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05:25 (토)
[강의스케치] 김민수 교수의 한국 디자인계 1세대 비판
[강의스케치] 김민수 교수의 한국 디자인계 1세대 비판
  • 이옥진 기자
  • 승인 2001.09.2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1-09-25 16:15:41
“한국의 디자인계 1세대는 ‘역사적 치매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원로교수들의 친일문제를 논문에서 언급했다는 ‘괘씸죄’로 지난 98년 재임용 심사서 탈락한 김민수 전 서울대 교수(디자인학부)의 ‘디자인과 생활’ 무학점 강의 첫번째 교실에서 나온 언급이다. 강의실을 초가을의 열기로 메운 40여 명의 학생들. 그들은 김 교수의 설명이 던지는 파격에 적잖이 놀란 인상이다.

첫날 강의실에서 ‘동종교배를 넘어서 : 한국과 일본 그래픽 디자인의 정체성’이라는 주제로 김 교수가 시도하는 것은 한일 디자이너 사이의 유전적 유사성의 계보도 그리기. 한국의 원로들이 얼마나 무분별하게 일본 디자이너의 기법과 이미지만을 차용해왔는지 밝혀내는 중이다.

김 교수의 강의는 한국 디자인의 정체성에 대한 정면도전이다. ‘한국 디자인계의 대부’라고 불리고 지난해 서울대 미대를 정년퇴임한 조영제 교수의 작업에 대한 해석이 그 대표적인 예. 김교수는, “조 교수에게는 일본 디자이너들의 유전자 코드가 충돌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김 교수의 비판은 신랄하다. “조영제 교수의 유전자에는 일본 디자인계의 원로인 다나카 잇코, 가메쿠라 유사코, 그리고 후쿠다 시게오가 ‘동종교배’되어 있습니다.” 조 교수는 지난 88년 서울올림픽 당시 공식포스터를 만들고 디자인 총지위를 맡았던 바 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조 교수가 제작한 ‘어변성룡’(1999)에서는 다나카 잇코가 그린 ‘문자의 상상’에서 차용된 기법이, ‘2002년 월드컵’(1999), ‘오감도’ 등에서는 가메쿠라 유사코의 ‘빛의 형상화’ 기법이 무비판적으로 도용되고 있다. 슬라이드를 통해 학생들의 눈앞에서 재현되어 연속비교되는 짝패들은 그 닮음의 여실함을 증거한다.

김 교수의 문제의식은 단편적인 닮음에 대한 직설적 비판을 넘어선다. “한국 원로 디자이너들의 작업에서 우리 디자인의 정체성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일본의 기법만 차용했을 뿐 이 땅에서 우리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지를 않지요. 정체성도 없고 철학도 없이 일본의 잔재에 매달렸다는 것이 비극일 뿐입니다.”

김 교수는 2001년 2학기로 7학기 째 무학점 강의를 지속하고 있다. “앞으로 7년은 더 강의할 생각이다”는 농섞인 말은 김 교수의 오랜 싸움의 이력을 보여준다. 김 교수의 강의는 입소문을 타고 알려져, 회를 거듭할수록 수강생이 늘어가고 있다. 한시간을 망치면 강좌 전체를 망친다는 긴장 속에서 강의의 내실이 채워지기 때문이다.

이번 학기의 강의내용은 최근 4년동안 김 교수가 연구해 왔던 주제로, ‘디자인 문화비평 5호’에 실릴 예정이다. 최근 김 교수는 재임용 탈락에 불복하여 학교측과의 소송에서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한편, 김 교수의 비판당사자인 조영제 교수는 “‘빛의 형상화’기법은 가메쿠라 유사코 외에도 많은 작가들이 쓰던 기법이며, 88올림픽 포스터는 일본작가와 함께 최초로 컴퓨터 기술을 도입했으므로, 베꼈다는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밝혔다.
이옥진 기자 zoe@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