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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스케치 : 학부제 이후 달라진 강의실 풍경
현장 스케치 : 학부제 이후 달라진 강의실 풍경
  • 손혁기 기자
  • 승인 2001.09.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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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9-12 17:52:25
구 소련이 개방정책을 펼쳤던 90년대 초반 우리나라 대학가에서는 ‘노어노문학과’가 한때 빛을 발했다. 각 대학들도 학과신설에 열을 올렸다. 성균관대도 1993년 노어노문학과를 신설했다. 그러나 이후 소연방이 해체되고 몰락의 길을 걸으면서 노어노문학에 대한 대학가의 관심은 금방 시들었다. 이때 우후죽순처럼 신설한 노어노문학과는 학부제 시행이후 꿔다 논 보릿자루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성균관대에서 1999년 노어노문학 정원은 50명이었지만, 전공 희망자는 11명뿐이었다. 2000년 전공정원을 39명으로 줄였지만 지원자도 덩달아 줄어 7명, 올해는 단 3명만이 노어노문학을 지원했다. 대학측은 영어영문학, 중어중문학 등 인기전공을 신청한 학생들 가운데 성적순으로 우선 배정하고 남은 학생들로 노어노문학 전공의 모자라는 머릿수를 채우지만 이들은 최저 전공학점만을 채우면 이내 다른 전공강좌를 수강하러 떠나버린다.

지역학으로 변신꾀하는 어문학

러시아가 힘을 잃은 반면, 최근 시장개방정책으로 뜨고 있는 국가는 단연 ‘중국’. 대학가의 관심은 다시 이곳으로 몰리고 있다. 이화여대에서 외국어영역 교양과목으로 개설한 ‘기본 중국어 강좌’, 한 반의 수강인원을 30명으로 제한한 이 강좌는 해마다 수강신청인원이 늘어 이번 학기 30개 반을 개설했지만 아직도 희망하는 학생들을 전부다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

중어중문학, 불어불문학, 독어독문학을 하나의 모집단위로 묶어놓은 이화여대에서는 70%정도의 학생들이 중어중문학을 1차 전공으로 선택한다. 그러나 이처럼 학생들이 몰리는 전공이라고 해서 수혜받은 학과라고 단정하기는 이르다. 이 대학 심소희 교수(중어중문학전공)의 요즘 고민은 ‘중어중문학’에 관한 학문적 고민보다는 학부교육의 새로운 교육방향 모색에 맞춰져있다. 학생들의 주된 관심사가 당송의 시나 중국의 문학사가 아니라 ‘중국’이 가지는 졸업이후의 실용적 활용성이다보니 이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강좌를 개발하는데 맞춰질 수밖에 없다. 전공명칭은 ‘중어중문학’이지만 현대의 중국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를 더 많이 요구하고 있다.

반면, ‘중어중문학전공’과 한데 묶여있는 ‘독어독문학전공’은 학부제 이후 비인기 전공이 받는 설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올해 ‘독어독문학’을 전공하겠다고 지원한 학생은 외국어문학부 2백명 가운데 12명, 최근 3년 내에 이와 비슷한 수준이다. 이러다보니 지원한 학생들도 ‘독어독문학’에 관심 있는 ‘특이한’ 학생 몇몇을 제외하고는 외국어고등학교에서 ‘독일어’를 전공했거나, 독일에서 조기 유학했던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학생이 적다보니 심화된 전공과목은 폐강되기 일쑤, 정말 ‘독문학’에 관심 있던 학생들이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점차 차단되고 있다.

현대 감각에 맞게 커리큘럼을 개발하려는 전공교수의 노력도 학생들의 외면으로 수포로 돌아가기 십상이다. 이 대학의 최성만 교수는 ‘교양시사독일어’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지역학의 의미를 담고, 최근 인터넷 자료들을 활용하는 등 강의 내용을 알차게 꾸몄다. 수강했던 학생들로부터 최우수 강의평가를 받은 강좌다. 졸업한 학생들로부터도 대학을 다니면서 가장 알찬 강의, 도움이 되는 강의였다는 감사의 메일도 몇 차례 받았다. 그러나 이 강좌도 지난 학기에는 폐강신세를 면치 못했다. 이번 학기에는 간신히 수강 최소인원을 넘겨 강의가 진행되고 있다.

최 교수에게는 강좌운영 말고도 또 한가지 커다란 고민이 있다. 10년전 독문학을 선택하고 이제 박사학위를 받아 나름대로의 결실을 맺어 가는 후학들의 문제다. 각 대학들마다 독문학 강좌를 폐강하다보니 이들이 강단에 설 기회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들이 독문학을 선택할 때는 동·서독 통일로 한참 독일에 대한 관심이 고조 됐을 때였다.

강의내용 풍성해진 철학 강좌

한편, 학부제로 학생들의 진로문제, 전공신청인원에 따른 부정적인 현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대현 이화여대 교수(철학전공)의 인식론 강의시간. 이번 학기에는 25명이 듣고 있다. 이전에는 한 두명의 타 전공학생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학전공 학생이었지만 학부제를 시행한 이후부터는 절반정도가 다른 전공 학생들이다. 학생들의 전공이 다르다보니 강의시간에 오가는 질문도 다양하다. 사회과학을 전공한 학생은 사회과학적 방법론이 담고 있는 철학적 함의를 묻기도 한다.

철학만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10여명밖에 되지 않지만 복수전공, 부전공으로 철학을 선택하는 학생들이 늘어 강의는 예전과 다름없이 진행된다. 정 교수는 “과거 학과제에서는 철학을 전공하기 싫어도 졸업을 위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많았다면 이제 모든 강의가 충실하게 진행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강의실에서 달라진 것은 학점을 위해 강의를 때우던 ‘들러리’ 학생들이 줄어든 것. 과거 학과제에서는 전체 인원가운데 70%정도는 들러리였다는 것이다.

교수들이 다른 전공을 수강하는 학생들을 푸대접하던 풍토도 사라졌다. “자기전공도 제대로 못하면서 다른 강의는 어떻게 듣느냐”던 시각이 줄어든 것. 철학을 전공하는 학생들만 해도 사학이나 국문학 등 인접 학문에 대한 강의를 들을 수 있어 ‘인문학적 소양’을 쌓기에 훨씬 좋은 환경이라는 평가다.
손혁기 기자 pharo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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