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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의 생동감, 제대로 된 ‘이야기체’가 좌우
원작의 생동감, 제대로 된 ‘이야기체’가 좌우
  • 교수신문
  • 승인 2007.03.12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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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 비평_최고 번역본을 찾아서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백년의 고독)』

매끄러운 번역보다 작가의 실험정신·독특한 문체가 ‘질’ 결정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은 1977년 안정효가 문학사상사를 통해 처음 번역한 이래 현재까지 근 10회 가량 번역된 것 같다. 조구호가 번역한 민음사 판은 제목이 <백년의 고독>이다. 그런데 직역은 임호준(고려원미디어, 1996), 조구호(민음사, 2000) 두 역자에 의해 이루어졌을 뿐 나머지는 다 중역이다. 그나마 임호준 번역본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절판된 지 오래이다. 안정효 번역본의 경우 여전히 찾는 독자들이 꽤 있다는 점이나 작년에도 중역본(이가형 역, 하서출판사)이 또다시 출간되었다는 점은 아주 유감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무엇보다도 먼저 밝히고 싶다.

이 글에서는 안정효, 임호준, 조구호 번역본에 대해 몇 가지 개인적인 의견을 내보려고 한다. 필자 역시 가르시아 마르케스 작품을 번역해 본 경험이 있어서 <백년 동안의 고독> 번역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충분히 짐작이 되며, 한 분은 검증된 번역가요 나머지 두 분도 아무렇게나 번역을 할 이들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번역 평을 의뢰받은 이상 주례사 비평으로 지면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 고전은 앞으로도 계속 번역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필자 의견이 옳든 그르든 간에 번역에 대한 토론이 필요하다고 본다.



로든 윌슨이라는 미국 평론가는 가르시아 마르케스 전문 번역가 라바사의 영역본 단편 한 편을 각각 아홉 살, 여섯 살의 자녀에게 읽어주었더니 얼이 빠져 듣고 있었다고 말한다. 동화도 아니고 눈으로 보는 것도 아닌데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으려면 문체가 대단히 생동감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 생동감이 바로 상당 부분 이야기체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마르케스가 어린 시절 외조모에게서 들은 옛날이야기들을 상당 부분 반영시킨 작품이라는 것이 작가의 말이다. 그런데 번역본들은 가령 작품 첫 부분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몇 년이 지나서 총살을 당하게 된 순간에,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오래 전 어느 오후에 아버지를 따라 얼음을 찾아나섰던 일이 생각났다.”(안정효)
“수많은 세월이 흐른 후 총살대에 선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얼음 구경을 나섰던 그 아득한 오후를 생각했을 것이다.”(임호준)
“많은 세월이 지난 뒤, 총살형 집행 대원들 앞에 선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아버지에 이끌려 얼음 구경을 갔던 먼 옛날 오후를 떠올려야 했다.”(조구호)

모든 번역자가 공통적으로 종결어미 ‘-다’를 사용하고 있다. 종결어미 ‘-다’야말로 우리 문학에서 구어체에 대한 문어체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다. <백년 동안의 고독>의 이야기체를 살리려면 ‘-으리라’, ‘-지’ 등의 종결어미를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마르케스도 지식인이요 문단이라는 제도에 편입된 작가이기에 <백년 동안의 고독>을 완벽한 구어체로 쓰지는 않았다. 따라서 전체를 다 완벽한 구어체로 번역할 필요는 당연히 없다. 하지만 이야기체가 이 작품의 중요한 글쓰기 전략이니만큼 작품 첫 머리는 <백년 동안의 고독>과 다른 문학 작품들과의 차별화를 위해서라도 구어체 번역이 필요한 대목이 아닌가 싶다. 이 작품의 이야기체를 더욱 맛깔나게 하는 것은 카리브 해 주민 특유의 수다스러움이 가르시아 마르케스에게도 배어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오랜 세월 뱃사람으로 떠돌다가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돌아온 호세 아르카디오에 대한 묘사이다.
“그의 피부는 바닷바람에 검게 그을렸고, 머리카락은 노새의 털처럼 짧고 뻣뻣했으며, 턱은 쇳덩이같이 단단했고, 얼굴에는 구슬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안정효)

