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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은 多者들이 만들어 내는 몸의 현상 … “항생제가 의료위기 불러”
질병은 多者들이 만들어 내는 몸의 현상 … “항생제가 의료위기 불러”
  • 최익현 기자
  • 승인 2001.09.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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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9-25 16:08:23
 
지난 13일 서울대 박물관 강당에서 열린 서울대 기초과학연구원 과학문화연구센터(센터장 김영식 교수) 설립기념 ‘과학문화 강연회’. 전북대 과학문화센터, 포항공과대 과학문화센터등 동·서부권 과학문화센터 주자들이 후원한 자리였다. 의미있는 강연회였다. ‘과학문화’에 관한 관심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엮어지기 시작한 가운데 마련했기 때문.

이날 강연회는 김상득 전북대 교수(철학)가 ‘배아 복제의 도덕적 허용 가능성에 대한 찬반토론’을, 김기윤 서울대 과학문화센터연구원이 ‘생태학의 역사: 그 과학적, 문화적 배경’을, 그리고 조용현 인제대 교수(철학)가 ‘대결의 의학에서 사귐의 의학으로’를, 문중양 전북대 초빙교수(과학사)가 ‘조선후기 과학기술의 변화와 성격’, 김근배 전북대 교수(과학학)가 ‘한국의 과학기술자와 과학 아카이브’를 각각 발표했다.

이 가운데 조용현 인제대 교수(사진)의 ‘대결의 의학에서 사귐의 의학으로: 진화론적 관점에서 본 질병의 의미’는 ‘과학과 문화’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발제로 평가해도 무방할 듯하다.

조 교수의 논지를 따라가보자. 질병이란 무엇일까. 예컨대 암이나 결핵처럼 발견 즉시 그것은 치유돼야 할 대상인가. 그것은 무엇인가. 내 속에 있으면서도 나를 해치는, 나를 죽이는 그것은 ‘죽여야’ 하는 대상일 뿐인가. 대체로 이런 질문이 전제된 듯하다.

‘질병은 새로운 진화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는 조교수의 명제는 신선한 사유의 틀을 제공한다.

근대 기계론의 철학 이후 생물학과 의학은 대체로 ‘기계의 모델’에 의거해서 생명체를 보아왔다. 우리의 관심사는 ‘질병’을 보는 눈이다. a의 모델에 의하면 질병은 몸에 발생하는 고장이고 그것은 어떤 경우이든 제거해야할 ‘악’이다. ‘생명의 모델’에 의하면 질병은 多者들이 만들어내는 어떤 상태다. 전자에 의하면 질병은 一者 속에 다른 일자의 침입이라는 예외적 현상이지만 후자에 의하면 그것 자체가 생명의 본래의 모습이다. 말하자면 질병은 생명이 근거하고 있는 삶의 양상이다. 아니 질병 자체가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질병이란 바로 다자들의 관계맺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교수의 문제틀에서 중요한 것은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가 제시한 이른바 ‘내공생’(endosymbiosis). 이것은 自己와 비자기의 구분이 무의미하게 된, 하나가 돼버린, 철저한 다자간 합병을 말한다. 이제는 공인된 학설이 된, 린 마굴리스의 가설은 이렇다. 1960년대 후반 그는 ‘진핵세포의 기원’이라는 책을 통해 진핵세포는 한 원핵세포 박테리아 내에 다른 원핵세포 박테리아의 기생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자기와 비자기의 구분을 넘어

린 마굴리스의 가설은 흥미로웠다. 진핵세포는 태고에 일어났던 원핵세포들의 합종과 연횡의 산물이며 우리 몸 속에 그 태고사가 각인돼 있다. 진핵세포의 핵은 핵막에 둘러싸여 있다. 그 막은 태고의 전쟁의 치열했던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침입자에 대항해서 자신을 지키려고 둘러친 목책이다. 이제 그 전투를 끝났지만 이 침입자에게 이 핵 안은 여전히 출입 금지구역이다. 그리고 이제 기생물체 a는 순치돼 세포 내 부속기관 외의 다른 것으로 보이지 않아 그 원형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숙주세포와 독립적인 유전기구와 단백질 합성기구를 갖고 있다는 점, 그리고 숙주세포에게는 사라진 이분법적 체세포분열을 통해서 증식한다는 점 등이 그것이 태고엔 별도의 독립개체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기생 원핵세포 a는 누구인가. 세포 내의 에너지 발전기관인 미토콘드리아와 에너지 합성기관인 엽록체가 그 주인공이다. 그것들은 태초에 숙주세포로 침투해 들어온 말하자면 병원성 박테리아였다. 그러나 이제 이것들 없이는 숙주세포는 생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이 기생성 박테리아들도 세포환경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살아갈 능력을 상실했다. 여기에 이르면 이제 자기와 비자기의 구분이 무의미하게 된다.

