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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지원금 좇다 궁지에 내몰린 인문학
외부 지원금 좇다 궁지에 내몰린 인문학
  • 교수신문
  • 승인 2007.04.07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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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동향 : 위기에 처한 독일 대학들

최근 독일의 대학교수들 사이에서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정부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일련의 대학 개혁 정책들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천5백여개의 대학 교수직을 축소시키고 2004년 말부터 도입된 ‘강의 전담 교수제’(Lehr-Professur)이다. 교수들이 보통 일주일에 8~9시간의 강의를 하고 나머지 시간을 자신의 연구 활동에 투자한다면, ‘강의 전담 교수’는 일주일에 12시간의 강의를 하고 연구 활동에 대한 평가를 면제받게 된다. 이 제도는 ‘연구와 강의의 통일성’이라는 훔볼트의 대학 이념 전통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으로, 교수들은 연구 활동을 통해 갱신되지 않은 강의는 교육의 질적 저하를 초래한다고 지적한다. 한 시사 일간지가 ‘강의 전담 교수들’을 ‘강의 노예들’로 표현한데서 알 수 있듯이, 강의보다는 연구 활동에 중요성을 부여해온 교수 사회 내에서 이들의 존재는 자칫 교수들 간의 반목과 갈등을 초래할 소지가 있다. 올해 3월 브레멘에서 열린 ‘독일 교수 협회’(Deutscher Hochschulverband, DHV) 연례 회의에서 회장직을 맡고 있는 베른하르트 켐펜 교수는 이러한 교육 정책이 지속될 경우 독일의 대학은 곧 파산선고를 하게 될 것이라며 현 정부의 교육 정책을 강도 높게 성토했다.

‘괴팅엔 학파’ 무력화 조건, 지원금 약속도

독일의 대학들은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대학을 만들기 위해서 정부에만 의존해왔던 대학의 재정을 다원화하고, 각 대학별로 특정 분야를 중점 육성하는 정책을 취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독일 대학들의 전통적 풍경들을 심하게 바꾸어놓고 있다. 강의와 연구 내용의 질에 의해서만 평가되던 대학은 ‘슈피겔지’나 ‘포커스지’에 수시로 발표되는 대학의 랭킹, 외부 지원금의 양, 졸업생 수 등에 따라 서열화 되고 있다.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자치 행정 기구’로서 대학은 보다 엄격하게 조직화되고 외부 사정 기관에 의해 통제되는 일종의 ‘기업체’로 변화되는 경향마저 보여주고 있다. 2005년에 발생한 괴팅엔 대학 사태는 외부 지원금에 의해 대학의 자율성이 어떻게 왜곡되고 잠식되고 있는 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2005년 괴팅엔 대학의 총장인 쿠어트 폰 피구라 교수는 ‘발전 가능성이 없는’ 정치학과를 축소시키고 사회학과 중심의 대학을 육성하겠다고 공표했다. 그는 능력도 없으면서 방송매체에나 빈번하게 출현하는 괴팅엔 대학의 정치학과 교수들은 ‘신문 문예란 수준의 글이나 쓰는 정치학자들’에 불과하다며 나치의 은어까지 사용하며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이 문제는 곧 사회적 스캔들로까지 비화되고 말았다. 총장의 발언은 사회적 금기를 위반했을 뿐만 아니라 소위 ‘괴팅엔 학파’로 불리고 있는 정치학과의 학문적 능력을 곡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괴팅엔의 정치학과는 독일의 정당연구 분야에서 이미 탁월한 연구 성과를 거두고 있었고, 2004년 3월에 시행된 니더작센주 학술 위원회의 평가에서도 국제적 경쟁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된 바 있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니더작센주의 주지사인 크리스티안 불프가 자신의 정치노선과 대립관계에 있던 ‘괴팅엔 학파’를 무력화시키는 것을 조건으로 총장에게 막대한 지원금을 약속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만하임대, “철학부 줄이고 경제학·사회학 키울 것”

대학의 약점은 축소시키고 장점은 강화시키자는 이와 같은 정책은 다른 강점들을 집단적으로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우려를 낳고 있다. 최근 만하임 대학에서는 총장의 주도로 영문과, 독문과, 슬라브어과, 로만어과, 철학과 등이 속한 철학부를 희생하는 대신 경제학과 사회학 중심의 대학 운영 계획이 발표된 바 있다. 그러나 대학의 국제적 경쟁력이 학부들 간의 치열한 경쟁과 논쟁을 통해서도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이와 같은 결정에 대해 수많은 교수들은 의문과 우려를 표명하며, 일면화된 교육 내용만을 가지고는 결코 세계를 선도하는 인재를 육성할 수 없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철학과 교수인 마틴 젤은 “뛰어날 정도로 외부 지원금을 잘 마련하는 교수가 생산적인 연구자인 경우는 드물다”며 외부 지원금이라는 물신만 쫓고 있는 세태를 비난한다. 그는 또한 연구 지원금을 타기 위해 공동연구나 학제적 연구를 강요하는 경향에 대해서도 “조직화된 창조성은 창조성이 아니다”며 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프랑프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편집장인 위르겐 카우베 역시 ‘인문과학의 현상황’을 점검하는 글에서 자본의 논리가 바람직한 연구 태도마저 왜곡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최근의 인문학은 특정한 현상을 문제로 지각하고 이를 연구하기 위해 연구비를 지원받는 대신 돈이 될 만한 테마들만을 찾고 있다고 비판한다.

“진리탐구·학생에 대한 관심 부족이 문제”

대학 문화의 파괴 현상을 위기로 진단하고 대안을 찾기 위한 시도들 역시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만하임대 독문과 교수인 요헨 회리쉬는 현재의 독일 대학들이 ‘형식화’, ‘규율화’, ‘탈에로스화’ 되었기 때문에 ‘사랑받지 못하는 대학’이 되었다고 진단한다.(‘사랑받지 못하는 대학, 2006) 수많은 교수들이 현재 독일 대학의 위기가 부족한 재정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반면에, 그는 학자들의 진리 탐구에 대한 열정 부족과 학생들에 대한 관심 부족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빈 대학의 철학과 교수인 콘라드 파울 리스만 역시 ‘진리 탐구에 대한 근원적인 호기심과 즐거움’을 되찾게 될 때 대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탈출구를 발견하게 된다고 보고 있다.(무교양의 이론, 2006)

물론 이들이 제시하고 있는 해결책이 현 상황에 부합하는 정답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학 교육이 추구해야할 근본적인 이념들과 가치들을 재인식시켜주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이들의 견해는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영범 /독일통신원·만하임 대학교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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