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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道는 과연 中間지대인가
中道는 과연 中間지대인가
  • 신동준 편집국장
  • 승인 2007.02.24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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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본사 편집국장

요즘 정계와 학계에서는 中道가 화두이다. 대권주자들이 하나같이 중도를 표방한데 이어 원내 제1당으로 부상한 한나라당이 중도층의 공략방안을 집중 논의하고 열린우리당의 탈당 의원들마저 ‘중도개혁’을 표방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이는 중도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전 국민의 40%에 육박하고 있는 사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현재 중도논쟁은 각 대학의 여러 교수들이 각종 세미나와 지상의 논쟁에 대거 참여하면서 날로 뜨거워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논쟁에는 중도의 실체를 주장하는 김형준(국민대 정치학)과 뉴라이트의 이론적 대부인 박세일(서울대 법경제학), 뉴레프트의 선도자인 임혁백(고려대 정치학), 진보진영의 대표적 이론가인 홍윤기(동국대 철학), 보수진영의 이론을 선도하는 유석춘(연세대 사회학) 교수 등 학계의 대표적인 논객들이 모두 참여하고 있다.
중도에 대한 이들의 견해는 크게 3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정통 우파적 가치를 확산시키면 능히 중도층을 흡수할 수 있다는 견해와 범여권에서 그럴듯한 대선후보가 나오면 중도층이 대거 옮겨갈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 중도개혁의 흐름이 하나의 대세로 자리 잡고 있는 만큼 중도층을 적극 공략해야 한다는 견해 등이 그것이다. 이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견해는 기본적으로 중도를 부동층의 유동적 중간지대로 보는데서 출발하고 있다.

隨時變通과 自强不息

그러나 원래 동양 전래의 역사문화적 맥락에서 보면 중도야말로 이념적 본류에 해당한다. {주역}의 ‘得中道’와 {중용}의 ‘從容中道, 聖人也’ 구절 등이 그 증거이다. 주역[小過卦]에서 말하는 ‘小者過而亨’은 작은 것이 지나치게 행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그 잘못을 교정하면 쉽게 중도를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대개의 사물은 좌우의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 있는 게 보편적 현상이라는 전제에서 나온 것이다.
{주역}[恒卦]에서는 불변의 이치를 뜻하는 ‘恒久之道’의 의미를 때에 맞춰 應變하는 소위 ‘隨時變通’에서 찾고 있다. 주역은 이를 ‘唯變所適’으로 표현해 놓았다. 이는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의 존재를 끊임없이 변화하는 天道의 자기전개 과정으로 파악한데 따른 것이다. 주역이 소위 ‘自强不息’을 역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변역논리의 요체로 인간의 理智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전제로 한 것이다.
‘唯變所適’의 이치는 동양의 모든 고전에 두루 반영돼 있다. 손자병법의 ‘兵無常勢’와 도덕경의 ‘上善若水’, 논어의 ‘未可與權’, {불경}의 ‘不立文字’ 등이 그 실례이다. 이는 중도를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한 것으로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언급한 소위 ‘Mesotes’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過不足의 이념적 편향성을 지양한 종합적인 균형 상태가 바로 중도인 것이다. {주역}의 ‘유변소적’은 절대적으로 길하거나 흉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 까닭에 좌우의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이념 자체를 거부한다. 이는 결코 보수와 혁신의 중간지대인 회색지대 내지 부동층의 유동적 중간지대가 아니다. 오히려 중도의 관점에서 볼 때 保革이야말로 중도를 기점으로 한 하나의 경향에 불과할 뿐이다.

黑猫白猫論과 治道

중도를 治道의 논리로 구체화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이다. 그가 말한 소위 ‘黑猫白猫論’은 그 어떤 이념도 國利民福의 수단에 불과할 뿐이라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중국의 눈부신 발전은 바로 ‘흑묘백묘론’의 개가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역시 중국과 마찬가지로 틀린 것도, 옳은 것도, 틀리지 않은 것도, 옳지 않은 것도 아닌 중도의 세계가 엄존한다는 사실을 인지한 문화권에서 살아 왔다. 가장 정밀한 논리체계로 구성된 현대수학의 총아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이분법적 접근에 따른 아날로그적 사고의 불길한 종말을 예고하고 있다. 아날로그 시대의 변방에 불과했던 우리나라가 디지털 시대에 들어와 세계를 선도하는 디지털 강국이 된 것도 결코 우연으로만 돌리 수 없다. 우리도 하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세계 최강의 선진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노무현정권의 失政은 일면 중도의 이런 이치를 제대로 파악치 못한데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최고통치권자가 국민들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등으로 나누어 다스리는 한 선진국의 길은 요원할 뿐이다. {주역}이 갈파했듯이 통치의 ‘항구지도’는 오직 ‘수시변통’의 ‘자강불식’만이 존재할 뿐이다.

富民德國과 先進化論

최근 홍윤기 교수가 진보계열의 계간지인 [황해문화] 올해 봄호에서 소위 ‘강한 중도’를 내세우며 중도통합을 외치고 나서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는 “4대 강국이 포진해 있는 현 상황에서 내부분열은 곧 강대국 개입을 통한 민족 공멸을 초래할 수 있다”며 민주화와 산업화의 성과를 통합한 소위 ‘富民德國’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나섰다. 이는 뉴라이트의 박세일 교수가 주장한 ‘선진화론’과 유사한 것이기도 하다. 좌우의 변역논리가 중도논리로 수렴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홍교수의 지적과 같이 격동하는 21세기 동북아시대의 초입에서 작은 성과에 만족해 소모적인 논쟁으로 국력을 소진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자칫 {주역}[旣濟卦]에서 말하는 ‘初吉終亂’의 위기에 처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는 한민족 전체의 공멸을 의미한다. 시간이 우리만을 위해 특별히 기다려줄 리 없다. 주역은 ‘자강불식’하는 자에게 모든 것이 더해진다고 했다. 북핵 등으로 4강국이 한반도를 응시하고 있는 지금야말로 소모적인 논쟁을 그치고 ‘자강불식’의 중도논리로 전 국민의 역량을 하나로 모아 안팎의 난관을 슬기롭게 헤쳐 나갈 때가 아닐 수 없다. 학계의 관련 학자들이 중도의 역사문화적 맥락을 보다 깊이 천착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신동준 / 교수신문 편집국장·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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