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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실용경제서 저술한 진보적 여성
한글 실용경제서 저술한 진보적 여성
  • 교수신문
  • 승인 2001.09.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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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가꾼 사람들 : 조선조 여성 실학자 빙허각 李氏
정해은`/`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국학팀 연구원

아직 일반인에게 빙허각은 낯설다. ‘임원경제지’를 지은 서유구의 형수라고 하면 더 빨리 인식될 수 있을까. 빙허각은 실학사상에 입각해 ‘閨閤叢書’라는 저서를 남긴 여성이다. ‘규합총서’의 ‘규합’은 여자가 머무는 거처나 여자 자체를 의미하므로 ‘규합총서’를 요즘말로 바꾸면 ‘가정학총서’가 된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의식주에 대한 학문적 탐구는 여성이기 때문에 갖는 관심이었다기보다는 공리공담의 성리학을 비판하고 실용적 학문을 추구한 ‘실학’의 탐구 대상이었다. ‘지봉유설’ ‘산림경제’ ‘임원경제지’ ‘오주연문장전산고’ 등의 실학서에 조리는 물론 가정 생활과 밀접한 내용이 상당수 수록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빙허각은 어느 날 돌연변이처럼 조선후기 사회에 불쑥 나타난 존재가 아니다. 빙허각이 살던 18세기 후반은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의 확산으로 여성에 대한 여러 가지 제약이 심화되어 한국 역사상 여성의 지위가 가장 낮았던 시기로 평가된다. 반면 여성 입장에서는 경제 활동의 참여가 높아지고 자의식이 고양되어 가면서 글읽기나 글쓰기를 통해 對사회적 발언을 키워나간 시기이기도 하다. 빙허각의 존재는 바로 이러한 시대의 산물이며, 저서 ‘규합총서’는 자신이 처한 사회와 적극적인 대화를 통해 얻어낸 결과물이었다.

빙허각의 학문적 성취에 있어서 남편과 시집의 학풍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빙허각은 나이 15세에 3살 연하의 서유본(1762∼1822)과 혼인한다. 서유본 집안의 학풍은 박지원·박제가·이덕무 등 北學派와 교유했으며, 특히 器用·금석·물·불·별·달·해·초목·금수 등 같은 객관적 사물을 탐구하는 ‘博物’ 즉 名物學에 특장을 보였다. 그 일환으로 농학에 관한 연구 성과를 내놓았다. 서유본의 할아버지 서명응의 ‘攷事新書’나 아버지 서호수의 ‘海東農書’, 동생 서유구의 ‘임원경제지’가 그 예이다.

한편, 남편 서유본은 관직 운이 없었던지 평생 재야 생활을 하였다. 생원시에 합격한 후 大科에 응시했지만 낙방의 연속이었다. 43세 때의 동몽교관이 그의 유일한 벼슬이었다. 더군다나 1806년 숙부 서형수가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 길에 오르면서 집안은 한꺼번에 몰락했다. 당시 홍문관 부제학이던 동생 서유구도 향리에 유폐되었다. 이 때 빙허각의 나이 47세로서, 거처를 향리로 옮긴 빙허각은 차밭을 경영하면서 생계를 거의 혼자 힘으로 꾸려나갔다.

1809년(나이 51세)에 완성된 ‘규합총서’는 이 당시의 생활 체험과 무관하지 않다.

서유본은 평상시 문 밖 출입은 별로 하지 않고 독서에만 몰두한 편이었다. 이 때문에 아내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빙허각과는 경서를 논하고 시를 주고받으며 知友같은 사이로 지냈다. 빙허각은 이 시절에 대해 ‘규합총서’ 서문에서 ‘내가 삼호 행정에 집을 정하고 집안일 하는 틈틈이 남편이 있는 곳[사랑]에 나가서 옛 글 가운데 일상생활에 절실한 것과 산야에 묻힌 모든 글을 구해보고 오직 문견을 넓히고 적적함을 위로하였다.’ 라고 회고하였다. 서유본의 재야 생활은 본인에게는 불행일 수도 있지만 빙허각에게는 자신의 학문을 넓힐 수 있는 튼튼한 받침목을 갖는 환경이 되었다. ‘규합총서’라는 책이름도 서유본이 붙여주었다.

‘규합총서’는 술·음식만들기(酒食議), 옷만들기·물들이기·길쌈하기·수놓기·누에치기(縫 則), 밭일·꽃심기·가축기르기(山家樂), 태교·육아법·응급처치법(靑囊訣), 방향선택·길흉·부적·귀신쫓는법·재난방지법(術數略) 등 다섯 편으로 구성되었다. 서술 체재는 17세기 이후 실학자들의 학문 방법을 계승해 고증학적으로 서술하였다. 아울러 중국 문물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담고있다. 또한 남성들에 의해 한문으로 쓰여진 방대한 지식을 알기 쉽게 한글로 서술하였다. 그 결과 ‘규합총서’는 19세기 후반 조리서 가운데 여성들에게 가장 널리 필사되어 읽혀졌다.

그리고 그의 여성관은 전통적인 열녀관에서 탈피해 효부나 절부 이외에 충의·지식·의기·문장·재예·글씨 잘 쓰는 부인·남자소임을 한 여자·여장군 등 학문과 재능에 뛰어난 인물을 비중 있게 소개하는 진보적인 성향을 보여주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빙허각은 조선후기 여성사에서는 단연 독보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빙허각의 ‘규합총서’가 여성의 생활경제서로써 활용되었다 하여 그의 사상마저도 가정학으로 한정해 이해하려는 경향은 빙허각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규합총서’에 실린 음식과 의복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소위 백과전서로 불리는 각종 실학서에 더 상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자는 경제치용의 실학사상으로 이해하면서 빙허각의 학문은 ‘가정학’으로 따로 분류하려는 경향은 공평하지 못하다.

따라서 빙허각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복원은 그를 18세기 후반의 실학 사상사에서 정당하게 자리매김할 때 가능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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