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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예술의 전당 ‘오르세 미술관展’
[미술비평]예술의 전당 ‘오르세 미술관展’
  • 박희숙[서양화가·시인]
  • 승인 2007.04.30 14: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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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예술혼 속으로’

 

□ <오르페우스>, 154.0 x 99.0 cm, 패널에 유채, 1885년作.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은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19세기 미술품을 전시하고있다. 밀레, 세잔, 마네, 반 고흐, 고갱, 드가, 르누아르, 피사로, 모네 등 19세기 인상파 미술을 주도했던 화가들의 작품 70여 점이 전시되고 있어 그들의 치열한 예술 혼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세워졌던오르세 역은 20세기 격변의 시대를 맞이하여 쇠퇴하는 운명을 맞이했으나 레알 보존 운동(발타르가 설계한 파리 중앙 시장인 레알 건물을 보존하자는 운동)으로 철거되는 운명에서 벗어나게 된다.
오르세 기차역은 파리 한복판에 있는 센 강을 사이에 두고 루브르 박물관과 튈르리 궁전과 마주보고 있는 아름다운 기차역으로 작품을소장하는 데 포화상태에 이르렀던 루브르 박물관 관계자들에 의해서 19세기 후반 예술 작품들을 모아놓은 미술관으로 새롭게 탈바꿈했다.
오르세 미술관의 전시 목표는 1820~1870년 출생의 예술가들의 작품을 한 공간에 소개하는 것이다. 또한 19세기 후반에 싹텄던 새로운 예술 양식에 대한 성찰을 표명하는 일이었다.
오르세 미술관은 회화는 물론 사진, 장식예술, 건축, 영화에 이르기까지 한 분야에만 치중하지 않고 19세기 다양한 예술분야를 소개하고있다.
그래서 19세기 예술 전 분야를 소개하고 있는 오르세 미술관에서는 20세기 획기적인 미술혁명을 일으켰던 작품들은 만날 수 없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지금 전시하고 있는 작품들 중에 우리 눈에 너무나 익숙한 작품도 있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가들의 작품들도 눈에 띤다.
일반적으로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들을 많은사람들이 좋아하지만 일부 몇몇의 화가들에게만 관심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이번 전시회에서는 19세기 인상파를 주도했고 인상파를 통해자신의 예술을 보여주었던 화가들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이 우리에게 소개가 된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오르페우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오르페우스의 이야기를 귀스타브 모로가 각색해 표현한 작품이다.
오르페우스는 시인이자 음악가였다. 그는 숲의 님프인 아름다운 에우리디케와 결혼을 하지만 신부는 첫날밤 뱀에게 물려 죽는다. 신부의 죽음에 절망한 오르페우스는 그녀를 찾기 위해 저승까지 갔다.
오르페우스는 죽음의 강을 지키고 있는 뱃사공 카론을 노래로 감화시켜 스틱스 강을 건너 저승세계인 하데스 중심에까지 간다. 그곳에서 오르페우스는 노래를 불러 저승을 다스리는 플루톤과 그의 부인 프로세르피나의 마음을사로잡는다.
마침내 오르페우스는 아름다운 신부 에우리디케를 지상으로 다시 데려갈 수 있다는 허락을 받는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었다. 지상세계에 도착할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르페우스는 연주를 하고 그 뒤를 에우리디케가따랐다. 하지만 오르페우스는지상에 거의 다다랐을 때 궁금해서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에우리디케는 지하세계로 끌려가고 오르페우스는 영원히 사랑하는 아내를 잃어버리고 만다. 절망에 빠져 리라만 연주하고 있던 오르페우스를 보다 못한 디오니소스는 무녀 메나드에게 그를 보낸다. 그런데 무녀 메나드는 그의 몸을 찢어 그의 머리를 헤브로스 강에 던져 버렸다.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의 이름을 부르며강물을 떠다녔고 안티사 동굴에 닿은 후 신탁을 내리기 시작했다. 아폴론은 그를 질투하여 침묵하게 만들었다.
이 비극적인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에서 모로는 영감을 얻었다. ‘한 젊은 여인이 헤브로 지방의 트라카아 강가까지 떠내려 온 오르페우스의 머리와 리라를 경건하게 거둔다’라는 부제로 모로는 이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전통적인 이야기에서 벗어났지만 자신이 만들어 낸 새로운 결말을 위해 그는 다양한 방법과 화려한 색채를 사용해 표현했다. 화면 오른쪽 붉은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강이 흐르고 있고 그와 대조적으로 화면 왼쪽은 바위로 가려져 있어 분위기를 장엄하게 만들고 있다.
바위 앞에 젊은 여인은 리라와 오르페우스의 머리를 들고 서 있다. 그녀가 입고 있는 화려한 옷과 비극적인 장면과는 어울리지 않으나모로는 당시에 발간된 고고학이나 문헌에서 찾아 여인의 옷을 장식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모로는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의 영향을 받아 은쟁반에 세례 요한의 목을 들고 있는 살로메처럼 젊은 여인이 오르페우스의 머리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귀스타브 모로(1826~1898)는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예술가를 존중해주는 성장과정은모로를 고전문학에 심취하게 만들었고 그것은 그의 작품 세계에 기초를 이룬다.
장식적이고 화려한 색채로 파리 공식 화단에서 일찍이 인정을 받았던 모로는 파리 국립 아카데미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화가들
을 양성했다.
<콩다민 가에 있는 바지유의 아틀리에> 는 바지유의 아틀리에를 표현한 작품이다. 하지만바지유는 배경과

□ <콩다민 가에 있는 바지유의 아틀리에>, 98.0 x 128.0 cm, 캔버스에 유채, 1869~1870년 作.(위 사진)
다른 사람들은 직접 그렸지만이젤 앞에 서서 팔레트와 붓을 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마네에게 부탁해 완성했다.
인상파 화가들은 그 당시 파리 공식 화단에서 인정받고 있지는 않았지만 화가들 간의 교류는 풍부했다. 여유로운 화가는 어려운 화가의 그림을 사주기도 하고 생활비와 그림에 필요한 재료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
새로운 미술 운동이라는 그들만의 공감대가형성되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많은 도움을 받았던 시기다.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평가받고 있는 바지유와 마네 그리고 그 곁에 조각가 겸 예술비평가인자카리 아스트뤽으로 추정되고 있는 인물도인상파 화가들과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이다. 또한 계단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이 르누아르와 에밀 졸라라는 설이 있는데그 당시 바지유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많아 르누아르와 함께 아틀리에를 같이 쓰고 있었다.
이 작품에 모네와 르누아르 작품이 그려져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화면 오른쪽 누드의 여인을 바라보고 있는 옷을 입은 여인을 그린 작품이 르누아르의 작품으로서 살롱전에 낙선한 작품이다. 현재 일부만 전해지고 있다. 그 아래 과일을 그린 정물화가 모네의 작품이다.
19세기 아틀리에는 그 이전의 도제 형식의 배움의 장에서 창작을 위한 개인 작업실로 변환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아틀리에는 그림을 배우는 학생이나 조수가 없다. 아틀리에의 풍경은 단순하지만 화가가 그림에 전념할 수 있게 햇빛과 통풍이 잘되는 집이다. 커다란 창문 너머 파리의 건물들이 희미하게 보이고 있다.
프레데릭 바지유(1841~1870)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쿠르베나 들루크루아의 그림을 보고 미술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화가의 길을 가면서도 아무런 조건이 없이 생활이 어려웠던 동료 화가 모네와 르누아르에게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베풀었다.

박희숙 / 서양화가·시인


 

성신여대 조형대학원을 졸업하고, 화가이자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그림은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클림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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