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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연구자의 궁극 목표는 사상가
철학연구자의 궁극 목표는 사상가
  • 교수신문
  • 승인 2007.04.16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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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변 : 장현근 교수의 <주자학의 길> 서평에 대해

장현근 교수(이하 평자)께서 졸저를 ‘깊이 읽기’의 대상으로 선정하여, 자세히 소개하고 논평해 주신 것에 대해 먼저 감사드린다. 이 글은 졸저의 취지를 소개하고, 평자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저자의 입장’을 밝히는 글이다.

<주자학의 길>은 다음과 같은 주제로 이루어졌다. 주자의 문제의식과 그 해결책은 무엇인가, 그 해결책이 함축하는 실천적 의미는 무엇인가, 주자학에 대한 비판들은 과연 얼마나 타당한가, 주자의 철학정신은 오늘날에도 유효한가.

필자는 이 책에서 주자학의 이론적 틀을 ‘理氣相互主宰論’으로 정리하고, 그것이 함축하는 실천적 의미를 해명하는 데 주력했다.

주자학에 입각해 현대의 방향성 제시

평자는 “철학 연구자들이 학문생활을 하며 자칫 범하기 쉬운 사상가로서 자기 자신의 정초” 때문에 이 책이 ‘현실적 대안’에 집착한 것 같다면서, 그것은 ‘과욕’이라고 했다. 필자는 이 책의 12장에서 찰스 테일러, 강정인, 이명현, 박세일 등 오늘날 학자들의 문제의식을 소개하고, 주자의 문제의식도 바로 그것이었다고 했다. 다시 말해 이 책은 대안 모색의 방향만 살짝 언급하고, 실제의 대안 제시가 없이 마무리된 것이다. 필자는 이 점을 못내 아쉽게 느꼈다. 그런데 평자는 ‘대안에 집착했다’고 보니, 오히려 민망할 뿐이다.

필자가 대안의 제시 없이 책을 마무리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여기서부터는 ‘주자학의 길’이 아니라 ‘이상익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는 다만 주자학에 입각해 오늘날의 대안을 모색한다면 어떤 방향에서 접근할 수 있겠는가 하는 방향성만 살짝 제시한 것이다. 둘째는 사실 필자의 능력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현대도 제대로 모르고, 주자도 제대로 모르는 처지에 어설프게 현대의 문제점을 거론하면서 대안이라는 것을 제시한다면, 사람들의 웃음꺼리만 될 것이다.

필자는 철학연구자이다. 그런데 철학을 연구하는 목적은 先哲의 말씀을 해설함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삶의 지표를 찾기 위한 것이다. 또 능력이 되어 사회적 대안까지도 모색할 수 있다면 그 길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필자가 철학을 연구하는 궁극적 목적은 사상가가 되기 위한 것이다.

정치의 이상과 현실, 공리주의

평자는 “아무리 긍정하려 해도 저자의 주장이 가슴을 파고들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동의를 하려고 해도 끝내 현실적 대안이나 문명의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음은 오늘날이 너무 功利주의적이라서일까. 공리도 공적인 것이 있고 사적인 것이 있지 않는가. 이런 회의를 하는 독자가 잘못된 것인가”라는 ‘답답함’을 토로하면서, 정치의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라고 주문하였다.

필자도 늘 이상과 현실을 혼동하지 않으려고 유의한다. 그런데 이런 주문을 받고 보니, 문득 이것이야말로 공리주의적 접근법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에 공리주의에 대한 필자의 입장을 밝혀야만 하겠다. ‘공리’와 ‘공리주의’는 혼동될 수 없다. 사적인 것이든 공적인 것이든 공리는 소중한 것이다. 문제는 공리주의다. 공리주의는 ‘공리’를 가치평가의 척도로 삼고 ‘옳음’을 고려하지 않는 바, 이는 공적인 공리를 위한 것이라도 용납되기 어렵다. 또한 이상과 현실의 관계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말들이 쏟아질 수 있는데, 필자는 다음과 같은 점만을 말해두고자 한다. 이상을 비현실적이라고 하여 외면한다면 현실은 타락한다. 늘 이상을 지침으로 삼고 현실을 그에 접근시키려고 해야만 현실이 개선될 수 있다.

人心道心論과 롤즈의 정의론

평자는 “원전에 매몰되어 당대의 같은 분야 전공자들 저술을 경시하는 한국의 동양학자들은 왕왕 역설적으로 서양의 다른 저술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기존 성리학의 성과만으로도 충분한 설명이 가능한 人心道心론을 굳이 롤즈의 정의론을 끌어들여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하면서 ‘오리엔탈리즘’을 경계했다. 이 대목은 평자의 오해가 있는 것 같다.

필자는 이 책의 246쪽에서 “인심도심론은 본래 ‘정치적 실천의 차원’에서 제기된 논제였다. 그런데 오늘날의 학자들은 인심도심론을 대개 심성론적 주제로 논의하는 데 그치고 있다. 한편, 롤즈의 ‘정의론’은 주자의 인심도심론이 지니는 실천적 의미를 이해함에 있어서 큰 시사점을 제공한다”라는 말로 인심도심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요컨대, 오늘날 학자들은 인심도심론을 정치철학의 명제로 읽지 못하고 있으며, 롤즈는 인심도심론을 이해하는 데 큰 시사점을 주기에 롤즈를 인용해서 논의한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은 필자 역시 경계하는 바이다. 또 필자는 그동안의 저술과정에서 너무 국내 학계의 성과에만 의존하고 외국 학계의 성과를 적절히 반영하지 못하는 점을 늘 아쉽게 생각해 왔었다.

官學의 생명력

평자는 “주자학이 마침내 官學으로 죽은 학문이 된 데 대한 비판적 성찰”을 주문했다. 필자는 관학이 쉽게 생명력을 잃는 까닭은 ‘부자가 3대 못가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부자가 되면 안일과 방탕에 빠지기 쉽고, 그 결과 망하는 것이다. 후손들이 부를 지키지 못했다고 하여 자수성가한 조상을 탓할 수는 없다. 관학화된 시점에서는 이미 주자의 절실했던 문제의식은 망각되고, 章句를 외워 과거에 합격하는 것에만 관심을 쏟게 되니, 어찌 학문으로서의 생명력을 이어나가겠는가. 그리하여 당시에도 뜻있는 주자학자들은 과거에만 의지하는 인재선발 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했던 것이다.

평자는 이 책에는 ‘어려운 옛날 말’이 많음을 지적하고, ‘쉬운 요즘 말’로 풀어야 ‘우리들의’ 철학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지당한 말씀이다. 그런데 책을 쉽게 쓴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다만, 독자층을 어떻게 설정하느냐 하는 것이 서술의 난이도를 결정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이 책은 대학원생 정도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목표로 설정한 것이다. ‘저자의 변’이 평자나 독자들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을지 궁금하다. 다시 한 번 평자께 감사드리며 마치고자 한다.

이상익 / 영산대·동양철학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韓末 節義學派와 開化派의 사상적 특성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기호성리학논고>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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