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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다원주의의 정치이념
문화다원주의의 정치이념
  • 교수신문
  • 승인 2007.04.16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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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과 자율 (4) 자유사상 변천사-존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

교수신문은 자유사상이 어떠한 역사적 맥락을 갖고 흘러왔는지 고전을 통해 살펴봄으로써 근대사상의 핵심 을 조명하고자 한다. 이번 기획은 ‘대학과 자율’이라는 문제를 좀더 본질적으로 바라보기 위한 시도다.  전문 필자들로부터 자유사상 변천사에 굵직한 발자욱을 남긴 저서들을 들여다봤다. / 편집자주 

존 롤즈(John Rawls)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치철학자로 꼽힌다. 그가 1971년에 출간한 <정의론, A Theory of Justice>은 19세기 말에 시지윅(Sidgwick)이 타계하면서 시작된 정치철학의 암흑기를 단숨에 마감시킨 획기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동안 ‘정치철학은 죽었다’고 절망에 빠져있던 세계지성들은 롤즈의 저작에 고무되어 너 나 할 것 없이 학술논쟁에 뛰어들었다. 화려한 정치철학의 르네상스가 도래했던 것이다.

그 뒤 20여 년 동안 <정의론>은 뜨거운 학술논쟁의 한가운데에 서있었다. 이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도 밝히고 새롭게 발전된 생각도 밝힐 겸 롤즈는 1993년에 <정치적 자유주의, Political Liberalism>를 출간하였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정의론>에 견주면 책의 분량이 턱없이 작고, 세계지성계의 주목도 훨씬 적게 받았다.

지성계의 주목을 덜 받았다고 학술적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정치적 자유주의>의 정치이념은 <정의론>의 정치이념보다 더욱 다양한 삶의 양식을 포용한다. 그런 점에서 현대정치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욱 적실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정의론>이 20세기의 최대문제였던 정치이념의 갈등문제를 정치철학적으로 풀었다면, <정치적 자유주의>는 21세기의 최대문제가 될 문화양식의 갈등문제를 정치철학적으로 풀고 있다.

두 저작에서 롤즈가 주장하는 정의원칙은 똑같다. 사회운영원리로서 정의원칙은 평등한 자유의 원칙과 기회균등의 원칙, 그리고 차등의 원칙으로 구성되었다. 차등의 원칙은 최소수혜자에게 최대이익이 되도록 사회불평등을 통제해야한다는 원칙이다. 세 원칙은 순차적으로 절대적 우선성을 가진다.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 최우선적으로 실현되어야 하고, 그 다음이 기회균등의 원칙, 마지막이 차등의 원칙이다.

<정의론>에서 롤즈는 입헌민주주의에서만 정의원칙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칸트의 정언명령을 절차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간주되는 정의원칙은 다른 정치체제에서도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정의원칙은 냉전의 대립된 두 정치체제에서 모두 추구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서로 갈라져 적대시했던 세계지성계는 깜짝 놀랐다. 정치신념이 달라도 학술공론장에 함께 뛰어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누구나 롤즈의 정의원칙을 소재삼아 자신의 주장을 펴게 되었다. 자유주의 정치철학자로서 이렇게 학술공론의 이념지평을 넓힌 사람은 역사상 롤즈가 처음이다. 그는 정치이념의 냉전상황에서 자유주의이념을 방어하려했던 벌린이나 하이에크와 전혀 딴판이었다. 그가 세계지성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그동안 학술논쟁에서 크게 논란되었던 것은 정의원칙이 과연 칸트의 정언명령처럼 보편적인 정치원칙으로 주장될 수 있는가하는 문제였다. 롤즈는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자신의 주장을 과감하게 뒤엎었다. 정의원칙은 자유주의의 정치원칙일 뿐이며, 그것은 입헌민주사회에 내재된 정치이념이라고 주장하였다. 종래에 정의원칙은 서로 다른 정치사회에서도 실현될 수 있는 보편원칙이었지만, 이제는 입헌민주사회에 고유한 정치원칙이 되고 말았다.

얼핏 보면 학술논쟁에서 롤즈가 전면적으로 후퇴한 듯이 보인다. 그렇지만 깊이 살피면 새롭게 해석된 정의원칙은 정치철학의 투쟁전선을 완전히 뒤바꾸고 있다. 이제 그는 하나의 대안으로서가 아니라 유일한 대안으로서 입헌민주주의에 전폭적인 기대를 걸고 있다. 유일한 대안이라면, 정치사회의 최대관건은 어떻게 하면 입헌민주주의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가이다. 롤즈는 입헌민주사회의 안정성은 다양한 문화양식을 포용하는 데 달려있다고 주장한다.

입헌민주사회는 스스로 문화양식의 다양성을 부추기기 때문에, 이들의 정치적 조화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평화로운 삶의 지평을 기대하기 어렵다. 롤즈는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다양한 문화양식의 조화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롤즈는 탈냉전의 세계화시대에 와서도 또다시 새로운 정치철학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김주성 / 한국교원대·일반사회교육

필자는 텍사스주립대(오스틴)에서 ‘자유주의의 가치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대사회와 정의>(공저)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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