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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경제적 생활양식에 대한 ‘이견’
인권과 경제적 생활양식에 대한 ‘이견’
  • 교수신문
  • 승인 2007.04.30 11:0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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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기획시리즈 (8) 조선 개화파 논의

이번 호 역사비평 시리즈는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서 불거진 조선 개화파에 대한 논의를 살펴본다. 이는 자유무역협정을 바라보는 현재의 시각에도 많은 의미를 부여해줄 것이다. 먼저 이상익 교수는 성리학적 입장에서 조선개화파를 논의했다. 이 교수는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차이점으로 자주와 사대, 약육강식과 의리, 선진문물에 대한 문명관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강상규 선임연구원은 기존의 개화론 대 수구론 구분은 이분법적 도식에 빠져 있는 것이라며, 역사를 좀더 중층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편집자주

성리학적 理想과 개화론

필자에게 주어진 논제는 ‘개화론에 대한 성리학적 비판’이다. 이에 따라 먼저 이 글의 성격을 한정하고, 독자들의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첫째, 이 글은 개화론에 대한 ‘철학적 논의’이다. 개화론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라는 주제에, 필자 외에도 정치학자와 역사학자가 참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주로 철학적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하겠다. 둘째, 이 글은 개화론에 대한 ‘비판적 논의’이다. 따라서 개화론의 功過에 대한 균형 잡힌 논의가 아니라, 過에 대한 일면적 논의라는 점이다. 셋째, 개화파에 대해서도 보통 갑신개화파(급진개화파)와 동도서기파(온건개화파)를 구분하는바, 이 글에서는 급진개화파를 논의의 표적으로 삼는다.

갑신정변 전에 촬영된 개화파들의 모습. 이상익 교수는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가장 큰 차이는 문명관에서 비롯한다고 지적했다.
한 세기 전, 전통유학의 입장에서 개화론을 비판한 인물들을 보통 衛正斥邪派라 부른다. 위정척사파는 병인양요(1866) 이래 쇄국정책을 지지했다. 그러나 조선은 강화도조약(1876)을 계기로 문호를 개방했고, 이후 제국주의 열강은 조선을 두고 쟁탈전을 벌이게 되었다. 당시 개화파는 열강을 ‘선진’으로 규정하고, 우리도 선진문물을 배워 부강한 나라를 만들자고 했다. 반면에 위정척사파는 열강을 ‘야만’으로 규정하고, 전통적 유교국가체제를 재정비하여 인륜문명을 지키자고 했다. 위정척사론을 근대사의 전개과정과 결부시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운양호사건(1875)을 계기로 문호개방 논의가 본격화될 때, 위정척사파가 개항에 반대한 주요 논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 굴욕적 개항은 우리의 정치·경제적 주권을 위협하게 된다. 둘째, 서양의 문물은 物欲만 추구하는 것인바, 열강과의 通商은 우리의 인륜문명을 타락시킨다. 그러나 마침내 문호는 열렸고, 이후 일본에 修信使를 파견하는 등 개화정책이 본격화되었다. 그런데 김옥균·박영효 등은 조정의 개화정책이 지지부진하다는 이유로 ‘정변’을 거행했던바, 이는 개화파 내부의 노선투쟁이기도 했다.

갑신정변이 실패함에 따라 淸이 조선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승리함으로써 다시 주도권을 장악하고, 개화파는 일본을 배경으로 갑오개혁을 단행했다. 개화파가 주도한 일련의 개혁책들에 대해, 위정척사파는 ‘일제의 사주’에 의한 것이요, ‘아이들 장난’처럼 즉흥적이라고 비판했다.

개화파 VS 위정척사파

일제는 청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을 둘러싼 利權을 굳히는 듯 했으나, 러시아 등의 삼국간섭으로 일제의 야욕은 다시 좌절되었다. 이후 러일전쟁을 도발하여 승리한 일제는 을사늑약(1905)을 강요했다. 위정척사파는 이를 ‘국권의 강탈’로 인식하고, 외교적 노력을 통해 늑약을 무효화시킬 것을 주장하는 한편, 의병항쟁으로 일제와 맞섰다. 그러나 개화파는 의병에 대해 ‘조선을 지도하고 보호하려는 일본의 선의를 오해한 폭거’라고 비판했다. 국권상실 이후, 위정척사파는 무장독립투쟁의 길을 선택했으나, 개화파는 민족을 개조하고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독립을 준비하자는 노선을 제시했다.

이상에서 개항기로부터 독립운동기까지의 역사적 과정과 주요 논점을 대략 정리해 보았다. 그렇다면 이에 대해 성리학적 입장에서는 어떠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인가? 필자는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이를 논의해 보고자 한다.

