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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자유주의자
두 얼굴의 자유주의자
  • 교수신문
  • 승인 2007.04.16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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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과 자율 (4) 자유사상 변천사-하이에크의 <법, 입법, 그리고 자유>

교수신문은 자유사상이 어떠한 역사적 맥락을 갖고 흘러왔는지 고전을 통해 살펴봄으로써 근대사상의 핵심 을 조명하고자 한다. 이번 기획은 ‘대학과 자율’이라는 문제를 좀더 본질적으로 바라보기 위한 시도다.  전문 필자들로부터 자유사상 변천사에 굵직한 발자욱을 남긴 저서들을 들여다봤다. / 편집자주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 1899-1992)는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지만 경제학자로서의 그의 명성은 그리 높지 못했다.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경제학자라기보다 정치철학자로 더 기억한다. 그래서 1944년에 나온 <노예에로의 길>을 그의 대표작으로 꼽는다. 사회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그의 학문적 열정을 잘 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고전적 자유주의를 현대의 문제의식에 맞게 재정립한 <자유헌정론>과 <법, 입법, 그리고 자유>(3부작)가 더 관심을 끈다. 이런 일련의 저작을 통해 하이에크는 고전적 자유주의가 결코 흘러간 과거의 사상이 아니라 지금 이 시점에서 전면 부활되어야 할 사회체계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아니라 시장과 자생적 질서에 의해 우리 삶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하이에크에 의하면, 문화라는 것은 전적으로 자연적인 것도, 그렇다고 인간의 이성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며 ‘학습된 행동규칙’인 전통의 산물이다. 언어나 도덕과 같은 문명의 기본도구도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지 인간이 창조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이런 전제에서 인간이 문화를 창조한다는 통설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인간이 결코 자기 운명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면서 ‘인간 이성 한계론’을 편다. 하이에크는 한 마디로 ‘인식론적 비관주의자’였다.

따라서 그로서는 시장을 없애고 계획을 통해 사회주의의 이상을 달성하겠다는 발상에 대해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 시장이 자연스럽게 잘 작동할 수 있게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는 경제에는 ‘제3의 길’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시장 기능 아니면 중앙의 계획에 따라 통제하는 방식 둘 중 하나가 존재할 뿐 이 두 원칙은 결코 서로 조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을 섞어 버리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하이에크는 현대 민주주의에 대해 걱정이 많다. 그는 법치주의의 쇠퇴로 민주주의의 기본전제조건인 권력분립이 유명무실해진 것을 무엇보다 심각하게 생각한다. 하이에크는 다수지배마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현대 민주주의가 다수파 유지에 관건이 되는 수많은 이익집단들에 끌려 다니다보니 자유사회를 지탱해주는 기둥이라고 할 보편적 규칙, 즉 법의 지배마저 흔들린다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결국 민주주의는 아무도 원치 않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면서 권력분립에 입각한 제한 민주주의의 회복을 주창한다. 

하이에크는 ‘각 개인이 다른 사람의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의의 원칙에 입각해서 자기 스스로 내린 결정에 따라 행동’하는 개인 자유의 원칙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 각자의 영역에서 자기 목적을 위해 스스로의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을 때 자유사회가 존립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날 이런 의미의 자유가 사라지고 있음을 심히 걱정한다. 그러나 그가 ‘자유의 실패’에 대해 낙담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비관론에 빠지지는 않는다. 자유가 비현실적인 이상이라기보다 우리가 그 자유를 잘못 사용하는 것이 문제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흔히 국가 중립성을 자유주의의 근본 명제로 간주한다. 어떤 삶이 좋은지를 둘러싸고 국가가 특정 관념을 선호하거나 이를 시민들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서 하이에크는 독특한 입장을 취한다. ‘최소국가론’을 주장하는 노직(Robert Nozick)과는 달리, 국가가 최소한의 복지 정책을 펼 여지를 남겨두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하이에크 자유주의의 실체에 대해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한편으로는 사회개혁을 위한 인간의 노력과 의지를 평가절하 한다. 이성만능주의를 전면 거부한다. 그런 한편, 그 자신도 철학적 평가와 처방을 마다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노예에로의 길>에서도 ‘경쟁을 촉진하기 위한 계획’은 수용하고 있다. 그래서 ‘이상주의자이면서도 국가 개입을 거부’(Utopian non-engineering)하고 ‘회의주의자이면서도 인간이 지향해야 할 특정 가치를 염두에 두고 있는 자유주의자’(principled sceptic)라고 하는 이율배반과 자기모순이 하이에크 자유주의를 어지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서병훈 / 숭실대·정치외교학

필자는 라이스대에서 ‘정치구조와 정치행위자’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자유론> 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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