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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론영역 생명은 개방적 합리성
공론영역 생명은 개방적 합리성
  • 교수신문
  • 승인 2001.09.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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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 : 말과 권력, 담론의 윤리
이진우 / 계명대·철학

공론영역은 사람들이 말 그대로 ‘함께’ 사는 곳이면 어디서나 존재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다양한 신념, 가치 및 교리들의 공존을 의미하기 때문에 자유로운 말과 행위의 가능성은 공론영역의 필수조건이다.

간단히 말해, 공론영역은 사람들이 극단적으로 분열되어 흩어지면 사라지며 자유로운 말과 행위가 없어져도 사라진다. 언론의 자유가 민주주의의 토대로서 다양한 정부형태 및 사회체제에 선행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언론개혁으로 촉발된 지식인 논쟁은 언뜻 추상적인 것처럼 들리는 이 말의 의미를 도드라지게 만든다. 우리 사회가 더욱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건강한 공론영역의 건설이 시급하다는 인식이 점점 더 힘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를 축소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확장하기 위해서” 개혁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김진석 교수의 주장이 그렇고, “말이 오가는 공론의 광장”을 건설하려면 우선 “사회 각 분야에서 말문을 트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홍윤기 교수의 제안이 그렇고, 민주주의의 건강한 작동을 위해서는 “격렬한 갈등과 대립도 필수적이라는” 윤평중 교수의 인식이 그렇다.

지식인들의 百家爭鳴이 민주주의의 생산적 화음이 되려면 다원성을 생명으로 하는 공론영역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조선일보에 글을 쓴 이유

내가 조선일보의 기획 시리즈 “위기의 지식인 사회”를 여는 첫 글을 쓰게된 동기도 이런 인식에 기초한다. 극단적 편가르기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토론을 가로막음으로써 공론영역을 파괴한다는 것이 그 글의 핵심이었다. 이 주장에 대해서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추상적 일반론”이라고 비판하는 것을 보면, 문제는 현실인식의 차이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에 대한 비판은 대체로 세 가지로 모아진다.
첫째, 논점이탈의 오류. 언론개혁 문제가 결코 위기의 지식인 사회의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의 글은 사회적 의제를 지식인 논쟁으로 전환시키는 데 일조하였다는 것이다. 구체적이고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결코 언론개혁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지만 언론사 세무조사를 추진한 현정권의 동기와 방식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전자를 우위에 둘 수도 후자에 우선성을 부여할 수도 있다. 나는 권력과 언론이 충돌할 경우 체제의 ‘정당성’과 관련된 언론의 자유가 조세의 합법성 문제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언론개혁을 둘러싼 지식인들의 ‘말’이다. 공론영역에서는 개혁의 동기, 방법 및 정당성에 관한 의견들이 자유롭게 오고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언론개혁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면 ‘반개혁’이라는 낙인을 찍고 지식인의 자격마저 박탈하려는 ‘분위기’가 우리사회에 팽배해 있다. 자신의 입장이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의 동의를 받을 수 있도록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기보다는 ‘우리 아닌 그들’을 부정적 형용사로 덧칠함으로써 ‘우리’를 부각시킨다면, 이것이 공론영역을 해치는 편가르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異論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차이에 민감한 보편주의’가 지식인의 생명이라면, 언론개혁은 지식인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뚜렷하지 않은 수구와 개혁의 경계선

둘째, 수구 기득권 세력에 ‘이용당할‘ 수 있다는 비판. 나의 인식이 설령 옳다고 하더라도 현정권과 헤게모니 싸움을 벌이고 있는 보수신문에 게재되면, 수구세력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상징조작과 전략적 담론에 이용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식인이 ‘상징’을 조작함으로써 ‘권력’을 생산하거나 행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지극히 회의적일 뿐만 아니라, 수구세력과 개혁세력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을 긋는 것이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매체에 언제 어떤 글을 써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는 비판적 지식인들은 오히려 ‘우리’와 ‘그들’의 대립을 통한 왜곡된 공동행위가 공론영역을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끝으로, 편가르기가 오히려 공론영역의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주장. 나는 “다소 소란스럽고 어지러운 것은 건전한 민주주의가 양보할 수 없는 특질 중의 하나”라는 인식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나의 비판은 갈등과 대립 자체보다는 갈등과 대립을 합리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문화적 풍토의 부재를 겨냥하였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이성적 신념, 가치, 교리들로 심각히 분열되어 있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어떻게 정의로운 사회를 형성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 핵심적 문제이다.

차이와 다양성이 적대적 폭력으로 이어지기보다는 건강한 다원주의 사회의 토대가 되려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담론의 윤리이다. 그것은 우선 자신만이 옳다는 독단론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도 옳을 수 있다는 관용의 태도를 취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대립과 갈등을 공론영역의 생산적 밑거름으로 “적절히 조율할” 수 있는 것은 공격적 담론이 아니라 오직 개방적 합리성뿐이다. 차이를 인정하는 ‘담론의 윤리’가 상대방의 인격을 훼손하지 않는 합당한 방식으로 실행될 때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말’이 오고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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