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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문명과 성서에 ‘배타성’이란 없다
이슬람 문명과 성서에 ‘배타성’이란 없다
  • 김재환 기자
  • 승인 2001.09.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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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9-25 17:33:48
『이슬람』(이희수 외 지음,), 『예수의 비유』(레온하르트 라가츠 지음). 『관용론』(볼테르 지음)

‘문명충돌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서구패권주의의 21세기적 버전인 ‘문명충돌론’은 서구의 패권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비판받아왔다. 헌팅턴 자신은 이번 테러가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광기어린 집단의 범죄”일 뿐이라 말한다. 테러와 무력보복은 다른 말로 하자면, 애국주의와 근본주의의 충돌이다. 이 둘은 ‘집단주의’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배타성을 특징으로 한다. 개인은 국가에, 민족에, 종교에 스스로를 내던진다. 그가 속한 집단은 ‘선’이며 그와 대립하는 다른 집단은 ‘악’이다. 집단주의의 이런 마니교적 이분법에는 반성적 성찰의 자리도, 대화의 자리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믿지 못하겠지만, 올해는 유엔이 정한 ‘문명간 대화의 해’다.

종교와 문명간의 ‘대화'를 향하여

가라타니 고진은 “대화는 언어게임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존재한다”고 설파한다. 따라서, 대화는 상대의 ‘언어’를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국내의 이슬람 연구자 12명이 공동으로 펴낸 ‘이슬람’(이희수 외 지음, 청아 刊)은 그런 ‘대화’의 시도이다. 문화인류학, 역사학, 언어학, 문학, 무역학 등을 전공한 저자들은 모두 이슬람권에서 5년에서 10년 이상 현지체류를 하며 공부한 학자들이다.

저자들이 이 책을 쓴 이유는 서구제국주의에 의해 왜곡됐던 이슬람을 우리의 시각으로 복원시키기 위함이다. 그들이 ‘대화’를 위해 채택하고 있는 전략은 상대주의적 인식과 내재적 시각이라 말할 수 있다. 저자로 참여한 이희수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는 “25년을 그 사람들과 함께 살고 함께 어울리면서도 한번도 나는 그들이 두려운 테러리스트거나 지저분한 야만인이란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이 책은 이집트, 터키, 요르단, 이란 등 이슬람 지역의 문화와 특질, 문학과 예술, 삶의 양식, 경제생활, 종교에서부터 분쟁 등을 포괄하고 있다.

이 책에 의하면, “한 손에 칼, 한손에 꾸란”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무력에 의한 이슬람 전파’는 꾸란에서도,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꾸란에는 “종교에는 어떠한 강요도 있을 수 없다”라는 종교다원주의적 시각이 배어 있으며, 이슬람 제국하에서도 기독교인과 유태인은 종교의 자유와 경제적 기득권을 향유했다. 미국과 서방세계에 대한 ‘증오’는 20세기 초부터 시작된 서구제국주의 수탈과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비롯됐다. 석유채굴과 그 잇권을 되찾기 위해 이슬람 국가들이 국제 석유메이저와 서방국가에 대항해 벌인 싸움은 ‘원죄’가 오히려 서방에 있음을 말해준다. 테러나 원리주의는 이슬람 세계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극단적 원리주의는 전체 이슬람 세계에서 5%미만이다. 저자들의 다음과 같은 말은 ‘테러사건’을 보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우리 자신이 제3세계의 일원으로 피지배의 아픈 경험을 수없이 반복해 왔음에도, 스스로 우리를 괴롭혔던 사람들의 사고방식대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의 비유’(레온하르트 라가츠 지음·류장현 옮김, 다산글방 刊)는 서구문명을 대표하는 ‘기독교’의 배타성을 겨냥하고 있다. 대학교수 자리를 박차고 나와 가난한 이웃을 위해 일평생을 바친 저자는 ‘예수’가 갖는 ‘비유’적 의미를 천착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성서는 자본과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싸움의 무기이자, 타자로 향해 열린 텍스트이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이란 “우리가 어떻게 인간을 대접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고 본다. 인간을 하나의 형제로서 대접했는가, 아닌가가 심판의 척도라는 것이다. 이런 시각을 가진 그에게 기독교는 다른 민족과 종교에게 폭넓게 열려있는 ‘대화성’을 간직한 종교다. “우리에게 낯선 민족은 없다. 우리는 서로 무한히 빚진 사람들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 다른 민족의 권리는 자신의 권리만큼, 아니 그보다 더 거룩해야 한다. 모든 민족과 인종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문명의 공존을 위한 ‘관용'

학술진흥재단의 고전번역 총서로 나온 볼테르의 ‘관용론’(송기형·임미경 옮김, 한길사 刊)은 종교적 배타주의와 문명충돌 시대에 공존의 윤리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새삼 일깨우고 있다. 18세기 후반에 나온 이 저작은 종교적 맹신과 편견에 의해 ‘사법살해’된 ‘장 칼라스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볼테르는 종교적 불관용이 낳은 이 비극적 사건을 논박하기 위해 동서양 역사와 성서, 도덕론 등을 뒤져 논거를 찾아 내고 있다. 불관용에 맞서 그가 제시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논거는 소크라테스의 재판이다. 사건의 전모를 파헤친 아테네인들은 소크라테스를 고발했던 사람들을 증오하고, 그를 추모하기 위해 신전을 건립한다.

볼테르는 종교적 편견에 맞서 이성을 옹호하지만, 그 이성에는 관용의 정신이 부가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관용은 “소극적 인정과 방임을 넘어 다른 종류의 사고방식과 행위양식을 존중하고 자유롭게 승인하는 태도”를 말한다. 종교적 배타성을 그는 이렇게 비유한다. “이러한 경우는 호랑이 따위의 맹수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끔찍하다. 왜냐하면 호랑이들은 먹을 것을 다툴 때만 서로를 물어뜯지만, 우리 인간은 말 몇마디 때문에 서로를 죽이기 때문이다.” 볼테르는 마지막 장에서 “나는 이 책을 통해 후일 열매를 맺게 될 씨앗을 하나 뿌렸다”고 말한다. 폭력과 전쟁이 계속됐던 ‘야만의 20세기’, 테러와 전쟁으로 치닫는 오늘의 현실에서 그가 뿌린 ‘씨앗’은 아직도 싹을 틔우지 못하고 있다.
김재환 기자 weiblich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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