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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中國 散策(26)대만의 장개석 흔적 지우기
이중의 中國 散策(26)대만의 장개석 흔적 지우기
  • 이중 전 숭실대 총장
  • 승인 2007.03.13 14: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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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은 대만의 지도자인가, 침략자인가

대만에 있는 장개석을 기념하기 위해 설립된 중정기념관 내부모습.
새해 들어서 대만이 장개석의 흔적을 지우는 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장개석이 오늘의 대만을 일으켜 세운 지도자가 아니라 대만의 침략자라는 것이다. 천수이볜이 이끄는 대만 집권당의 ‘역사 새로 쓰기’이다. 대만의 역사적 독립성을 강조하면서 대륙과의 단절을 본격적으로 시도하는 셈이다. 대륙에선 항일전쟁 시기의 장개석의 공헌을 재평가하는 시점에서, 오히려 대만이 그들의 역사에서 장개석의 흔적을 지우려 하는 것이다.

대만의 오늘은 하나의 격동기라 할 것이다. 이 격변의 시대에, 왕년의 영웅 장개석이 반세기에 걸쳐 대만의 흥륭을 위해 심혈을 쏟아 바쳤던, 바로 그 대만의 정치판 한 가운데에서 때 아닌 곤욕과 수모를 당하고 있다. 이미 1936년 12월 12일 서안사변이 일어났을 때, 장개석은 잠시 죽은 몸이었다. 그리고 1949년 대만으로 철수할 때만 해도 그의 운명은 이제 끝장이라는 시각들이 강했다. 대륙의 역사에서 패배자로, 역사의 지류로 전락해버린 그가 이젠 대만에서조차 불명예 퇴진의 위기에 봉착해 있는 것이다. 

서안사변이 발생하자 많은 중국공산당원들은 장개석이란 존재를 없앨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다고 환호했었다. 이들을 달래고 설득해서 장개석을 남경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주은래가 해냈다. 그동안 주은래와 장학량이 비밀리에 만나서 한 주된 논의는 항일전쟁과 장개석을 어떻게 엮고 묶느냐 하는 것이었다. 장학량은 중공당 진영 안에서 주은래와 협상하면서 장개석을 배제한 항일전선 구축이 실제로는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주은래 역시 장개석을 끌어안아야만 항일전쟁이 가능하다는 점을 점차로 확신하게 되었다. 장개석의 막강한 정규군을 배제하고 섬북지방에 갇혀있던 소수 홍군의 게릴라 병력만으로 중국 전 지역에 걸쳐 일본과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모하고 불가능한 일이었다.

장개석을 포용한다는 것은 공산당에겐 엄청난 정치노선의 변화, 더 나아가면 무모한 모험일 수도 있었다. 섬북지방의 마지막 남은 보루마저 일거에 삼키려드는 장개석과 협상해서 통일된 민족전선을 형성한다는 것이 당시의 중국 공산당에겐 일종의 투항일 수도 있고, 투항까지는 아닐지라도 중공당의 정체성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의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냉철하게 현실을 진단해 볼 때, 국민당과의 정치적, 군사적 대결을 거두고 서로 협력해서 항일하는 길만이 공산당이 사는 길이었다. 공산당은 장학량을 지렛대로 삼아 국민당의 장개석과 협상하려고 했다.    

서안사변이 마무리된 뒤에 모택동이 한, 다음과 같은 발언은 주은래의 꾸준한 설득의 결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장학량은 장개석이 무사히 남경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공을 전적으로 주은래에게 돌렸기 때문이다.
“우리 조국이 적에게 유린당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고 만다. 국가적 자유를 박탈당한 민족에게 주어지는 혁명적 임무란 조속한 사회주의의 실현이 아니라 독립을 찾는 투쟁이다. 우리가 공산주의를 실현할 나라 그 자체를 잃는다면 아예 공산주의를 논의할 수조차 없게 되는 것이다…공산당이 서안사변에서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고 또 그것을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 한 것은 전적으로 민족생존의 견지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만일 내전이 확대되고 장학량, 양호성이 장개석 씨를 장기간 구금한다면 사변의 진전은 일본제국주의와 중국 토벌파에게만 유리하게 될 것이었다.”

현실 적응에 있어서 모택동의 탁월한 변화능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 서안사변을 계기로 모택동의 통일전선 전략은 점차 탄력을 받기 시작했고 그의 리더십도 본궤도에 오르게 된다. 그 후 중공당의 이 통일전선 전략은 越盟 등 많은 공산주의 나라들로 수출되어 재미를 보았다. 북한의 대남전략도 기본적으로는 통일전선 전략의 큰 테두리 안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중국 상해의 復旦대학출판사에서 발행한 ‘격동의 100년 중국(百年激蕩.100年的圖文經典)’의 한국어 번역판(일빛 발행)을 보면, 당시 저명한 기자였던 范長江의 서안사변 취재기사도 실려 있다. 먼저 주은래를 만난 장면부터 옮겨 보자.

“4일 오후, 친구의 소개로 양호성의 공관에서 주은래 선생을 만났다. 그는 또렷하면서도 소박한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검고 거친 턱수염은 깨끗하게 밀어버린 상태였으나 피부 밑의 모근은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잿빛 솜옷에 사병들이 쓰는 요대를 차고 있었다. 발에는 각반이 감겨 있었다. 우리는 홍군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선생의 이름은 모두 잘 알고 있지요. 선생이 우리 당과 홍군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면서도 우리의 행동에 대해 연구하고 분석한 일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악수를 나누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범장강 기자는, 당시 소비에트 지구에서 중공당 지도자와 최초로 공개회견을 하기 위해 중국 언론이 공식으로 파견한 기자였다. 회견 장소는 抗日軍政大學이란 이름의 홍군대학이었다. 정문에서부터 그를 환영하는 문구들이 늘어있었는데, 그는 그러나 글귀 가운데 “환영합니다. 선생! 중국인은 중국인을 때리지 않습니다”라는 내용은 떨떠름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국민당 쪽에서 언론활동을 하던 범 기자에게 중공당의 선전구호인 ‘中國人不打中國人’은 아무래도 듣기가 거북했을 것이다. 국민당은 일본인과 싸우지 않고 중국인만을 친다고 비방하는 말과 같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그는 이번 취재를 통해 중공당 지도자들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모택동에 관련된 대목만 골라보겠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특이한 영웅이리라 상상하면서도 서생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학문이 깊고 온화하며, 걷는 모습에서도 마치 諸葛亮과 같은 山人의 분위기가 느껴졌다…그후에 나는 모택동의 동굴 거처로 가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착해보니 벌써 밤 10시였다. 그의 동굴 안에는 침구를 제외하고 나무 의자 하나, 책상 등받이가 없는 나무 의자, 목탄 한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나무 책상 위에는 수많은 종이들과 경제학, 철학 관련 서적들이 놓여 있었고, 촛불이 켜져 있었다…그는 머리를 과도하게 사용한 탓에 뇌혈관이 팽창하여 자주 흥분하고 쉬 잠을 이루지 못해서 신경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그는 평소에 책을 즐겨 읽는 데다 여론의 추이에도 관심이 많아 나와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분명하게 나눌 수 있었다. 그는 전략에 관한 이야기를 가장 좋아했다. 알고 보니 그는 홍군대학에서 전략에 관련된 강의를 하고 있었다. 전략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니 더 활기차 보였다”

이것이 서안사변 직후 모택동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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