할과 책임

지성인의 영향력을 확대시키기 위해서 특히 법조인과 언론인, 그리고 학자의 역할과 책임이 막중합니다.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빌헬름 뢰프케는 나라가 발전하려면 법관, 학자 그리고 언론인이 훌륭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세 가지 부류의 전문가 집단이야말로 우리사회를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어야 할 최후의 보루인 것입니다. 다른 모두가 자신의 이익만을 극대화한다고 해도 법조인, 학자, 그리고 언론인만큼은, 자기 이익의 극대화 보다 좀 더 높은 차원의 원리에 의해 움직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자기역할을 해낸다면 그 사회는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들마저 자기 역할과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먼저, 법관은 개인과 개인사이의 분쟁에 대한 판결을 내리고 그에 따르는 징벌을 결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법조인은 사회 속에 살면서 반드시 지켜야할 규범이 무엇인지를 시민들에게 가르쳐주는 사람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판단해 주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법조인이 바로 서지 못하면 옳고 그름이 없어지고 사회는 혼돈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법조인 스스로 자기 실력을 닦으며, 따뜻한 인격을 갖춘, 외압에 휘둘리지 않는 강한 정신의 법조인 상을 확립해야 합니다. 특히 급변하는 글로벌 경쟁 시대를 맞아 개인과 개인사이의 분쟁의 모습이 매우 다양해지고 사회적 가치관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만큼 우리 법조인들도 풍부한 인문학적 교양과 폭넓은 사회과학적인 식견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고시공부에 매달려야만 법관이 될 수 있는 지금의 시스템으로는 그러한 소양을 갖춘 법조인을 양성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의 시스템에서도 뛰어난 실력과 투철한 사명감을 가진 훌륭한 법조인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러나 법률가가 되고자 하는 학생들이 학사과정에서는 인문학, 사회과학, 그리고 자연과학에 걸친 폭넓은 지식과 깊은 사색을 하는 힘을 충분히 기르게 한 뒤, 대학원 과정에서 비로소 법률을 공부하도록 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이런 의미에서 로스쿨 제도를 빨리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법적 전문성과 지성적인 영향력을 결합시키는 길이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학자의 역할과 책임이 누구보다 막중하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학자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연구에 매진하여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 내고 창조적인 지식을 창출해 내야 합니다. 지난 수 십 년간 우리 학자들은 해외로부터 선진 과학과 기술을 전수받아 사회 전 분야에 확산시키는 기능을 비교적 잘 수행하였고 이를 토대로 우리경제도 고도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방을 통한 양적 팽창’이 아니라 ‘창조를 통한 질적 성장’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창조적인 지식을 창출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고 활발한 저술활동으로 논문과 책을 통해 우리 사회와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자기가 발견한 빛을 어둠을 밝히는 데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아직 우리 대학사회가 관료적인 사고에 젖어 가급적 변화를 피하고 뒤로 미루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가장 지성적이어야 할 대학사회가, 누구보다도 먼저 변화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미루어 사회전체에 확산시켜야 할 대학사회가, 어떤 경우는 오히려 일반 조직보다도 변화를 싫어하며, 심지어 가끔씩 비지성적인 일들까지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개탄스럽습니다.

끝으로 언론의 역할과 책임도 막중합니다. 언론의 기본적인 역할은 대중에게 여론을 전파하는 매체로서의 기능이라고 생각합니다. 500년 전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의 門에 『95개 조항』을 대자보로 붙여 놓았을 때 그것이 나중에는 활자로 인쇄되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독일 전역에 배포․전파됨으로써 루터의 종교에 대한 생각을 독일 사람들에게 전달하였고 결국은 近代라고 하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혁명을 가능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언론의 기능 가운데 사실을 사실대로 전달하는 기능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고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사실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은 채 흥미위주의 보도에 열중한다면 그러한 보도는 誤報일 수밖에 없고 그런 일이 쌓일 경우 언론 스스로 자기 손발을 묶어 버리는 일이 되고 맙니다.

뢰프케의 말 뿐 아니라 역사를 살펴보아도, 한 사회에 言路가 막혔을 때, 그 사회는 결국 망하고 말았다는 역사적인 사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론인은 자신의 주관을 내세우기에 앞서, 혹시라도 주목할 만한 목소리를 제대로 전달을 하지 않고 있지나 않은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목할 만한 목소리를 여러 가지 이유를 감안하여 대중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않도록 하는 결정을 자꾸 내린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언론 스스로 言路를 가로막는 셈이 됩니다.

물론 언론도 하나의 기업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언론은자신의 이익에만 치중해서는 신뢰를 얻을 수 없습니다. 언론을 비판하는 목소리들 가운데 합당치 않은 주장도 물론 많이 있을 것입니다만, 아무리 듣기 괴로운 비판을 듣더라도 어디 까지나 언론 스스로는 비판론자들의 의혹과 비판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지를 스스로 살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언론 자신도 자기의 비판을 묵묵히 수용하지 못하는 상대방을 신랄하게 비판하던 잣대를 스스로에게 들이 댈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긴 안목으로 볼 때 언론인 자신들에게도 더 이익이 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 사회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에도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정치가 혼탁하고 아무리 사회에 어둠이 드리워져 있다고 해도 법조인과 학자, 언론, 그리고 우리사회의 지식인들이 지성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뚜렷이 하고 바로 서 있을 때 그러한 혼탁과 어두움은 오래 갈 수 없으며 우리 사회도 제 위치를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사회와 경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가장 일차적 사회적 자본입니다. 또한, 사회 각 영역에서 다양한 지성인들이 제 역할을 수행할 때 우리 정치도 이전투구의 政爭에서 벗어나고 우리나라의 앞날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目前의 표계산에만 몰두하는 구태에서 벗어나 국민들을 위해 나라 걱정을 대신하는 지성적 태도가 정치를 비롯한 사회 전반에 확산되기를 기대합니다. 국민이 정치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국민들이 아무 걱정 없이 편안하게 생업에 몰두하도록 만들 수 있기 위해서도 지성인의 더 큰 역할과 헌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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