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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결정자·주도자’ 강박에 ‘지원자’ 역할 소홀
‘정책 결정자·주도자’ 강박에 ‘지원자’ 역할 소홀
  • 안길찬 기자
  • 승인 2001.10.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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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0-17 11:22:08
한국 대학총장들이 겪는 고뇌와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짚어보기 위해 이들이 안고 있는 근심거리, 직위에 대한 만족 여부, 대학의 기능, 총장 역할 등을 조목조목 확인할 필요가 있다. 대학 총장이 보내준 자기 성찰은 한국 대학의 발전과 교육개혁에 유용한 자료로 쓰일 것이 분명하다.

한국 대학총장들의 가장 큰 근심거리는 무엇일까. 총장들에게 물었다. ‘총장직을 수행하면서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인가.’ 궁핍한 살림형편 때문에 바로 앞 고지가 멀게만 보이는 총장들의 대답은 너나할 것 없이 ‘재원부족’이다. 절반이 넘는 52.1%의 총장이 ‘안정적인 재원 마련’을 우선적으로 꼽았고, 그 다음으로 ‘개혁추진과정에서 구성원들의 반발’(31.9%), ‘학내 구성원간의 갈등조정’(13.7%) 순이다.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질문을 던져보자.

‘대학개혁과 발전의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인가.’ 대답은 ‘교수들의 이기주의’(56.2%), ‘재원부족’(30.1%). ‘정책당국의 통제와 간섭’(9.6%)이다. 맥락은 같지만 또 다른 질문 하나. ‘그렇다면 대학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건은 무엇인가’. 역시 총장들의 답은 ‘재원 확충’(45.2%)이다. 그 다음이 ‘교육·연구 향상을 위한 구조개선’(30.1%), ‘우수 교수진 확보’(23.3%) 순이다. 이쯤에서 ‘구성원들의 갈등조정’(1.4%)은 저 뒷전으로 밀린다.

총장들, 곳간 채워야 발전한다 인식

이 세 가지 질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현재 총장들의 일차적인 고민의 초점은 역시 ‘재원’이다. 재원이 턱없이 부족한 터에 총장들의 눈앞에 당장 어른거리는 것은 기부금입학제의 유혹이다. 국고는 더 이상 비빌 언덕이 부족하고, 발전기금의 명목으로 외부에 손내미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한다면, 사회곳곳의 비판을 무릅쓰고서라도 기부금 입학제의 열매에 손을 대지 않을 수 없다. 너무나 달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기부금 입학에 ‘부분적 찬성한다’는 총장이 46.6%, ‘적극 찬성한다’고 응답한 총장은 8.2%였다. ‘부분적 반대’, ‘적극 반대’ 의사를 밝힌 총장들은 28.8%였다. 기부금 입학제를 도입할 경우, 액수는 사회적 시선을 고려해서인지 ‘5억원 미만’으로 잡은 총장들이 50.0%로 우세했다. 다음으로 ‘5억원 이상 10억원 미만’(25.9%)으로 잡은 총장들도 있었지만, ‘20억원 이상’(12.1%)이라고 큰 손을 내민 총장들도 적지 않았다. ‘대학의 사정에 맞게 액수를 정해야 한다’는 총장도 8.6%에 달했다.

재원 마련과 구성원들의 반발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총장직에는 대체로 만족하고 있는 듯하다. 총장직 만족도를 묻는 질문에 ‘대체로 만족한다’, ‘매우 만족한다’는 의견이 각각 69.9%, 12.3%로 드러났다. 만족 사유는 물질적이거나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 총장들의 설명. ‘국가와 사회에 대한 봉사’(49.3%)가 가장 큰 이유이고, ‘리더십 발휘를 통한 비전 제시’(26.8%), ‘자기 성취의 기회’(14.1%)를 ‘만족’의 이유로 꼽았다. 세속적인 급여와 기타 혜택,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택한 총장은 4.3%였다.

이들 首長들은 대학의 일차적인 기능을 무엇으로 보고 있는가. 대답은 의외로 고전적이다. 여전히 ‘학문연구와 진리탐구’(64.4%)를 가장 우선적으로 내세웠다. ‘전문 지식인의 배출’은 28.8%, ‘교양인의 양성’은 5.5%로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는 총장들이 대학의 포커스를 어디에다 두고 운영하고 있는지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현재 대학을 운영하면서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교육·연구활동 지원’(39.7%)이다. 물론 개혁적 입장에서 ‘장기적 비전 수립’(39.7%)을 택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다음으로 ‘재원 확보’(15.1%)가 뒤를 잇고 있다.

