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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中國 散策 (29)한·중의 역사적 관계
이중의 中國 散策 (29)한·중의 역사적 관계
  • 이중 전 숭실대 총장
  • 승인 2007.04.02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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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자국중심史觀 냉철함 유지해야

한국은 미국의 잉여농산물에 목을 매달고 보릿고개를 헤매다가 중국의 문화대혁명 기간인 60년대 후반부터 경제적으로 도약을 하게 된다. 10년 차이로 올림픽을 치루는 두 나라가 되었지만, 현재로는 한국이 間髮의 차이로 앞서가고 있다. 그 편차가 좁아지는 날이 한국의 위기이다. 이미 경제적으로 추월당했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우리 역사상 오늘만큼 중국의 영향권으로부터 멀리 있어 본 적이 일찍이 없었다. 한국 기업이 물밀듯이 중국으로 들어가고 한국의 관광객이 중국 전역을 유람하면서 우월감을 만끽하는 시대가 단군 이래 언제 또 있었던가.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향수와 일본의 추억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는 원하지 않지만 그런 향수와 추억은 엄존하는 현실적 상황이다. 유럽의 단합과 공동체 구성을 부러워하고, 한·중·일 3국이 주축이 되어 최소한 동북아 공동체라도 되었으면 하는 기대들도 많지만 3국에겐 그런 역사적 기반이 조성되어 있지 않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은 앙숙 중에서도 앙숙이었다. 서로 치고 받고, 처절한 전쟁의 아픈 추억을 공유하고 있다. 싸울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빈 손일 뿐이다. 초강대국 미국의 패권 앞에서 왜소해진 유럽의 자존심을 지킬 길을 찾아야 했다. 영원한 승리자도 패배자도 없는 전쟁의 연속, 이젠 빅수를 찾지 않으면 공멸의 위기에 봉착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되었다.

한국을 제외한 중국과 일본은 아직 한국과 더불어 빅수를 찾을 만큼 평화로운 공동체가 절실하지 않다. 작금의 외교를 보더라도 중국과 일본은 한반도 어깨 너머로 주거니 받거니 서로 비난과 화해의 제스처를 거듭하고 있다. 한국은 대등한 적수도 파트너도 아니라는 자세다. 이것이 바로 저네들의 한반도에 대한 진한 향수와 고약한 추억 때문이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40년 넘게 한국인은 일본 제국주의의 노예였고, 마름이요 종이었다. “애비는 종이었다”는 미당 서정주의 절규는 시인 자신의 가계보에서 추출된 메타포가 아니다. 한반도 식민지 상황을 압축한 한 마디 절창이었던 것이다.

중원의 지배권을 두고 元과 明이 혈전을 벌이며 一進一退를 거듭하고 있던 시대의 이야기다. 1368년, 朱元璋이 지금의 남경에서 명 태조로 등극하면서 큰 싸움은 막을 내렸지만, 장성 이북으로 도망간 원의 잔존세력은 여전히 元 나라 국호를 사용하면서 명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른 바 北元이다. 이 무렵 한반도에도 고려조와 조선조가 정권을 교체하는 미묘한 상황이 겹쳐서 일어나고 있었다. 건국 이듬해 주원장이 사절을 고려에 보내 자신의 등극을 알렸다. 고려는 元나라의 至正연호를 거두고 명 태조의 洪武연호를 쓰기 시작했다.  
<명태조실록>엔 고려에 보낸 명 태조의 조서도 실려 있다.

“짐은 원래 평민이었는데, 이제 중국의 황제가 되어 팔방의 주변 국가들을 무마하고 있다. 피차간 평화롭게 지내고 변방을 소란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함부로 정벌을 단행해 흥하고자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고려는 하늘이 내려준 땅이라 지형이 험준하니, 짐은 조금도 탐내지 않을 것이므로 서로 편안하게 지내며…”

그러나 1374년 고려에 정변이 일어나면서 다시 北元의 입김이 고려를 괴롭혔다. 북원은 공민왕이 살해되고 辛禑가 왕으로 옹립되는 과정에 간섭을 했다. 고려는 명나라 연호 홍무를 버리고 다시 북원 昭宗의 宣光 연호를 쓰게 된다. 1378년 소종이 죽고 북원의 힘이 쇠잔해지자 고려는 다시 명조의 ‘홍무’연호를 쓰기로 했다. 명나라, 원나라의 틈새에서 시시각각으로 눈치를 보며 연호를 바꿔 써야 하는 것이 말기 고려왕조의 실상이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이러는 과정에서 고려는 신흥 명나라에 1384년까지 대량의 말과 금은을  공물로 바쳐야 했다.

조선조의 운명도 하등 변화가 있을 수 없었다. 태조 이성계는 1392년에 등극했다. 명나라 안에서도 내란이 일어나 명 惠帝가 燕王 주체에게 쫓겨나는 사태가 발생했다. 새로 임금이 된 명의 成祖는 이미 번왕으로 있을 때부터 조선과 접촉이 있어서인지 조선조에 대해 까탈스럽지가 않았던 것 같다. 조선조 태종이 되기 전의 이방원과 성조가 만났던 적이 있었고, 일설에는 성조의 생모인 石貢妃가 고려인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와중에 조선은 연호를 바꾼다. 혜제의 연호 건문 4년을 홍무 35년으로 바꾼 것이다. 성조 등극 이후 대륙의 명나라와 한반도의 조선조는 대체로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기록된다.

북경대학 한국학 연구센터에서 펴낸 <韓中關係史>(김승일 옮김. 종합출판 범우 발행)에서 한 대목 인용해본다.

“1402년 명 성조가 즉위한 때로부터 1592년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할 때까지 근 2세기에 걸쳐 명과 조선의 관계는 안정적인 발전단계에 있었다…양국은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화목한 왕래를 유지했다. 조선은 바다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명나라와 가깝게 접경해 있고, 장기간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은 예의지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명의 각 속국 중에서 가장 중시되었으며, 자주 상을 내려주었고 인정상 가까웠기 때문에 다른 번국들과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었다. 구체적인 교류 중에는 때로 약간의 갈등과 마찰이 있기도 했지만…”

중국인 역사학자들이 쓴 글이다. 우호적인 글 같지만 속국이란 표현도 예사롭게 하고 있다. 이 책도 북경대학 역사과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펴낸 것이지만 한국 측에서 연구비를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그런저런 사정으로 중국 학자들로서는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그러나 옮긴이도 역자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절망에 가까운 분노의 말을 했다시피 한국과 중국의 역사인식은 그 괴리가 너무나 크고 깊다.

“그러나 그러한 여유 있는 생각을 가지고 책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중국인들의 일방적인 자국중심의 역사인식을 느끼게 됨은 가히 충격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자신들의 일방적인 역사인식이라고 하기 이전에 이미 강박적으로 박혀 있는 지울 수 없는 역사인식의 벽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한반도에 대한 중국인의 향수는 이처럼 뿌리가 깊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서, 우리가 중국 정치인들의 두루뭉술한 췌사에 현혹되지 않고 계속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것은 이 뿌리 깊은 저들의 향수병 때문이다. 한국의 경제가 간발의 차이로 중국에 앞서 있는 형국이 오늘의 한중관계이다. 그들의 향수를 향수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도 우리의 분발과 냉혹한 역사인식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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