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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교수직과 공부길
[學而思] 교수직과 공부길
  • 김혈조 영남대
  • 승인 2001.09.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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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9-10 00:00:00
김혈조(영남대·한문학)


80년대 초 아직 30세가 되지 않은 나이로 지금의 대학에 교수로 발령 받아 떠날 때 지도교수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家長 역할을 해야하는 자네 처지 때문에 그 나이에 교수생활을 하게 된 것은 부득이한 일이네만, 내 솔직한 심정은 딱히 기뻐하여 축하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 그때 나는 갓 박사과정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할 시기였다. 지금 같으면 박사과정에 막 입학한 공부의 초년생으로 대학의 전임이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 때는 그런 일도 있었다. 축하해 마지않을 일을 두고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이유는 무엇이고 어떤 의미였던가.
나의 전공영역은 한문학이다. 한문학을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문학일반에 대한 이론적 공부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한문 독해력을 갖추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런데 한문 독해력을 어느 정도 갖춘다는 일은 쉽지 않다. 옛말에 10년을 공부하면 小成하고, 30년은 공부해야 大成할 수 있다고 했다. 그 연한이란 것도 한학만을 공부하던 선인들의 기준에서 나온 것이다. 잡다한 공부에다 그것도 대학에 진학해서야 본격적 한문 공부를 할 수 있는 오늘의 교육제도로서는 그 연한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다.
선인들의 한학공부에서 책을 읽었다고 하는 것은 그 책을 암송함을 의미한다. 사서오경을 읽었다 함은 곧 사서오경을 암송했다는 말이다. 한문공부는 유년시절부터 암송하는 것 이상의 좋은 방법은 없다. 이 무모한 듯한 암송은 처음에는 더딘 것 같지만, 어느 단계에 이르면 가속이 붙어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수많은 전적이 머리 속에 살아 움직이며 그것의 조합이 독해력을 상승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이야말로 한문의 生理에 푹 젖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문공부는 암송은 없고 단지 중요한 경전을 일별하고 대략 그 뜻만을 파악하면 그만이다. 그 공부방법이 현대적이고 과학적일수록 사실은 독해력 향상을 더디게 하고, 어느 시점에 이르면 한계에 도달하고 만다. 뿌리가 없으므로 좋은 사전을 끼지 않고서는 선인의 웬만한 문장조차도 혼자서 해독하기 어렵게 된다. 게다가 암송이 전제되지 않은 공부는 바른 문장을 한 줄도 지을 수 없게 한다.
나의 한문공부 역시 전통적인 공부와는 다른 것이었다. 대학의 과정 밖에서 개인적으로 스승을 찾아 공부하기도 하고 전문기관에서 소정의 과정을 이수하기도 했지만, 전통시대의 공부의 양에 비한다면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기껏 10여년 공부하고서야 어디 한문의 생리 근처에라도 갈 수 있으며 후학을 지도할 수 있으랴.
그럭저럭 나의 교수생활은 20년을 채워간다. 돌아보면 처음 출발할 때의 한문공부에서 지금 더 나아진 것이 별로 없이 우려먹고 있는 것 같다. 敎學相長이란 말도 있고, 나 혼자 독한 마음먹고 부지런을 떨었더라면 진보가 있었을 터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순전히 나의 탓이지만 나는 교수생활에 그만 안주하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일찍 시작된 나의 교수생활은 기실 나의 한문공부에 발목을 잡은 셈이 아닌가. 은사께서 우려하신 일이 현실이 돼버린 것이다. 사실 선생님은 내가 한문공부에 더욱 침잠해 학문적 축적을 이룬 후에 대학강단에 서도 늦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신 것이다.
배부른 소리라고 핀잔할 수도 있겠고, 나의 게으른 천성 탓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교수가 너무 일찍 된 것이 후회스럽다. 인문학 특히 한문학의 경우 빨리 교수가 되어 안정될수록 학자로서의 개인에게는 득이 될 것이 없는 특수성이 있으므로 조금은 늦게 교수가 되는 것이 좋다.
교수 나이 40세가 지나면 최신의 이론을 따라잡을 수 없어 그저 교양과목만 가르친다는 자연과학의 학문세계와 인문학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인문학은 연륜이 쌓일수록 곰삭은 젓갈과 같아 더욱 맛이 나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의 공채 나이를 일률적으로 40세 이하로 못박고 있는 현실은 인문학도를 참으로 답답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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