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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민족 없는 ‘경제성장론’은 무의미
국가와 민족 없는 ‘경제성장론’은 무의미
  • 교수신문
  • 승인 2007.03.26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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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기획시리즈 (3)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하여 (중)

역사비평 시리즈 이번 호는 끝없이 민주화의 과제를 인식하고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태헌 고려대 교수의 글을 싣는다. 정 교수는 식민지적 근대화는 한국형 식민사관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탈근대주의는 사실상 근대주의로 환원되는 것이며 정작 중요한 민족과 국가의 문제는 회피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하정일 원광대 교수는 문학 작품 속에 드러난 식민지의 삶을 들춰내며 근대에 대한 복수의 개념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근대를 넘어 탈근대 시대라는 주장은 많지만, ‘어떻게’ 그 길을 갈 것인가 하는 진정성의 측면은 취약해 보인다.

역시 한국의 학계와 문화를 구속해 온 근대주의가 딜레마다. 한국에서 근대주의는 정작 근대를 성취하는데 요구되는 과정과 실천의식을 간과한 채 근대를 단지 경제성장으로 이룰 수 있다는 단선적이고 양적인 근대관이었다.

근대주의는 일본과 구미를 모방하고자 했던 한말의 개량주의나 근대역사학 방법론으로 개념화된 식민사관을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사상이었다. 1960년대 들어서는 빨리 근대를 성취하자는 구호에 지배된 이래 근대화를 민주화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간주했다.

근자에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정체성 성장 과정인 민주화가 경제성장으로 자연히 이루어지는 것처럼 국가건설, 산업화·개발독재, 민주화 등으로 근대화 단계를 나누는 속류 유물론에 의해 정작 근대의 핵심인 민주화의 의미 자체가 희화화되기도 한다.

결국 근대주의는 근대를 한반도에서 ‘어떻게’ 실현하는가 하는 구체성에 대한 문제의식은 취약했다. 냉전체제 붕괴 이후 식민지 지배와 분단 문제를 간과했던 본래의 모순을 드러내면서 역사상과 현실 인식에 혼동을 불러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몇 가지 환경이 작용했다. 먼저 식민사학의 틀을 벗어나 새롭게 한국사상을 그려낸 자본주의 맹아론은 주창자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근대주의를 극복하지 못했다. 1980년대 이후 계급, 혁명이 주요 화두가 되면서 냉전의 벽을 넘어서려는 문제의식은 냉전체제 붕괴를 전후해서 형해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만능론이 횡행하고 경제성장의 시원을 일제 지배 하의 자본주의에 두는 인식이 대두되었다. 자본주의와 국가가 없는 식민지자본주의의 혼동, 민주화와 경제성장의 관계를 분절적으로 이해한 속류 유물론에 따른 근대주의의 잔영이 남긴 여파인 셈이다.

경제성장론은 한국형 식민사관

자본주의의 작동에 국가의 존재와 폭력 행사는 필수적이었다. 자본주의는 자본가와 시장뿐 아니라 국가가 존재할 때 비로소 제도화된다. 즉 자본가계급이 정책의 운용과 결정을 주도하는 공간이자 물리력의 근간인 국가의 존재 여부를 건너 뛴 자본주의론은 무의미하다.

그런데 경제성장론의 경제학은 국가와 민족 범주를 없앤 시공간을 전제로 경제성장과 자본가라는 두 키워드를 통해 식민지경제를 설명한다. 식민지 현실은 추상화되고 식민사학 방법론에 통계를 갖다 맞춘다. 따라서 국가 주권을 상실한 식민지자본주의의 특성, 국가 간 수탈, 구성원의 삶의 조건 등의 문제를 볼 수 없다. 오로지 경제학의 ‘상식’에 따라 자본가, 경제성장 언술만 반복한다. 경제외적 강제에 의존한 전시동원 체제도 한국인이 자본주의적 고통을 경험하는 계기였을 뿐이다.

요컨대 일제시기에 자본주의는 발전했고 조선인자본은 일본자본에게 억압당하면서도 발전함으로써 1960년대 이후의 경제성장에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경제가 성장하면 민주주의고 통일이고 간에 모든 문제들이 해소”된다는 속류 유물론 인식은 한국사의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전제로 한다. 일제 침략 이전 한국사회의 새로운 움직임은 무의미했고 변화가 불가능했다는 ‘가정’은 이들에게 ‘사실’이 된다.

하지만 해방 후 경제발전은 대외종속성이 강했지만 일차적으로 국가를 회복한 조건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냉전체제 하에서 국가 만들기의 일방적 동원 대상에서 벗어나려는 민주화운동과 이에 대응한 국가권력의 수동적 변화의 결과였다. 경제성장은 민주적·민족적 국민 의식과 권력의 대립적 피드백의 성과였다.
그러나 경제성장론은 정작 자본가들이 자본축적과 발전전망을 만들어내는 공간인 국가의 회복 등에 대한 원초적 의문이 없다. 한국사의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강조하고 국가와 민족을 부정한 채 일본국가주의에 기댄 ‘반국가적 반민족적’ 논리는 이제 ‘치열한 사상전’을 표방하면서 반북정서에 편승하여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주장한다.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무릇 우익의 정체성 근간은 국가와 민족인데 한국의 우익은 유독 민족ㆍ국가의식이 취약하다. 자신의 것보다 적대적 반북논리가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반북논리는 천황국가와 야마토민족을 전면에 내세운 일본 극우집단과 경제성장론의 동거를 가능하게 하는 지렛대이다. 이들에게 남북교류나 평화체제 정착은 실현되어서는 안 되고 북한도 저 꼴로 그대로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들의 정체성이 살기 때문이다.

