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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이 ‘쇄국론’ 펼친 이유는 뭘까
대원군이 ‘쇄국론’ 펼친 이유는 뭘까
  • 교수신문
  • 승인 2007.04.30 11:1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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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기획시리즈 (8) 조선 개화파 논의

이번 호 역사비평 시리즈는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서 불거진 조선 개화파에 대한 논의를 살펴본다. 이는 자유무역협정을 바라보는 현재의 시각에도 많은 의미를 부여해줄 것이다. 먼저 이상익 교수는 성리학적 입장에서 조선개화파를 논의했다. 이 교수는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차이점으로 자주와 사대, 약육강식과 의리, 선진문물에 대한 문명관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강상규 선임연구원은 기존의 개화론 대 수구론 구분은 이분법적 도식에 빠져 있는 것이라며, 역사를 좀더 중층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편집자주

흥선대원군. 강상규 선임연구원은 대원군이 처음부터 쇄국론을 펼쳤는지 의문을 던진다.
 20세기 한국은 식민지와 해방, 분단과 전쟁을 경험했고, 세계적인 냉전의 전개과정 속에서 서구를 따라잡으려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산업화와 민주화 추진세력의 치열한 갈등과 긴장 속에서 전개된 근대 역사학의 성과는 60년대 이후 민족주의사관, 내재적 발전사관 등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민족주의사관은 해방 후 ‘분단시대’를 사는 남북한 역사가들에게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한 분단극복, 근대민족국가의 수립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내재적 발전사관은 국내 사회경제구조의 변화에 주목하면서 19세기 후반 개혁의 주체 논쟁 등으로 논의를 확대시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역사학은 포섭대상으로서 수동적 의미만을 지니던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자리매김 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으며, 남북한의 관료적 권위주의 정부에 대한 강력한 비판적 시각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형성된 조선근대사의 이미지는 닫힌사회(쇄국)에서 열린사회(개국)로의 이행과정으로 규정되었고, 여기서 다루어지는 정치적 내용은 지배계급 대 민중세력 혹은 개화파 대 수구파의 각축이라는 단순화된 틀 내에서 이해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필자는 판단하고 있다.

개화 VS 수구의 이분법 문제

 문제는 기존의 개화론 vs. 수구론의 이분법으로는 이 시대를 읽을 수 없다는 데 있을 것이다. 당시의 지식인, 위정자들의 사고를 개화 혹은 수구의 어느 한 쪽에 끼워 넣으려는 것은 당시 조선의 정치지형, 그리고 현실정치의 역학관계 및 문맥을 이해하는데 오해를 낳기 마련이다. 이런 시각에 입각하게 되면 동요하고 있던 시대를 살았던 당대인들의 정치적 고뇌와 선택의 의미가 생동감 있게 느껴지기 어렵다. 19세기를 살았던 인물들의 사고의 경직성을 탓하면서 정작 우리 스스로가 이분법적이고 도식적인 사고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우리가 이 시대를 이분법적인 틀로 보는데 익숙한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시대를 前근대에서 근대로의 전환기로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조선을 역사발전론이나 진보사관의 틀로 포착하는 데는 명확한 한계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당시 조선은 중화문명권에 속해 있었으며, 독특한 문명의식과 자존의식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물리력을 앞세운 외세의 압력과 근대 유럽의 문명기준에 입각한 상이한 가치체계와 마주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쌍방은 서로를 ‘야만’으로 간주하며 충돌하게 된다. 이 시대는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입장에서 보면 상이한 문명 ‘간’의 접촉에서 빚어지는 갈등과 위기의식이 교차하는 일종의 거대한 문명사적 전환기였던 것이다.

 그러면 기존의 개화론과 수구론의 이분법적 사고가 파생시키는 문제를 구체적인 몇 개의 사례를 통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예컨대 박규수의 경우를 보자. 박규수는 조선개화파의 원조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박규수를 단순히 개화파와 실학의 가교를 놓은 존재로 인식해서는 당대를 고민하며 살았던 박규수의 정치적 사상적 고투는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당시 박규수는 뭔가 국가 ‘간’ 관계의 패러다임 변화를 감지하는 속에서 조선이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할 지 어디까지나 儒者적 관점에서 현실정치가로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기존의 개화파 중심의 역사서술에서 박규수는 개화의 선구자로서 그와 개화파간의 교류에 대해서는 주목할 수 있었어도, 국왕을 가까이서 보좌하며 국왕의 선생으로서 그가 갖는 정치사적 의미는 주목받기 어려웠다. 당시 조선의 정치구조와 군신관계에 대한 이해를 배경으로 박규수의 삶을 차분히 따라가지 않으면 박규수와 고종의 특별한 정치적 관계는 눈에 들어오기 어려우며, 당시 조선정계의 한켠에서 진행되었던 혼돈과 고뇌의 순간들이 포착되지 않는다.

