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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고전] <18> 문승익의『정치와 주체 :정치사상 에세이』 (1984)
[우리시대의고전] <18> 문승익의『정치와 주체 :정치사상 에세이』 (1984)
  • 서병훈 / 숭실대·정치학
  • 승인 2001.09.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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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9-25 15:31:45

문승익(文丞益)
1937년 서울 출생.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 플로리다 주립대, 예일대를 거쳐 플로리다 주립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 웨스트조지아대 교수를 지내고, 중앙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있다. 중앙대 정경대 학장, 한국정치학회 회장, 중앙대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주체이론’(1970), ‘너와 나와 우리’(1973), ‘자아준거적 정치학의 모색’(1999) 등이 있다.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17년 전에 출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가 완연하다. 그러나 이 책은 외형뿐만 아니라 그 내용과 정신에서도 고전의 향취를 잔뜩 풍긴다. 무엇보다 논리가 精緻하기 이를 데 없다. 이제는 결론이 나올 차례라 싶으면 곧장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서, 보다 크고 중요한 문제를 연속적으로 제기한다. 강렬하고 설득력 넘치는 주장에 숨을 죽일 수밖에 없다. 집필 당시 문승익 교수의 연세가 현재 필자의 나이와 비슷한 것 같아, 경쟁의식이랄까, 도전의식 같은 것이 불끈 생겨남을 감출 수 없다.

저자는 이 책을 1970년에 발표한 ‘주체이론 서문’에 이어지는 ‘본론’의 ‘첫 번째 부분’으로 상정하고 있다. 정치사상사적으로 쟁점이 되는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 ‘주체이론’의 관점에서 검토하는 것이 그 목적이라고 밝힌다. 모두 9개장으로 구성된 ‘정치와 주체’는 인간을 ‘주체적 존재’로 규정한다. 이러한 인간 본성에 입각해서 정치가 지향해야 할 본령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 문 교수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는 인간 본성의 전체적인 내용, 그 궁극적인 양상에 대해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몇 가지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즉, 인간은 ‘나는 인간이다’라는 본원적 존재의식에 기초하여, ‘나는 독자적 존재로서의 나’라는 자기의식을 가진다. 자기의식을 소유함으로 인해 인간은 하나의 자아로 되며, 이러한 자아는 자기의지와 자기행동의 능력을 소유함으로 인해 독자적 의지와 행동의 주체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본래 주체적 존재이다.

둘째, 인간이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싫든 좋든 남들과 공존해야 한다. 내가 남들과 공존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본성에서 유래하는 필연이 아니다. 다만 남들이 내 주위에 존재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공존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공존방법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셋째, 공존의 불가피성을 인간 본성에 적응시키든지, 아니면 인간본성을 공존이라는 불가피한 상황에 적합하도록 만드는 길을 모색, 발견해야 한다. 共存化된 인간들, 공존적 자아 사이의 생활이 곧 정치의 본원적 모습이다. 따라서 정치의 성패는 공존적 자아의 형성 여부에 달려 있다.

넷째, 인간은 주체적으로 意志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이다. 이 의지는 당연히 ‘좀 더 나은’ 미래, 좀 더 나은 공존 방법에 대한 추구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더 나은 것’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고, 또 그것이 존재한다고 믿거나 주장하는 사람도 그것을 증명하기가 어렵다. 인간은 차선책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자아로 될 수 있고, 자아로 머물 수 있는 능력이 인간본성의 핵심적 속성이 된다. 이런 인간 본성이 危害되지 않는 공존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바로 정치의 과제이다.

다섯째, 이 전제 위에서 문승익 교수는 인간을 소유의 주체, 즉 이기적 존재로 인식하는 것을 단호히 배격한다. 인간은 존재의 주체로서 자기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는 취득을 중심으로 한 도구적, 수단적 존재가 아니고 自己的 존재들의 공존 장소로 인식되어야 한다. 자유주의가 근본적인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섯째, 저자는 인간 능력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고 있다. 따라서 정치에 대한 희망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인류의 순조로운 공존을 인간의 본원적 주체성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문 교수의 일관된 주장이다.

정치, 공존적 자아의 형성과정

인간 본성의 無形性, 절대적 기준을 찾는 작업의 無望함에 대한 문 교수의 분석에 대해 일면 수긍이 가지만,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점도 없지 않다.

정치가 ‘순조로운 공존’ 너머 보다 큰 이상을 지향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을 ‘주체적 존재’로 규정하는 문제의식 속에는 이미 인간이 지향해야 할 근본 가치, 다시 말해 공존이 구체적으로 풀어내야 할 바람직한 삶의 모습에 대한 단초가 담겨져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주체의 선택에다 모든 것을 걸게 되면, 자칫 롤즈류의 절차주의 또는 하버마스식의 ‘이상적 담화 상황’이 초래할 수밖에 없는 규범적 공백상황, 나아가 그 논리적 자기모순을 되풀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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