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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요코이야기 파문 / 김학이 동아대
[문화비평] 요코이야기 파문 / 김학이 동아대
  • 김학이 동아대
  • 승인 2007.03.13 14: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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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터졌다. 늘 귀환하고 또 그만큼 절실한 이야기. 한국과 일본의 과거 문제다. 이번에는 특별하다. 일본 정치가의 폭력적 퍼포먼스가 아니라, 일제 패망 직후 한반도를 종단한 끝에 일본에 도착한 일본인 여성 요코 가와시마 왓킨슨의 ‘체험’ 소설 “대나무 숲 저 멀리,” 일명 ‘요코이야기’가 소란의 진원지다. 1945년 당시 11살이었던 저자는 귀향길에 한국인들에게 쫓겼을 뿐만 아니라 강간 장면도 목격했다는 것인데, 나는 역사적 사실 자체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가 되는 그 해 7월과 8월의 한반도는 아직도 일본의 무력이 견고했기에 박해와 강간이 대량으로 발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한 질서가 붕괴되던 그 시점에 국지적으로는 그런 사태가 발생했을 수도 있다.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소설과 그에 대한 반응의 역사문화적 맥락이다. 나는 요코씨의 진정성을 믿는다. 그녀는 여느 소설가처럼 분명히 자신의 체험을 있는 그대로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체험의 기록이 아니라 재현이다. 그것이 소설이 아니라 수기에 입각한 기억이었어도 마찬가지다. 기억은 체험의 재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억은 아무리 개인적인 것이라고 해도 ‘대부분’ 사회적이다. 인간은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장려되는 기억에 준거해서 자신의 사적 체험을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요코이야기에서 놀라운 것은, 그것이 원폭 피해에서 도출된 현대 일본의 공적 기억, ‘피해자로서의 기억’에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요코씨의 체험은 현대 일본을 정초(定礎)해낸 창건신화, 다시 말해 ‘문화적 기억’의 일부인 셈이다.

 문제는 그 소설에 대한 한국인의 반응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요코씨가 자신을 일본판 안네 프랑크로 만들었다고 한국 네티즌들이 분노한 것은, 그 이야기가 현대 한국을 정초해낸 피해자로서의 문화적 기억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일부 한국의 지식인들도 마찬가지다. 전쟁 직후 일본이 여전히 한국인을 핍박한 현실이라든가, 한국인이 일본인을 도운 예들을 소상히 밝힌 뒤에야 부분적인 가해 사실을 말해야 한다는 논리는, 피해자로서의 한국의 정초기억을 훼손할 수 없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요코이야기를 둘러싼 소란은 한일 두 나라의 문화적 기억이 충돌하여 벌어진 일이다.

 모든 민족 공동체는 문화적 기억을 보유한다. 그러나 문화적 기억은 ‘대부분’ 분열된 자아를 낳는다. 전후 프랑스는 레지스탕스를 문화적 기억으로 삼았다. 따라서 전쟁 중에 자발적으로 히틀러에 협력했던 비시 프랑스의 존재와 유대인을 자체 수용소에 가두고 학살 수용소로 이송했던 기억은 억압되고 말았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와서 그 어두운 기억은 고통스럽게 귀환하였고, 그 후 프랑스는 도리어 그 기억에 가위눌리게 된다. 일부 잔존하고 있던 나치 부역자를 처벌한다고 난리법석을 떠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전후 독일의 문제는 새삼 거론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는 우리가 요코이야기를 두고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우리는 피해자와 항일이라는 우리의 정초기억을 방어하기 위해 가해와 암묵적 공범의 가능성에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친일파에 대한 역사적 규명을 그만두자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가해와 공범의 이야기를 어떻게 ‘새로운’ 미래를 위한 재료로 삼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 새로움이 추상적인 것만은 아니다. 나는 요코이야기에 한국인들이 분노하기만 할 뿐, 아파하지 않는 현실에서 참담함을 느꼈다. 그러나 아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여성주의 시각에서 요코이야기를 바라보는 분들이었다. 그들은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기억이 아닌, 두 나라 여성들 모두가 일제의 피해자였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런 길을 가다보면 우리 역시 도덕공동체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경제주의로부터 벗어난 그 날에 우리는 제2의 요코이야기에 분노하기보다 아파하게 될 것이고, 그 때 비로소 공범 및 가해자로서의 기억이 고통스럽게 귀환할 것이다.

김학이 / 동아대 독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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