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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로 세평]정권을 위한 苦言
[신문로 세평]정권을 위한 苦言
  • 도정일 경희대
  • 승인 2001.09.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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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9-12 17:55:03

도정일
경희대·영문학

국내 신문에도 더러 인용됐지만, 지난 달 28일자 뉴욕타임스는 대도시 시카고가 벌이고 있는 ‘한 권의 책 같이 읽기’ 운동을 보도한 바 있다. 8월 25일부터 시작해서 10월 14일까지 7주 동안 될수록 많은 시민들이 참여해서 같은 기간에 같은 책을 읽고 토론하고 공통의 화제를 발견해보자는 것이 이 시카고판 ‘책 읽는 사회’ 만들기 운동의 골자이다.

이 운동은 시카고 시립도서관 당국이 주관하고 있지만, 리차드 댈리 시장이 직접 나서서 시민들의 적극 참여를 호소하는 통에 대단한 호응을 얻고 있다는 소식이다. 선택된 책은 무슨 인터넷 관련 서적도, ‘정원 이쁘게 꾸미는 법’이나 ‘나이를 거꾸로 먹는 법’ 같은 이른바 ‘하는 법’(how-to) 계열의 책도 아니다. 지금 시카고가 읽고 있는 것은 41년 전에 나온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이다.

이 소설은 지난 40년 동안 미국 거의 전역의 고등학교와 공공도서관의 권장도서 목록에 올라 있었기 때문에 상당수 미국인에게는 친숙한 작품이다. 남부 앨러배머 한 시골 소읍에서의 인종갈등을 큰 졸가리로 삼으면서도 그 갈등의 와중에서 인간의 품위와 사랑에 눈뜨고 사회 정의가 무엇인지를 배우며 자라는 세 소년 소녀의 성장의 드라마가 거기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카고가 이 소설을 선택한 것은 작품 주제가 인종분할과 갈등, 인권 등 지금 시카고의 문제에 곧장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중요한 배려도 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의 가치와 독서문화의 중요성을 망각하지 말자는 것이 그것이다. 거기에는 ‘한 사회가 비디오나 게임에만 빠져 있어도 되는가?’라는 질문이 있고 ‘아니다’라는 확고한 판단이 들어 있다.

한국의 자라는 세대를 ‘게임 중독자’가 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은 김대중 정권의 현저한 업적 가운데 하나이다. 지금 초등학생들 사이에서의 게임은 거의 열풍의 수준에 있다. 게임을 하지 않거나 게임에 서투른 아이는 ‘왕따’의 가장 확실한 대상이고, 신판 게임을 잽싸게 터득한 아이는 또래들 사이에서 단연 선망의 대상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요구하는 새 버전의 게임을 사대느라 헉헉거린다.

대학생들은 어떤가? 강의 빼먹고 왼종일 게임에 빠져 있는 대학생도 있고 며칠씩 집에 들어가지 않고 게임방에서 눈 뻘개져 밤을 지새는 친구들도 있다. 이런 게임 중독현상이 어째서 정권의 책임인가, 미국이나 일본은 안 그런가, 게임문화의 확산과 매혹이 정부 정책의 결과인가고 우리 정부 사람들은 반박하고 나설지 모른다. 그들에게는 이런 질문을 되돌려줄 수 있다. ‘게임만 잘해도 대학 간다’고 외쳐댄 것은 이 정권의 문화관광부 장관이 아니었던가? 외환위기 극복을 내세워 교육과 돈벌이를 완전히 혼동하고 ‘돈만 잘 벌면’ 모든 것은 정당하다는 멘탈리티의 전 사회적 확산을 부추긴 것은 이 정권이 아니던가? 디지털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처럼 신기술 만능주의 이데올로기의 거품에 함몰되어 ‘사회’와 ‘시장’을 구별하지 않고 오락과 문화를 구별할 능력의 거의 완벽한 마비를 보이고 있는 것도 지금의 정권 아닌가?

좀 혹독한 비판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천만에, 이 정권의 고위 정책 당국자들이 취하는 태도를 생각하면 이 정도의 비판으로는 오히려 충분하지 않다. 기술주의, 기능주의, 시장유일주의에 이처럼 헌신적이었던 정권을 우리는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이 정권은 이런 비판을 ‘문제의 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게 뭐가 잘못인가? 디지털 정보화 분야에서 우리는 지금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선두주자이다’라며 되받아 치고 나선다. ‘책? 인터넷 시대에 무슨 놈의 책이냐?’고 그들은 반문하고, 공공도서관을 더 지어야 한다고 말하면 ‘인터넷 시대에 도서관이라니?’라며 아주 놀랍다는 표정을 짓는다. ‘전자책이 나오는 판에 종이책이라고?’라는 것도 그들의 전형적 반응 가운데 하나이다.

시각쾌락과 오락이 사회를 지배하고 기술적 方法知가 지식의 다른 많은 형태와 형식들을 압도할 때, 일회성 즉각 정보가 다른 내구적 정보들의 가치를 박탈할 때, 사회가 건강성과 풍요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그들의 안중에는 없어 보인다.
근본적 질문을 질문으로 여기지 않는 정권은 ‘기본이 있는 사회’를 만들 능력이 없다.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고 어떤 사회를 지향해야 하는가라는 목표를 부단히 생각하고 주요 정책의 수립과 추진을 긴 안목의 사회철학적 기조 위에서 진행시킬 줄 아는 정권만이 기본이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기본이 없는 사회는 민주주의를 할 수도 없고 국민이 사랑하고 자랑할만한 나라를 만들 수도 없다. 너무 늦기 전에, 퇴임 이전에, 이런 사회 만들기의 능력을 서둘러 회복하지 않는 한 현임 정권은 다른 많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국가 수립 이후 반세기를 통틀어 ‘사회 천박화’에 가장 많이 기여한 정권이라는 부끄러운 평가를 모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이 정권의 성공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의 우정어린 비판이자 경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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