자기와 비자기의 구분은 우리의 면역계 내에서 정교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자기와 비자기의 구분이 그렇게 분명한 것은 아니다. 자기를 비자기로, 비자기를 자기로 착각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자와 같은 착각이 일어나면 암세포가 창궐하게 된다. 그러나 후자의 착각도 흔하며 사실 불치병의 대부분은 이러한 유의 것이다. 예컨대 당뇨가 그렇고 류마티스성 관절염이 그렇다. 특정 음식에 대해서 면역계가 반응하는 경우도 있다.

“데카르트의 철학과 화엄철학을 비교하다 세계를 보는 눈이 이렇게 적나라하게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새삼 놀랐다”고 조교수는 말한다. 왜 그런가. 실체는 연장성(extension)을 가지며 이 연장성으로 해서 불가입성(impenetration)을 갖는다. 이것이 데카르트의 기계론의 철학을 성립시키는 기본 축이다. 반면 화엄의 존재론의 기본 축은 상입(interpenetration)이다. 모든 만상은 동시에 발생하고 발현하며(同時頓起), 각각이 서로에 침투해 들어가 있으며(同時互入), 타자를 자신 속에 포섭하고 있다(同時互攝). 상호불가입성에 기초한 데카르트의 질병관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되는 일. 이것이 바로 영화 ‘에일리언’(Aliens)의 시고니 위버의 정신이며 그것의 가공할 무기는 항생제이다.

데카르트와 화엄철학 비교

항생제는 한편으로 우리 몸의 생태계를 붕괴시키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독성의 병원균을 진화시켜주는 결과를 야기하고 있다. 농약 남용이 더 저항성 강한 잡초를 진화시켜온 아이러니한 결과를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다. 농약이 독초를 선택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 현상은 항생제에서도 똑같이 재현된다.

오늘날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항생제의 약제내성이 그것이다. 더 큰 문제가 남아 있다. 그것은 우리의 몸과 장내 균총 간의 장구한 시간에 걸친 타협이 무너져버렸다는 것이다. 항생제의 위기에 직면한 장내 균총들은 침입박테리아들로부터 저항성 플라스미드를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 독성을 획득해가고 있다. O-157 대장균과 같은 것이 대표적 사례다.

항생제는 왜 문제가 되는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지나치게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데모를 단기간에 진압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탱크를 동원해서 시위군중을 향해 발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반면 효과나 약발 면에서 훨씬 떨어지는 최루탄을 사용한다. 왜 그럴까. 무기가 치명적이면 치명적일수록 거기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 생사를 건 싸움으로 돌입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문제를 푸는 방법이 아니고 더 복잡하게 꼬이게 하는 방법이다.

에이즈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더 강력한 약제의 개발이 아니고 콘돔을 사용하는 것이다. 말라리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인체에 이미 들어와 있는 말라리아 자체를 죽이는 약제의 개발은 과잉진압이 돼 우리의 면역계가 우리를 공격하는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보다는 경로를 차단함으로써 말라리아를 순치시키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모기가 서식하는 웅덩이를 메우고, 방충망을 치는 방법 같은 것 말이다. 이 방법은 에이즈 자체를 괴멸시키려 하거나 말라리아 자체를 괴멸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도 삶의 일부이다. 그것과 공존의 낮은 목책을 세우는 것 그것이다. 이것은 우리 몸의 진화의 과정이 그러했고 우리의 면역계가 그렇다.

그렇다면, 조교수는 궁극적으로 어떤 질문을 던지려 하는가. 그의 질문은 ‘몸을 생태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요약돼 있다. 서양의학의 몸 기계적 사고방식은 질병은 근절시킬 대상으로 받아들여 왔다. 감히 암의 정복 등 ‘정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암은 분명히 치명적 질병이지만 그것 또한 자연의 일부이다. 생물체가 복잡화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생겨나는 진화의 음영이다. 그것은 다스림의 대상일 뿐 근절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을 근절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결국 자신의 괴멸을 가져올 뿐이라는 것을 오늘날의 항생제로 인한 의료위기가 잘 보여주고 있다.

플로어에 있던 한 교수가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질병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인가. 혹시 이런 사유가 서양-동양이라는 대결구도에서 나왔다면. 데카르트가 서양의학의 본래 모습은 아니잖은가. 새로운 생각과 시각은 지난한 논쟁의 지평 위에서 싹틀 수밖에 없다. 이점에서 ‘과학문화 강연회’는 이제 막 첫 단추를 꿰기 시작했을 뿐이다.
최익현 기자 ihchoi@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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