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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푸코와 치아』 (사라 네틀턴 지음, 한울 刊)
[이책]『푸코와 치아』 (사라 네틀턴 지음, 한울 刊)
  • 이세영 기자
  • 승인 2000.11.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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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의학을 통해 본 근대 권력의 계보학
살점이 찢기고 피가 튄다. 뼈를 깎는 날카로운 드릴소리. 팽팽한 긴장으로 사지는 경직되고, 극에 달한 공포는 심장의 박동 수를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고통을 호소해 보지만, 가학적인 사내의 손놀림은 쉽사리 그칠 줄 모른다. 입안 가득 비릿한 피냄새가 고여온다.

남영동 대공분실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안심하라. 이건 치과 이야기다. 하지만 ‘남영동’과 치과 진료실은 여러모로 묘한 연상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사실이다. 치과 문을 들어서기 전 아무런 공포감도 느끼지 않는다면, 그는 정말 ‘강한’ 사람이다. 남영동의 ‘칠성판’을 연상시키는 진료의자. 날카로운 탐침과 다양한 크기의 ‘집게들’은 어딘지 중세 지하감옥의 고문도구와도 닮아있다. 이 기구들을 능란하게 다루는 치과의사들이란, 적어도 진료를 하는 순간만큼은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고문기술자들과 다를 바 없다. 물론 ‘치과의사는 정교하고 방대한 지식을 매개로 행동하지 않느냐’라는 반론도 가능하다. 그러나 학습하고 지식을 축적하는 것은 고문기술자들도 마찬가지다. 이근안 역시 오랜 ‘현장경험’을 토대로 사람의 경락과 혈도에 대한 연구서를 집필했다지 않은가.

‘푸코와 치아’. 별난 이름의 책이다. 그러나, 대체 푸코와 ‘이빨’이 무슨 상관이더란 말인가. 원제를 보니, 웬 걸. ‘Power, Pain and Dentistry’라는 비교적 무난하고, 학술적인 이름이다. 저자는 영국 요크대학 교수로 재직중인 사라 네틀턴. ‘의료사회학’이 전공인 여자 사회학자다. 저자가 의지하는 방법은 철저하게 ‘푸코적’이다. 무엇보다 치의학을 근대 ‘지식-권력’의 주요한 사례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책은 치의학이 의학에서 독립된 분과학문으로 자리잡게된 배경을 ‘역사적’으로 탐구해 나간다. 그러나 단순한 ‘치의학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는다. 저자의 지적 호기심은 ‘치의학이 어떻게 생겨나고 발전해왔는가’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강과 치아가 어떻게 창조·재창조되었으며 치의학적 규율은 어떻게 작동하게 되었는지”를 규명하는 것에 놓여있는 까닭이다. 말하자면 저자는 치의학이란 담론과 연루된 ‘권력의 계보학’을 써내려가고 있는 셈이다.

네틀턴에 따르면 치의학의 대상은 단순한 ‘구강’이 아니다. 그것은 몸에 대해, 그리고 개인과 전체주민을 대상으로 작동하는 지식-권력이며, 치과 진료란 결국 근대에 확립된 전형적인 기술적 통제 메커니즘의 하나일 뿐이다. 이 가운데 저자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구강검사’다. 그는 이것을 “신체를 관찰·분석하는 규율권력의 대표적인 기법”, 다시 말해 “입을 관찰하고, 치아 상태를 세밀히 기록하며, 결함을 바로잡고, 올바른 구강관리를 가르침으로써” 유순한 신체를 만들어내는 근대 규율권력의 전형적인 작동기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가 볼 때, 치의학적 지식과 권력의 관계가 “가장 명료하고 효과적으로 드러나는 곳”은 ‘치과병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검사와 진료가 이루어지는 곳이 다름 아닌 치과병원이기 때문이다. 이 때, 치과병원의 의미는 이중적이다. 우선 그곳은 개인의 입에 대한 관찰을 기초로 전체주민의 구강에 대한 집합적 자료가 생성되는 공간이다. 한편으로 병원은 축적된 지식의 데이터베이스를 기초로 개인의 신체에 대한 평가와 교정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병원은 ‘감시’의 두 가지 차원(개인적·집단적)이 교차하는 지점이며,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검사’와 ‘진료’는 근대적 지식/권력이 행사되는 주된 작용점인 셈이다.

이 책은 저자가 자인하듯 전적으로 푸코의 논리에 의존하여 씌어진 책이다. 하지만 독창적 사유와 방법이 결여된 ‘2급 학술서’라 치부하기엔 왠지 개운치 않다. 치의학적 지식/권력에 대한 계보학적 연구인 이 책이 의약분업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의 의료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까닭이다. 네틀턴의 문제의식에 동의한다면, 비판의 가늠자는 히포크라테스 정신의 유무가 아니라, 시민의 통제와 개입을 불허하는 의료권력, 보다 정확하게는 근대의 지식/권력 자체에 맞춰져야 옳은 지 모른다. 의료의 공공성이란 무엇인가. 지식/권력의 변화 가능성은 열려있는가. 여전히 남아있는 질문들이다.
이세영 기자 syle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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