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16:00 (토)
언어의 최소화 위해 佛語에 담은 '연극미학'
언어의 최소화 위해 佛語에 담은 '연극미학'
  • 교수신문
  • 승인 2007.03.16 20: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전번역 비평_최고 번역본을 찾아서 (62)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최고 번역본을 찾아서’ 이번 회는 아르헨티나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집 ‘고도를 기다리며’이다. 양기찬 교수는 번역본들을 살펴보기에 앞서, 베케트의 연극미학과 글쓰기 작업을 먼저 소개한다. 그는 베케트가 자신의 모국어를 고집한 이유가 불어의 명확성 때문이었다고 지적했다.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한 번역본에는 현재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 4개의 판본들이 있다. 민음사에서 2000년도에 초판이 출간된 오증자 번역본(2006년 1판 26쇄 본), 하서에서 1994년도에 초판이 출간된 용경식 번역본(2006년 개정판 1쇄 본), 그리고 청목에서 1989년에 초판이 출간된 임성희 번역본(본고에서는 2000년 4판 4쇄 본) 등이 있다. 이 외에 예니출판사에서 출간된 이원기 번역본이 시중에서 유통되고 있다. 이원기 번역본은 학술적인 저서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본 글에서는 제외시켰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사무엘 베케트의 대표적인 희곡이며 현대 부조리 희곡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작품의 번역본들은 모두 원본인 프랑스어 판본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살펴본 3개의 작품들은 크게 대화체 또는 산문체, 즉 구어체와 문어체로 구분될 수 있다. 민음사에서 출간된 오증자 본이 대화체를 기본으로 한다면 나머지 임성희 그리고 용경식 번역본들은 다소 산문체에 가까운 번역을 보여준다. 임성희 번역본에는 원본의 주제를 자칫 잘못 전달할 수 있는 의역과 원작자의 의도를 충분히 살리지 못한 번역 등이 포함되어 있는 관계로 오증자 번역본과 용경식 번역본을 위주로 작품을 분석해 보았다.

 본 글은 번역에 있어서의 어려움과 문제점들을 지적함으로써 고전으로 받아들여지는 작품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한 올바른 소개와 베케트의 작품 번역에 있어서 중점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번역본들의 일대일 비교보다는 원본의 의도와 의의를 각각의 번역본들이 얼마나 잘 전달하는가에 취지를 맞추었다. 베케트 작품의 특성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느냐에 따른 큰 틀 속에서 번역본들마다의 장점과 단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작품 <고도를 기다리며>의 번역본들에 대한 의견에 앞서 원작가인 사무엘 베케트의 글쓰기 작업과 작품에 반영된 그의 연극미학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베케트는 자신의 장편 비극들을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불어로 쓴 이유를 불어만이 지니는 명확성 때문이었다고 설명하였다. 즉 불어는 그의 모국어인 영어보다 사건의 발생 순간순간을 하나의 연속적인 움직임으로 보다 정확하고 명확하게 보여 줄 수 있는 언어였던 것이다. 베케트는 불어의 정확한 문법체계를 근간으로 하는 시제 등의 변형과 전개를 토대로 사건들의 순서와 순간적인 동작의 흐름의 연속성을 보여주기를 원했다. 희곡이 무대에서 재현되기 위한 하나의 도구라고 생각한다면 그 희곡이 주제로 하고 있는 사건들의 연속은 하나의 시간적, 공간적 틀 속에서 공존해야만 한다. 물론 베케트의 많은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작품 속의 시간적, 공간적 틀은 관객들의 현실과 동떨어져있는 또 다른 현실을 보여주지만, 무대에서 제시되는 모든 현상은 비현실적이라도 시공의 연속성을 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등장인물들을 지탱해주는 하나하나의 단순한 움직임들과 그들이 연속적으로 반복하는 체계적인 움직임은 무대 위의 시공세계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베케트의 희곡들이 특히 무대에 재현되기 위해서 써졌다는 점에서 앞에서 지적한 시간적 연속성에 의한 하나하나의 동작의 의미는 번역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배우 또는 연출은 희곡을 통해서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고 무대에서 어떠한 이미지들의 연속이 필요한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희곡이 담고 있는 시간적, 공간적 등의 제시어들의 충실한 시차적 실행 등은 작품의 의도와 작품의 해석 그리고 작품의 주제를 관객들에게 전달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인 요소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시제의 중요성은 작품의 번역에 그대로 투영되어야만 독자들에게 그 작품만의 의의를 전달할 수 있다. 프랑스어에 대한 지식과 작품에 내재해 있는 철학 그리고 문화 등의 포괄적인 이해 없이는 베케트 작품 번역에 적지 않은 혼란과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