탈근대론은 사실상 근대주의로의 환원

포스트모더니즘은 거대담론에 가려진 일상생활과 마이너리티에 주목하고 근대를 전면 부정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화려한 수사어 이상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어떻게’ 탈근대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없다. 침략과 전쟁을 일삼는 배타적 국가주의를 문화와 정체성 의미도 함유한 민족주의 일반과 무절제하게 뒤섞으면서 선행 연구는 자신들의 비판 목적에 맞게 ‘민족주의적’이라고 규정한다. 물론 이는 자신들이 부정한다는 권력적 행위이다. 자신들의 편의에 맞게 역사를 ‘만들면서’ 모든 것의 해체를 주장할 뿐이다.

국가와 민족을 넘어선 대안과 구체성이 결여된 관념적 근대 비판과 추상적으로 설정된 주체는 근대주의를 호도한다. 결과적으로 그토록 부정하던 과거의 ‘억압’으로 회귀하고 반동적 경향을 드러내면서 근대주의에 포섭된다. 시대적 함의와 구체성을 부정한 채, 한국사에 드러난 중요한 문제가 민족주의, 국가와 민족에서 파생되었다는 단순논리 때문에 반북적 분단국가주의에 기댄 경제성장론과의 결합도 가능한 것이다.

민족을 억압의 주체로 설정하면서 정작 더욱 철저하게 부정해야 할 ‘강한 국가’를 포용하는 모순은 양자의 결합을 예정한 것이었다. 국가주의의 폭력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를 거부하면서 한 때를 풍미했던 아나키즘이 극우논리에 흡수되는 등 본래의 지향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귀결된 것의 전철이다.

내가 살고 있는 근대에 발을 딛지 않는 청산론이나 허무주의로 탈근대는 기대할 수 없다. 해체하고 타도해야 할 대상의 위상을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설정한 후 논리를 전개해야 한다. 중무장한 무리에 둘러 싸여 있는 한 사람을 누군가가 나타나 처단하고 모두 총을 들었으니 죄악이라고 주장한다. 이 ‘정의의 사도’는 결과적으로 무리의 편에 귀속된다.   

국가권력의 원시적 폭력 하에서 ‘국민’주의의 발현을 통해 민주화 영역을 넓혀갔고, ‘민족’주의 내실을 채워가면서 분단 문제에 도전했던 과정을 점검한 후 비판의 날을 들이대야 한다. 민주화 운동이 성과를 이루어 제도화되면 이 역시 권력이 되고 풀어야 하는 과제이다.

그러나 품 들여야 하는 과정을 생각하지 않은 채, 저항하는 민중상이 거짓이었고 과거와 마찬가지로 소수자는 억압받았다는 동어반복으로 역사의 허무함과 대안 없는 해체를 주장하는 것은 권력이 거침없이 놀 수 있는 환경만 조성할 뿐이다. 그릇과 불을 억압체로 규정하고 이를 제대로 만들 생각은 않은 채 ‘순수한’ 증류수만 먹겠다는 유토피안은 권력에게 예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민족주의의 부정적 요소는 이를 증폭시키는 환경을 제거해야 하는 과제 대상이지 배타성을 벗자는 추상론으로 극복될 수 없다. 한반도의 근대를 사고하는 한 식민지 문제, 분단·민족 문제는 피할 수 없다. 국가나 민족을 넘자는 선언보다 중요한 것은 끝없는 민주화 과제를 안고 권력의 여지를 줄여 국가와 사회의 내용을 변화시키려는 실천이다.

일관성과 진정성에 대하여

<교수신문> 지난 호에 주장된 것처럼 “이미 많이 논의되어 왔기에 새로 언급하지 않는 것뿐”이라는 “역사의 더 어두운 면들”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경제성장론을 식민사관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방법론과 인식이 ‘어두운 면’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수사어로 논리를 비틀지 말고 한국이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면 근대화할 수 없었으니 제국주의 지배를 달리 보자는 근대주의를 버전이라도 바꿔 주장하는 것이 훨씬 일관될 것 같다.

반면에 식민지적 근대 개념을 사용하지만 ‘식민지근대’가 “근대를 비판적으로 재해석”하자는 것이라는 탈근대론은 식민지성에 대한 구체성과 현실성이 담겨 있지 않아 진정성이 약하다.

정태헌 / 고려대·한국근대사

필자는 고려대에서 ‘日帝下의 個人所得稅政策 硏究’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의 식민지적 근대 성찰>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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