자주인가 사대인가

첫째, 自主와 事大의 문제이다. 개화파는 당시까지의 조선을 중국에 예속된 국가로 규정하고, 자주독립을 표방했다. 전통 유교인들은 자주독립할 뜻이 없이 예속을 달게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광명천지가 되었으니, 그동안의 예속을 털고,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만국공법을 주권국가들 사이의 평등한 국제질서로 인식하고, 이에 비추어 기존의 한중관계를 지배와 복종의 관계로 인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근원적으로 한계가 있는 것이었다. 전통유교가 추구한 것은 禮의 질서로, 韓中 관계는 事大와 字小를, 韓日 관계는 교린을 이상으로 한 것이었다. 본고에서 자세히 논할 여유는 없으나, 개화파는 근대적 공법질서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고, 전통적 禮의 질서에 대한 이해도 미흡했다. 그러나 이들은 무엇보다도 자주독립으로 개화노선을 정당화하면서, 위정척사파를 시대착오자로 烙印한 것이다. 반면에 위정척사파는 근대적 국제질서를 약육강식의 무질서로 단정했다. 따라서 기존의 사대관계를 해체하고 제국주의 열강에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야말로 국권을 위태롭게 만드는 일이라고 보았다. 강화도조약의 제1조는 “조선은 자주국가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무슨 뜻이었는가는 이후의 역사가 웅변해 주었다.

둘째, 약육강식과 義理의 문제이다. 개항 당시에는 개화파는 제국주의의 대열에 동참하자는 이상을 내걸었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이 가시화되자, 개화파는 일제의 침략을 보호와 지도로 인식하고, 조선은 아직 독립할 능력이 없으므로 일제의 보호와 지도를 받으면서 자주독립의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기존의 평등한 주권국가관과는 모순 되는 인식이거니와, 이들은 국제사회에 조선의 평등한 주권을 요구하는 것을 접어두고, 실력이 없는 조선의 현실을 자책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부강하면 우리도 식민침략의 대열에 동참하고, 우리가 빈약하면 우리는 열강의 침략을 그대로 甘受하고 말아야 하는 것인가? 성리학파의 의리에 입각하자면, 부강할 때의 침략도 부당하거니와, 빈약할 때의 감수도 부당한 것이다. 부강할수록 솔선수범 신의를 지켜야 하고, 침략을 받았을 때에는 분연히 항거해야 되는 것이다.

셋째, 文明觀의 문제이다. 개화파가 조선의 당연한 권리라고 했던 국권을 스스로 유보하게 된 것은 그들의 문명관의 소산이다. 개화파는 전통 유교문물을 야만으로 규정하고, 서양문물을 선진으로 규정했다. 선진문물을 구비하지 못한 조선은 아직 독립할 자격이 없으므로, 먼저 민족을 개조하여 독립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서양문물을 선진으로 규정한 논거는 인권을 주축으로 하는 사회질서와 풍요롭고 편리한 재화였다. 전통유교는 개인의 인권을 돌보지 않았고, 재화는 부족하고 불편했으므로 야만인 것이다. 그러나 위정척사파는 자유와 평등을 무질서와 동일한 뜻으로 이해하고, 권리를 위한 투쟁을 약육강식으로 인식했다. 전통적 예의문물이야말로 질서 있고 평화로운 세상을 향한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또한 서양의 물품은 생활에 긴요한 필수품이라기보다는 불필요한 욕망을 자극하는 사치품이라고 보아, 역시 야만이라고 배격했다. 이들은 검소한 소비생활이야말로 인륜문명의 극치라고 보아, 전통적 산업양식을 옹호했던 것이다.

문명관의 차이

위의 세 논점은 사실 유기적으로 연관된 것인데,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논점은 문명관의 문제일 것이다. 또 문명관에 있어서 핵심도 두 가지 문제였다. 첫째는 자유와 평등으로 상징되는 人權을 중시할 것이냐, 禮로 상징되는 人倫을 중시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당시에는 개화파나 위정척사파 모두 상호 이해가 미흡함으로써 지양점을 찾지 못한 것이다. 인권과 인륜은 한편으로는 배치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지양되어야 할 가치일 것이다. 둘째는 경제적 생활양식의 문제이다. 개화파는 자본주의 체제를 추구했고, 위정척사파는 농본주의 체제를 옹호했다. 현대인들은 대개 농본주의를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비판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자본주의 문명은 지구의 부존자원을 착취한 문명으로서, 그것이 자원·환경 차원에서 많은 난제를 낳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전통 성리학은 인간의 욕구충족 구조와 자연의 순환적 재생산 구조를 일치시키려 한 것인바, 이는 오늘날 더욱 절실한 과제일 것이다.

한 세기 전에는 현실이 워낙 급박했기에, 이런 문제들을 숙고할 여유가 없었다. 주권도 회복하고, 풍요도 달성한 지금은 보다 침착하게 이런 문제들을 숙고해야할 때라 생각한다.

이상익 / 영산대·동양철학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韓末 節義學派와 開化派의 사상적 특성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기호성리학논고>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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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철학 2007-05-02 22:37:30
1. 사대도 힘의 불균형을 전제합니다. 사대도 예의 일부라고 개념화되는데 예는 본디 중화
와 이적의 차별을 나타냅니다. 예의 계급적 중화주의적 성격에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강화도 조약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2. 개화파가 제국주의 질서에 동참하자고 햇다는데 너무 단순화한 게 아닌가요. 3.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을 전면적으로 거부할 수 잇는 걸까요? 자연의 순환적 구조, 성리학을 떠나서 이해 가능합니다. 4. 한자를 그만 써 주십시오. 한자는 신분 차별과 중화주의의 상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