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複數의 근대와 식민지 근대의 이중성
複數의 근대와 식민지 근대의 이중성
  • 교수신문
  • 승인 2007.03.26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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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기획시리즈 (3)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하여 (중)

내재적 발전론(혹은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의 대립은 이제 진부해진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내재적 발전론이 식민지 하에서 근대화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식민지 근대화론도 식민적 착취나 차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 근대에 대한 연구가 새로운 단계로 진전했느냐 하면 아직까지는 그렇다고 말하기 어려워 보인다.

물론 연구의 방법이나 대상이 다양해지고 풍부해진 것은 사실이다. 일상, 문화, 풍속, 매체 등으로 연구의 대상은 확장되었고, 그에 따라 미시사나 문화연구와 같은 새로운 방법론도 적극 도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그러한 작업들이 식민지 근대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정립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평하는 것은 무엇보다 최근의 연구들이 내재적 발전론과 수탈론을 부정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그것의 합리적 핵심을 수용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식민지 시대에 착취와 차별이 있었음을 인정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필자에게 내재적 발전론과 수탈론이 갖는 합리적 핵심은 자본주의 맹아론이나 착취와 차별의 사례 연구 따위가 아니다. 내재적 발전론자들도 자본주의 맹아론에 집착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으며, 수탈론자들 또한 식민지 근대화를 부인하지 않는다. 따라서 식민지 근대화론이 여전히 자본주의 맹아라든가 식민지 근대화의 사실관계를 쟁점으로 삼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필자는 내재적 발전론이 우리에게 전해준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근대는 하나가 아니다’라는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내재적 발전론이 나오기 전까지 근대에 대한 모든 논의는 서구 근대가 근대의 유일한 전범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내재적 발전론은 바로 그러한 유럽 중심적 보편주의에 대한 도전이었다. 내재적 발전론이 과연 그에 합당한 성과를 내놓았느냐는 비판의 여지가 많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맹아론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듯 내재적 발전론자들 또한 자생적 근대화의 모델을 서구 근대에서 빌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재적 발전론이 심화되면서 서구 근대와는 다른 근대의 가능성을 찾아보려는 시도들이 적지 않게 제출되기도 했다. 민중이 주체가 된 저항 운동이나 사회주의를 비롯한 비(非)자본주의적 근대 기획에 대한 연구들에서 그러한 시도를 확인할 수 있다. 내재적 발전론이 ‘복수(複數)의 근대’를 뚜렷이 자각했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내재적 발전론의 텍스트들이 곳곳에서 그 가능성을 징후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서구 ‘근대’는 극복할 수 없는가

적어도 이 점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은 내재적 발전론의 성과 또는 가능성에서 퇴보했다고 말할 수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이 말하는 ‘근대’란 언제나 서구 근대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최근의 탈근대론 또한 근대를 서구 근대의 확장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식민지 근대화론과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다만 그에 대한 평가가 상반될 뿐이다. 이는 우리 학계가 내재적 발전론의 합리적 핵심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려는 적극적 노력 대신 서구나 일본의 최신 이론을 한국의 근대에 무반성적으로 적용하면서 생긴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래서는 유럽 중심적 보편주의를 극복하기가 불가능해진다.

유럽 중심적 보편주의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말할 것도 없지만, 탈근대론 역시 유럽 중심적 보편주의의 자장 속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따라서 유럽 중심적 보편주의의 참다운 극복은 서구 근대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제3세계 혹은 비(非)서구의 근대 기획들을 적극 참조하고 활용할 때 가능해진다. 그럴 때 근대 내부로부터의 근대 극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수의 근대’는 이러한 작업을 위한 이론적 기반이 되어줄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론과 탈근대론은 수탈론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문제점을 보여준다. 수탈도 있었고 개발도 있었다거나 협력도 있었고 저항도 있었다는 식의 논리는 쟁점에 대한 절충주의적 彌縫에 불과하다. 필자가 보기에 식민지 수탈론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수탈의 구조화’이다. 식민 국가는 공장도 짓고 철도도 놓았고 항만도 건설했다, 식민지 시대 동안 생산력이 발전했고 수출이 늘었고 소득도 올랐다, 고 식민지 근대화론은 각종 통계 자료와 수치를 근거로 말한다. 경제학자도 역사학자도 아닌 필자로서는 그것이 맞는지 틀린지를 논하기 불가능하다. 아마도 맞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그런 점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은 논점 이탈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1920년대 초에 염상섭은 <만세전>에서 이층집도 늘고 양옥도 생기면서 “시가가 나날이 번창하여 가는” 개발이 진행되고 있지만, 민중들은 오히려 집문서마저 식산은행에 뺏기고 만주로 쫓겨 가는 근대화의 역설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면서 염상섭은 “누구의 이층이요 누구를 위한 위생이냐”고 반문하는데, 이는 근대화의 주체와 수혜자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10여 년이 지난 후에도 이기영은 <서화>에서 “세상은 점점 개명을 한다는데 사람 살기는 해마다 더 곤란하니 웬일인가”라고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만세전> 이후 10여 년 동안 세상은 훨씬 더 개명, 곧 근대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의 살림살이가 더욱 힘들어진 것은 무엇 때문일까. 식민지 근대에 대해 우리가 던져야 할 최종 질문은 이것이어야 한다. 이것을 설명해주지 않는 학문이란 삶에서 괴리된 지적 유희일 뿐이다.

