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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위기 또는 시작?
민주주의의 위기 또는 시작?
  • 류동민 / 충남대 경제학
  • 승인 2006.12.26 10: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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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여 년전 코흘리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우리 집에서 하숙하던 대학생 형과 함께 어린이대공원에 놀러갔다. 청룡열차를 탈 수 있다는 벅찬 기대감은, 그러나 놀이동산 정문 앞에서 그 형이 경찰에게 연행되면서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귀를 덮는 긴 머리카락을 가위로 잘리고 나온 형이 놀이동산 안에서 나를 찾아 헤매고 있을 때, 나는 이미 울면서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송창식의 “왜 불러”가 유행하고, 긴급조치 9호로 그 형이 다니던 대학이 휴교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몇 년 뒤 중학교에 입학한 나는 머리를 스님처럼 깎아야 했다. 그 스님머리를 우리는 “2부”라고 불렀다. 우스꽝스럽게도 2부 머리는 내가 더 이상 “초딩”은 아니라는 상징이자 자랑이었다. 입학식도 하기 전에 미리 깎은 2부 머리를 하고 동네 앞 골목에 나가 초등학생들 앞에서 폼을 잡고 다녔다. 그게 별로 자랑거리가 못 된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교장선생님의 ‘修身’을 강조하는 지루한 ‘훈화’가 끝나고, ‘콰이강의 다리’에 맞춰 발걸음도 경쾌하게 교실로 들어가던 월요일 애국조회 시간. 운동장 한쪽 끝에 기다리던 선생님은 2부를 넘겨버린 내 머리카락의 한 쪽 끝을 ‘바리깡’으로 밀어버렸고, 내 머리는 영락없이 쥐가 파먹은 꼴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아이들은 십자형 고속도로를 내지 않은 것이 어디냐며 낄낄거렸고, 나도 어쩌면 그 선생님이 나를 봐 준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 선생님은 유신헌법 전문이 실린 교과서를 가르치다가 울분을 참지 못해 눈물을 글썽이시고, 독재자가 죽은 다음 날 아침 수업시간에 낮은 목소리로 이제 모든 게 잘 될 거라고 힘주어 말하던 분이었다.

고작 새로 오신 선생님 소식 정도뿐이었던 학교신문마저도 계엄사의 도장을 받아야 발간할 수 있던 고등학교 시절, 파올로 프레이리인가를 인용하여 학교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사회학으로 묘사한 어느 선생님의 글이 문제가 되어, 기자였던 나는 교무실에 끌려가 따귀를 맞고 그 선생님은 시말서를 쓰고 쫓겨날 뻔 했다던 소문이 돈 것은 또 그 몇 년 뒤의 일이었다.

다시 몇 년 뒤 대학에 들어간 나는 일 년 동안 머리를 한 번도 깎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갈망해 마지않던 수준의 긴 머리카락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자갈기 같은 긴 머리를 휘날리며 헤어스타일의 자유를 만끽하고 다녔건만, 알다시피 캠퍼스는 사복경찰과 사이렌소리, 최루탄, 수업거부, 강제징집 등 속의 암울한 일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미셀 푸코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학교는 때로 감옥이었고 때로는 병영이었다. 1970-80년대의 한국사회에서 그 정도 명제를 찾아내는 데에는 푸코씩이나 되는 대가의 통찰력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다. 억눌리는 신체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압살당하는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란 지극히 당연한 일상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2부 머리 시절의 내 나이가 된 딸은 귀밑머리 5센티미터라는 21세기적 규정을 준수해야 한다. 바리깡으로 밀어버리거나 왕방울 같은 눈을 부라리며 헌병 흉내를 내던 규율부는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아이들은 별다른 교육학적 근거도 없는 이유로 신체의 자유를 구속당한다. 학원으로 학교로 내몰리는 아이들은 삼십 년 전 내가 그랬듯이, 많은 자유를 대학에 갈 때까지 유예 당한다. 삼십 년 전에 경찰서에서 머리를 깎이고 있었을 우리의 형님들은 어느덧 교장선생님이 되어 파마에 염색까지 하는 못마땅한 요즘 아이들의 헤어스타일을 바로잡아 보려 애쓴다.

스님 머리가 스포츠머리로 변하고, 따귀 대신 벌점을 맞게 된 것도 역사의 발전이라면 발전이지만, 그 사이에 놓인 삼십 년이라는 간극을 생각하면 절망적인 수준이다. 사복경찰이나 최루탄이 사라지고 대통령도 우리 손으로 뽑을 수 있게 되었건만, 역설적으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하는 정치학자들도 많다. 그렇지만, 우리의 습속과 일상에 체화된 억압의 기제를 떨쳐내지 못하는 한 진짜 민주주의는 아직 시작도 못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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