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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식민적 근대성’에 대한 문화주의적 환기
또 다른 ‘식민적 근대성’에 대한 문화주의적 환기
  • 교수신문
  • 승인 2007.04.02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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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중반 포스트모더니즘이 탈근대론을, 그리고 거의 동시에 들어 온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을 통해 탈식민화의 문제틀을 화두처럼 받아든 사람들은 ‘근대’를 말하기 위해서는 식민화의 역사를 사고하고 의문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적어도 그 이전까지 한국에서 근대는 발전주의(개발주의)와 결합되어 산업화 및 경제발전과 동의어로 협애화된 채 통용되었고 식민의 역사는 또 그것대로 수탈과 저항을 키워드로 한 일제 식민지배론으로 충분히 설명된 것으로 치부되었다. 근대화 시기와 식민시기는 암묵적이지만 서로 다른 경로이거나 다른 차원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 맹아론과 내재적 발전론도 식민화를 자생적 근대화 과정을 절단한 외부 요인으로 규정하였지 식민화와 근대화를 중첩적으로 연관 지은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탈근대와 탈식민화론의 동시적 유입이 식민화와 근대를 동시에 고민하는 인식의 전환을 이룬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에서 주목할 점은 근대 개념의 내연과 외연의 확장도 동시에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근대화론은 60년대 이래의 협애한 발전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물질문명의 차원에서 그리고 그에 수반하는 사회문화변동 전체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확장되었고 포스트모더니즘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급부상한 푸코의 저작들을 전범삼아 근대의 기원이 아닌 근대의 시작 국면을 계보학적으로 탐색하는 연구자들이 급부상하였다.

그리고 필연적이지만 19세기 말과 20세기 전반기를 문제적 시기로, 즉 근대의 시작지점으로 탐문하는 역사의 여정도 확정되었다. 사실 이 시기를 근대화의 시작 단계로 규정하는 논의의 시작은 부르스 커밍스가 <Korea’s place in the Sun>(1997)에서 개발식민주의, ‘developmental colonialism’라는 개념을 통해 일제하를 식민적 착취와 60년대 근대화의 기초를 닦은 시기로 규정하면서 점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19세기말-20세기 전반기는 식민화, 근대화, 그리고 놓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역사적 경로, 즉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자본주의적 세계체제의 주변부로의 편입이 동시적으로 그리고 중첩된 시기이며 그만큼 실체를 잡기가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를 반영하듯 ‘식민지(의) 근대화’(modernization of a colony), ‘식민적 근대화’(colonial modernization), ‘식민적 근대성’(colonial modernity) 개념을 둘러싼 논쟁이 아직도 진행 중에 있다.

사적 영역 과잉에 주목

이 글에서는 두 가지 문제만 말하고자 한다. 하나는 처음부터 서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식민지 근대를 둘러싼 논쟁은 식민화와 근대화의 어디에 더 무게를 두느냐는 입장과 접근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더라도 식민적 착취와 근대화의 국면이 공존했다는 식의 양시론으로 차이를 상대화하고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다.

필자는 식민화(a)와 근대화(b)의 국면들이 공존한다고 말하기보다(a+b=ab) 식민화와 근대화가 물고기의 비늘처럼 겹쳐진 상태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의 병렬적 배치가 아닌 화학적 착종인 ‘식민적 근대성’(a+b=x) 개념으로 이 시기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일례로 근대화를 개인의 출현과 개인성이 구성되고 주체화되는 과정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개인이 신분이나 종족과 같은 집단정체성으로 식별되기보다 개별적 자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즉 사적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 전환하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일제 식민치하의 개인화는 여타 사회의 그것과 다른 식민적 근대성의 구성과정이다.

식민지배는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지도력, 즉 헤게모니를 갖지 못한 식민국가에 의한 지배이다. 그리고 식민지배에 의한 역사의 급격한 단절은 전통이 기존에 가졌던 도덕적 규범력과 지도력도 무력화한다.