대원군은 처음부터 쇄국론을 펼쳤나

 한편 대원군은 쇄국론자의 대명사로서 알려져 왔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쇄국론을 편 것은 아니었다. 대원군의 아내는 천주교를 믿었으며, 고종의 유모 박씨부인 역시 천주교 신자였고 대원군도 천주교에 익숙한 인물이었다. 대원군이 실질적으로 외세를 배척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계기가 된 1866년의 천주교 탄압(병인박해)이 벌어지기 직전까지만 해도 그는 천주교를 승인해주는 대신 프랑스와의 연합을 통해 1860년 이래 새로이 국경을 접하게 된 러시아를 방어할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대원군은 1866년 어떠한 현실정치적 이유에서 왜 갑작스레 천주교를 탄압한 것인가. 그리고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와 이어지는 병인양요 등 일련의 사건은 조선 국내의 정치적 역학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 것일까. 하지만 대원군은 이미 쇄국론자로서 기정사실화 되어 이러한 질문이 성립하지 않았다.

 1880년 12월에는 통리기무아문이 세워진다. 통리아문은 정1품아문 기구인 만큼 의정부와 동급이었으며, 외국과의 교섭 및 통상, 군사력의 강구를 비롯한 국정전반을 총괄하는 정부기구였다. 요컨대 세계의 흐름을 반영하여 개화 자강정책을 추진하려는 기구인 셈이다. 중국의 양무운동을 상징하는 총리아문이 주로 구미제국과의 외교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이었음을 고려하면, 조선의 통리아문의 설립이 얼마나 획기적인 조치인지를 짐작하고 남음이 있을 것이다.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하고 나서 대원군이 권력을 손에 쥐자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이 바로 통리아문의 폐지였다. 이것은 당대에 통리아문의 정치적 중요성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며 조선의 진로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 어떻게 복잡하게 얽혀갈 수 있는가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존의 논의가 “1880년대 초반에 이루어진 지배층의 개화정책은 정권유지를 목적으로 한 것으로서 외세의존적이고 몰주체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나, “조정에 진출한 개화파들에 의해 통리아문의 설립을 비롯한 일본시찰단 및 영선사 등의 파견이 이루어졌다”고 하여 지배층의 기득권을 옹호하려는 기만술책 정도로 언급하거나, 개화파의 영향 하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과는 크게 다르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방식을 반영해서인지, 예컨대 이 시대를 다루는 교과서적 성격을 지닌 560페이지에 달하는 <한국사강좌 : 근대편>(일조각, 1997년판)에도 통리아문에 관한 설명은 채 한 페이지도 할애되어 있지 않다. 그러면 이른바 개화파가 현실정치의 수면으로 부상하기 이전인 1880년의 정치적 상황에서 중앙의 정치공간에서 이러한 변화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과연 누구이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인가. 이러한 기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고 어떻게 19세기 후반의 복잡다난했던 한국의 정치사를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일까.

 1880년의 상황은 일본에 의해 유구가 병합된 후 조선문제가 서서히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핵심 이슈로서 부상해오는 시기이기도 했다. 구미제국, 중국, 일본의 다중적인 국제적 압박위에서 국내적으로는 새로운 개혁, 개방의 모색이 조심스레 이루어지고 이에 반발하는 대다수의 비판적 정서가 끊임없는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84년 갑신정변을 주도한 5인방-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의 평균 연령은 26세였다. 이들이 구상하던 비전이나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을 찾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역으로 이처럼 젊은 인사들이 조선의 정치지형에서 어떻게 현실적으로 그와 같은 거사를 감행할 수 있었으며, 어떻게 ‘삼일 동안씩이나’ 나라를 장악할 수 있었을까를 함께 물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역사는 중층적인 것

 지난 번 교수신문에서 진행된 바 있는 대한제국과 고종을 둘러싼 논쟁에서도 고종이 성리학적 군주라는 이유를 들어 고종이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견해가 제출된 바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인생은 모순에 가득 찬 것이며 중층적인 것이다. 더욱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더더욱 그렇다. 우리가 구태여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며 역사를 천착하는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 방황하고 고민하며 모색하고 결단하는 다채로운 인간들의 모습 속에서 결정론적 시각이나 도식적인 이해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세계를 보는 폭넓은 시각과 지혜를 얻기 위함이 아닌가.

 19세기 동아시아는 전통과 근대가 단지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라 복합적인 상관관계 속에서 반응하는 생동감 있는 현장이었다. 그리고 박제화 되어버린 19세기 한국정치사가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우리의 의식과 현재 세계를 구성하는 일부인 동시에 우리의 미래로 남아있을 일련의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이제 우리도 조선개화사를 비춰보기 위한 더 많은 거울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강상규 / 서울대·정치사
필자는 도쿄대에서 ‘조선의 유교적 정치지형과 문명사적 전환기의 위기’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국제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이다.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제국일본>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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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미 2007-04-30 22:13:42
흥미로운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