총장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무엇일까. 대답 일순위는 대학 운영의 정책기조를 정하고, 자원을 배분하는 ‘정책결정자’(42.5%)였다. 다음으로 대학발전 계획을 수립·시행하는 ‘대학개혁의 주도자’(28.8%), 대학의 입장을 대변하고, 대외 협상의 상대역을 맡는 ‘대표자’(15.1%) 순이다. 여기서 교육과 연구를 보조하는 ‘지원자’(8.2%) 역할에 눈을 돌린 총장은 적다. 대학의 일차적 기능이 ‘학문연구와 진리 탐구’에 있다고 응답하면서도 교육과 연구를 보조하는 ‘지원자’로서의 총장 역할을 애써 외면하는 背理를 엿볼 수 있다. 다음 질문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총장의 가장 중요한 덕목을 묻자 총장들은 역시 리더의 필수요소인 ‘지도력’(43.8%)을 우선적으로 꼽았다. 그 다음이 조직운영에 필수적인 ‘관리력’(21.9%), 조직통합을 위해 필요한 ‘융화력’(17.8%) 순으로 들었다.

70%가 총장직에 만족, 국가·사회봉사 이유꼽아

총장들은 대학 안팎에서 어떤 활동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고 있을까. 대내적으로 보면 처장회의, 교무위원회 회의 등 공식적 의사결정 활동이라는 대답이 42.5%로 가장 높았다. 교원인사, 예산분배 등 행정적 문제해결 활동(31.5%)이라고 답한 총장도 적지 않았다. 이에 비해 교수·학생 간담회 참석 등 조직유지·여론수렴 활동(19.2%), 각종 학내 행사 참여 활동(4.1%)등은 낮았다. 대외적으로 보면 타 대학 총장, 기관장 등 모임 참석(34.2%)이란 응답이 가장 높은 가운데, 외부강연·초청행사 참석(19.2%), 법인·교육부 등 관계기관 회의(16.4%), 각종 기금마련 활동(13.7%), 외부 지역·사회단체 방문(12.3%) 등이 비슷비슷한 정도로 나타났다.

총장들이 선호하는 선출방식은 국·사립 모두 간선제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교수 직선으로 선출된 대부분의 국립대 총장들조차 직선제(33.3%) 대신 후보추천위에서 선출 후 정부가 임명하는 간선제 방식(60.6%)을 지지했다. 더욱이 직선제를 옹호하는 사립대 총장은 4.1%에 불과했다. 사립대 총장들은 후보추천위에서 선출 후 법인에서 임명하는 간선제 방식(53.1%), 법인 임명방식(22.4%), 법인 임명 후 교수회에서 추인 방식(20.4%)순으로 답했다.

대학개혁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기 위한 총장의 임기에 대해서는 4년(37.0%)이란 응답이 우세한 가운데 5년(24.7%), 6년(17.8%)순으로 답했다.

기금마련 활동보다 총장·기관장 모임참석 많아

이번 ‘한국 대학총장의 고뇌와 자기성찰’ 설문조사에서 확인된 것은 총장들의 인식경향이 현장 교수들과 상당한 괴리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신문은 지난 209호(9월10일자)에서 90%에 가까운 교수가 계약제·연봉제 도입을 반대한다는 조사결과를 밝힌 바 있다. 반면 이번 설문조사에선 총장들 94%가 두 제도 도입을 찬성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교수노조 설립에 관해서도 마찬가지. 노조가 합법화되면 가입하겠다는 교수가 ‘64%’가 달하고 있지만, 조사결과 노조가 ‘매우 불필요하다’는 총장이 54.8%를 차지하고 있다. 임무와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총장과 교수 사이의 인식 차는 어느 정도 예상됐지만, 총장도 한편에선 교수와 같은 학자의 신분이고, 한 울타리에서 한솥밥을 먹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앞의 인식차는 우려되는 수준이다.

이번 설문조사를 통해 확인된 우리시대 대학총장들의 아이덴티티는 대학 갈등의 조정자, 교육 연구의 지원자라기보다 정책 결정과 개혁의 주도자에 가까웠다. 그러나 개혁을 주도하길 원하지만, 구성원간의 합의를 이끌어내고 이를 모아 원칙적이고 소신있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총장들은 여전히 안팎의 눈치를 보면서 ‘자율’보다는 ‘타율’에 휘둘려있다. 정부와 사학 법인, 세태의 저잣거리 논리 앞에서 허물어지고 있다.

이제 분명한 역할과 책무, 권한 그리고 자기 능력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대학 구성원을 한데 끌어안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부드러운 리더십‘이 총장들에게 요구된다. 총장들이 리더십의 동력을 학내 구성원들의 여론을 수렴해 형성하지 않고 권위적인 자기 독백적 행태로 모색한다면 이건 한국 대학의 불행일 될 수밖에 없다. 리더십은 권한을 나눌수록 더욱 탄탄해 진다는 사실을 총장들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안길찬 기자 chan1218@kyosu.net □ 다음 호에서는 같은 주제로 각 대학교수협의회 회장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가 진행됩니다. 많은 관심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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