결국 개인들은 국가, 전통, 집단, 공공영역이라는 보호막을 결여한 채 사적인 욕망과 가치관에 따라 스스로 주체성과 정체성을 구성하게 된다. 공적이고 집단적인 지도원리(민족국가의 법제, 교육, 전통적인 가치와 도덕체계 등)가 개인에 대한 통제력과 지도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개인들이 사사로운 욕망과 이해관계, 관심사에 따라 자신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스스로 구성하는 상황, 즉 ‘사적 영역의 과잉’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적 영역이 과잉 확장된 사회에서는 공공적 규범보다는 사적 욕망이, 국가나 제도보다는 가족이, 집합적 가치보다는 개별적 이해관계와 욕망이 우선하며 이 역학관계 속에서 ‘식민지의 근대적 주체들’이 구성된다. 이러한 주체효과가 식민적 근대성의 일단을 이루는 것이다. 이를 식민지 근대화라고 하지 않고 ‘식민적 근대성’으로 엮은 것은 서구적 발전경로를 전제하는 근대화라는 말에 함축된 바의 보편성의 편향성과 거리를 두기 위함이다.

식민지배하에서 우리는 전통과 집단에서 분리되기 시작하는 사회적 실체로서 개인들의 존재를 목격하지만 그 개인들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출현한 근대적 개인이 아니라, 근대주체인 것도 아닌 것도 아닌 모호하고 불안정하며 유동적인 상태의 ‘식민적 근대주체’로 구분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문화의 문제틀은 여전히 주변에 머물러

문제는 이러한 주체구성, 문화, 일상의 실천들과 사적 영역에서 일어난 변화들은 현재 논쟁이 되고 있는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내재적 발전론에서는 간과되고 있거나 사각지대에 있다는 것이다. 식민지의 근대는 국가, 정책, 법과 제도, 다양한 경제 및 사회문화지표들을 통해서 추론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며 또 여러 가지 제약과 이유로 실체적 진실을 온전히 구성하고 있지도 않다.

또 대부분 사회과학적 지표들을 통해 식민지배의 현실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들은 국가, 집단, 엘리트의 정책 및 행위를 결정적 요인으로 간주하는 국가주의적 사고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 점에서는 수탈과 저항의 국면들을 강조해 온 민족주의 관점도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이러한 국가주의, 역사주의 및 사회과학주의가 이제까지 식민시기를 설명하는 지배적 패러다임이었고 현재 시점에서도 주체와 문화의 문제틀은 주변적 위치에 있다.  

문화·언어 패러다임으로 전환

앞에서 언급했지만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콜로니얼리즘에 추동된 근대에 대한 인식의 확장과 전환은 동시에 인식론의 변화 즉 사회과학 패러다임에서 문화 및 언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과 한 몸을 이루고 있다.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현실의 변화는 망탈리테, 의미망과 정서구조, 사회적 관계양식, 사회적 연결망과 교환양식, 가치체계, 생활양식, 제반 일상의 문화적 실천들의 변화에 의해 규정되고 영향 받는 관계에 있다는 문화주의와 언어주의, 혹은 주체주의(subjectivism) 패러다임이 탈근대 및 탈식민 이론의 배후이자 실천양식인 것이다.

예로 든 ‘사적 영역의 과잉화’와 같은 식민적 근대성의 일단들은 주체주의, 문화주의 및 언어주의 패러다임으로 접근할 때 비로소 실체가 드러날 수 있는 문제들이다. 사회경제적 지표들을 추슬러 보면 식민화 상태에서도 근대화로 볼 수 있는 변화 국면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것이 식민성과 착종된 근대성이라고 보면 그것의 실체를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식민지 주민들의 경험과 일상의 실천양식들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스팔트가 깔리고 극장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카페에서 비싼 커피를 마시는 도시에 한정된 중산층의 식민지 주체들이 말해주는 것은 근대화의 면모들이 아니라 룸펜 인텔리겐치아들과 젊은이들이 총검을 휴대한 고등경찰들의 임검과 감시 하에 일본어 자막이 깔린 스크린을 응시하면서 미국영화 속 중산층의 소비자본주의적 라이프스타일에 매혹되어 서구백인의 우월한 문명과 아메리카에 대한 환상을 키워나가는 식민지 근대주체의 형성과정이다. 제국에 대해 열등한 타자로서 자의식을 키워가는 근대주체들이 식민국가가 주물한 근대적 외양의 시공간 속에서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식민적 근대성의 국면들은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이 결여했거나 놓친, 식민지 근대에 관한 많은 진실을 드러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지표를 통해 재구성된 사실들에 대한 설명과 해석을 보완할 수 있다.  

유선영 / 한국언론재단·신문방송학

필자는 ‘고려대에서 한국대중문화의 근대적 구성과정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근대를 다시 읽는다>(공저)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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