“바람과 햇볕에 시달린 살갗은 검게 그을려 있었고 머리털은 노새의 갈기처럼 짧고 빳빳했으며 턱은 무쇠같이 단단해 보였으나 눈매에는 웬지 모를 쓸쓸함이 고여 있었다.”(임호준)
“몸은 바닷바람에 검게 그을려 있었고, 머리카락은 노새 갈기처럼 짧고 뻣뻣했으며, 턱은 무쇠처럼 단단해 보였고, 애조 띤 시선을 지니고 있었다.”(조구호)

원전에서 이 대목의 동사는 ‘ten뭓’ 단 하나 뿐인데 번역본들은 공통적으로 서술어가 네 개나 된다. 그러나 서술어를 네 개씩 사용해서는 수다스러움을 살리기 쉽지 않다. 언뜻 보아서는 서술의 양이 더 많아지니 더 수다스러운 번역처럼 보이지만 문장 전체의 호흡이 길어져서 구어체 묘사가 아니라 문어체 묘사처럼 느껴진다. 묘사의 경쾌함이나 속도감을 유지하는 것이 수다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효과적이며 그러자면 아무래도 서술어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 좋다. ‘바닷바람에 그을린 살가죽, 노새 갈기처럼 짧고 빳빳한 머리털, 무쇠턱, 처량한 시선을 하고 있었다.’ 정도의 번역이 좋지 않을까 싶다.

물론 늘 수다스러움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야기체를 살리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이 작품이 마술적 사실주의를 대표한다는 인상을 확실하게 심어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두 가지 전략을 주로 구사하는 데 한 가지는 수다스러움, 즉 말의 성찬과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지만 또 다른 하나는 이와 반대로 담백하고 간결한 서술 전략이다. 언뜻 보아서는 양립하기 힘든 전략 같지만 화자의 천연덕스러움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 화자가 현실에서 존재하기 힘든 사건을 서술하면서 때로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허풍을 늘어놓는 듯한 서술을 하고, 또 때로는 황당무계한 사건을 마치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식으로 담담하게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호세 아르카디오가 피살되고 그 피가 모친을 찾아가는 마술적 대목이 바로 후자의 경우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 … 부엔디아 가문의 집 앞에서 직각으로 방향을 틀어 닫힌 문 밑으로 들어가서는 양탄자를 적시지 않으려고 벽을 타고 응접실을 건너, 계속해서 다른 거실을 건너고 … ”(조구호)

이런 대목은 상당히 간결하게 전개되고 있고 위 인용문에서처럼 차분하고 논리정연하게 번역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말의 성찬이 전개되는 대목에서는 이러한 차분함이나 논리정연함은 사라지고 두서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듯한 인상을 주고 허풍도 마다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다음은 미녀 레메디오스가 승천하는 대목이다.

“미녀 레메디오스는 … 아무리 높이 나는 새도 쫓아가지 못할 만큼 높은 창공으로 영원히 사라졌다.”(안정효)
“미녀 레메디오스는 … 아무리 높이 나는 새도 올라갈 수 없을 만큼 높이 날아 창공으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임호준)
“미녀 레메디오스를 실은 침대 시트들은 …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높이 나는 새들도 쫓아가지 못할 만큼 높은 창공으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조구호)

마지막 구절은 원전을 직역하자면 “기억의 가장 높은 새”(los m뇋 altos p뇂aros de la memoria)이다. 원문 자체가 뜻을 명확히 전달하기에는 뭔가 매끄럽지 않다. 그런데 번역문들은 이를 풀어서 번역하여 독자들에게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다. 하지만 만일 저자가 이 대목에서 황당무계한 사건 앞에서 차분하게 말을 잇기 힘들어하는 화자를 상정했다면 인용문에서처럼 풀어서 하는 번역이 정당한 것일까. 이 대목이 반드시 그런 대목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원전에는 이런 느낌을 주는 대목이 많은데, 이를 모두 ‘매끄럽게’ 번역한다면 저자의 의도를 크게 훼손하는 것이 된다. 가독성은 그저 번역의 기본일 뿐이다. 가독성이 담보된 번역문은 제 의무를 다한 것이지 그것만으로 뛰어난 번역은 아니다. 문학 작품 번역에서 번역의 질은 때때로 작가의 실험정신 내지 독특한 문체를 얼마나 충분히 살리는가로 판단되어야 하고 필자가 보기에 <백년 동안의 고독>이 바로 이런 경우이다.

우석균 / 서울대·중남미문학
 
필자는 Universidad Complutense de Madrid에서 ‘호르헤 에드와르즈 소설의 상상과 현실의 갈등’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바람의 노래 혁명의 노래(라틴아메리카 문화기행)>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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