문학 작품 속에 드러난 식민지의 삶

문학은 현실을 삶의 실감으로 다룬다. 염상섭과 이기영의 문제제기는 바로 삶의 실감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삶의 실감에 주목할 때 통계와 수치에 잡히지 않는 식민지 근대의 裏面이 드러난다. 이들이 발견한 식민지 근대의 이면이란 근대화가 진전되면 될수록 살기는 점점 더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수탈이 ‘구조적인’ 현상이라는 점이다. 가령 강경애가 <인간문제>에서 쌀 생산이 늘어났음에도 정작 조선의 여공들은 “식은 밥 쪄놓은 것같이 풀기가 없고 석유내 같은 그런 내가 후끈후끈 끼치는 안남미”를 억지로 먹는 장면을 그릴 때, 우리는 거기서 ‘구조적’ 수탈을 목격하게 된다.

또한 이태준의 <농군>에서 윤창권이 자작만으로는 살 수 없어 소작도 하고 아내까지 공장에 보냈지만 그래도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 만주로 이민 가게 되었다고 말하는 장면도 ‘구조화’된 수탈을 증언해준다. 그런 점에서 식민지 근대화란 곧 ‘수탈의 구조화’이기도 한 것이다. 식민지 수탈론이 나오기 훨씬 이전에 식민지 한국의 작가들은 수탈이 구조적인 현상임을 통찰한 셈이다.

이렇게 볼 때 수탈론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진정한 교훈은 식민지 근대의 이중성 혹은 양가성이다. 여기서 양가성이란 화해할 수 없는 모순관계이면서도 저쪽 항이 있어야만 이쪽 항도 존립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 식민지 근대화와 구조적 수탈의 관계가 바로 그런 것이다. 식민 권력에게 근대화란 피식민 주체의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헤게모니 담론이다. 근대화는 생산력의 발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민지 근대화는 필연적으로 구조적 수탈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식민 지배의 궁극적 목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근대화의 주체와 최종 수혜자는 제국의 국가와 자본인 것이다. 따라서 구조적 수탈을 포기하는 것은 식민 지배의 궁극적 목적을 포기하는 일이 된다. 즉 식민 지배의 필요 자체가 없어지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식민지 근대는 구조적 수탈 없이는 존속 불가능한 체제이다. 식민지 근대가 양가적인 것은 그래서이며, 그로 말미암아 식민 체제는 항상적으로 균열과 동요를 노정하게 된다. 식민지 근대 내부에서 탈식민 저항의 동력이 끊임없이 생성되는 것은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탈근대론의 딜레마도 이와 관련이 깊다. 식민지 근대의 내부에서 탈식민의 동력이 항상적으로 생성되고 있다면 근대 외부에 근대 극복의 거점을 마련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식민지 근대 내부에서의 탈식민 저항에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 그것이다.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수탈론이 시대에 뒤떨어진 이론임은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다. 민족주의에 긴박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해서 반드시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근대문학을 공부하다 보면, 피식민 민족주의에서도 서구의 민족주의에서는 볼 수 없는 탈식민적 사유와 고민을 종종 발견하곤 한다.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수탈론이 자각하고 있었든 그렇지 않았든 거기에는 ‘복수의 근대’와 ‘수탈의 구조화’에 대한 의미 있는 구상의 편린들이 잠복해 있다. 이것들은 한국적 근대의 특수성을 해명해줄 소중한 단서이다. 더구나 이러한 구상은 유럽 중심주의에 물들어 있는 박래(舶來) 이론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들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지금 한국의 인문학이 안고 있는 가장 절박한 과제는 ‘새것 콤플렉스’의 극복일지도 모른다.

하정일 / 원광대·국문학

필자는 연세대에서 ‘해방기 민족문학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분단 자본주의 시대의 민족문학사론>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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