 이 명확성과 정확성을 요하는 부분에 있어서 오증자 번역본이 3개의 번역본들 중 원작품과 가장 근접하게 번역되었다. 용경식 번역본 역시 오증자 번역본과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지만, 독자들이 쉽게 접근 할 수 있도록 산문화를 채택한 결과 앞서 언급한 사건의 시간적 흐름에 따른 사건들의 연속성에 있어서 모호함이 드러난다. 즉 무대화에 초점을 둔 번역이라기보다는 읽기 위한 번역, 작품을 보다 쉽게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하는 의도를 읽을 수 있는 번역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개의 번역본과는 달리 임성희 번역본은 산문과 대화체를 혼합해서 사용하였지만, 원본 자체와 차이가 있는 번역을 보여준다. 번역에 있어서의 작품의 의도와 차이가 있는 의역은 원작이 보여주고자 했던 상황의 전개를 불투명하게 만든 결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문법적인 언어의 특성과 함께, 베케트는 불어를 사용함으로써 불어가 지니는 또 하나의 특성인 함축성을 통해 그의 글쓰기 미학인 ‘최소화Minimalism’를 시도하였다. 하나의 단어가 은유적으로 많은 해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은 현실 세계와는 다른 작품의 세계를 현실 세계로의 공간적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작품에서 정확한 장소와 시간이 암시되지 않더라도 작품을 구성하는 언어를 통해 은유적 묘사로 독자들에게 작품의 의도를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효과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이러한 최소화는 베케트 작품의 특성을 매우 잘 보여주는 예이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그러한 글쓰기 작업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단어 하나하나에 중점을 두는 것은 희곡 작품을 살아있는 일상적인 ‘말’ 즉 구어체로의 전환을 가져오는 작업에 속하며, 이는 베케트의 작품에 있어서 보다 살아있는 인물 창조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작품 <고도를 기다리며>는 대사를 기본으로 무대화에 역점을 두고 구어체로 번역되어야 원작이 지니는 의의와 그 실험적 글쓰기의 독특한 멋과 맛을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 산문이 아닌 구어체로의 번역은 베케트가 추구하는 미학의 기초인 최소화를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최소화를 생각할 때, 오증자 번역본이 그 번역 양식에 있어서 베케트가 시도하고 있는 실험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면밀히 검토해 보면, 오증자 번역본이 형식에 있어서 압축된 구어체를 사용하였지만, 이는 관객들을 고려한 무대작업을 위한 번역이라기보다는 읽는 독자를 위한 번역 작업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동일하게 반복되는 불어 단어들의 번역을 매번 동일한 한국어로 번역함으로써 원작의 단어들이 지니는 은유적 표현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였다. 원문을 번역할 때 원문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의 전달이 번역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원문에서 동일한 단어가 반복되어 나타난다 해도 번역에서는 독자나 관객들이 즐길 수 있는 언어의 유희를 위한 알맞은 단어로의 대체가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는 베케트 작품을 번역하는 데 있어서 언어의 묘미를 독자나 관객에게 전달해야 하는 까다로운 작업이다.

 오증자 번역본과는 다르게 용경식 번역본은 산문체를 사용한 번역이다. 원작의 대사를 산문화시켜 베케트 작품에서 나타나는 최소화의 미학과는 거리가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작품이 지니는 의의를 떠나서 독자에게 작품의 산문화는 작품의 해석만이라도 쉽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대 작업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무리가 없는 번역 형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베케트의 번역에 있어서 문제로 대두되는 것은 두 용어들의 번역이다. 즉 ‘Silence’와 ‘Pause’는 베케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다. 3권의 번역서들에서는 ‘Silence’를 모두 ‘침묵’으로 번역하였지만 ‘Pause’의 번역에서는 오증자 본에서는 ‘사이’로 그리고 용경식, 임성희 본에서는 ‘잠시 후에’로 차이를 보였다. 물론 두 ‘사이’와 ‘잠시 후에’ 모두 동일한 번역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잠시 후에’가 지니는 의미는 원본에서의 ‘Pause’의 의미를 조금 과장되게 우리말로 풀이한 인상을 주는 부분이다. 특히 이 두 용어가 작품의 무대에서의 내재적인 가치를 나타내 주는 연출된 의도라는 점에서 ‘잠시 후에’보다는 ‘사이’가 원작의 의도를 잘 나타낸 번역인 것이다. 즉 번역은 사전적 번역보다는 문화적 번역, 즉 원작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사회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하나의 필수 조건이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번역한 3권의 번역본들은 그 나름대로의 장·단점들을 지니고 있다. 오증자 본이 희곡에 제일 가깝게 번역되어졌다면, 용경식 본은 산문화를 기초로 한 결과 독자들이 쉽게 원작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반면 원작의 실험정신 등에서 작품이 지니는 의의를 희생의 대가로 치렀다. 오증자 본에서 찾을 수 있는 원작의 실험정신과 그 독특성이 용경식 본처럼 쉽게 이해될 때 아마도 베케트 연구는 한층 더 발전할 것이다. 베케트만의 독특한 색채를 더욱 더 잘 보여주는 새로운 번역을 기다리며.

양기찬 / 수원대·비교문학

글쓴이는 파리3대학에서 ‘베케트와 오닐의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이와 함께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나쁜엄마 나쁜아빠'> 등의 역서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