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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서평]『모든 견고한 것들은하이퍼텍스트 속으로 사라진다』(최혜실,생각의나무 刊)
[쟁점서평]『모든 견고한 것들은하이퍼텍스트 속으로 사라진다』(최혜실,생각의나무 刊)
  • 김종갑 건국대
  • 승인 2000.11.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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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디지털의 이항대립 현상깊이 간과한 개념의 공소함
드 넬슨이 ‘하이퍼텍스트’라는 신조어로써 새로운 디지털 텍스트의 도래를 알렸던 1965년 당시에 하이퍼텍스트는 대부분의 독자에게 그 개념조차 생소하였다. 읽고 쓰는 활동이 이루어지는 현실의 터전이 아직 컴퓨터와 맞물리기 이전이었다. 그런데 PC 및 인터넷의 광범한 보급과 더불어,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예기치 못했던 것이 현실의 일상적 풍경이 되었다. 현실이 컴퓨터와 인터넷에 깊숙이 접속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견고한 것들은 하이퍼텍스트 속으로 사라진다’(이하 ‘견고한 것’)의 저자 최혜실이 머리말에서 진단하듯이 우리는(평자를 포함해서) 디지털화된 현실 조건에 비교적 무심하였다. 읽고 쓰는 시간과 공간의 급격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표현을 빌면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의 충격적 이행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아날로그적 패러다임에 발을 맞추어서 시대착오적으로 읽고 쓰며 사유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제 인문학은 변화된 환경에서 스스로 몸 바꾸기를 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충분한 타당성과 설득력을 지닌다. 더구나 “디지털 신대륙”에 걸맞는 미학을 정립하려는” 저자의 시도는 찬탄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견고한 것’에서 저자는 아날로그시대와 디지털시대라는 이항대립적 구분(혹은 위계)에 입각해서 하이퍼텍스트의 현상과 의미, 가치를 점검한다. 텔레비전과 책으로 대변되는 아날로그와 컴퓨터로 대변되는 디지털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아톰으로 구성되는 아날로그는 연속적이며 중앙 집중적이고 의사소통에서 일방적이다. 완성된 정보가 생산자에게서 소비자에게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사와 학생, 저자와 독자, 생산자와 소비자의 구별과 품계가 뚜렷하다. 반면 비트로 구성되는 디지털의 세계에서는 현실과 시뮬라크라, 원본과 복본,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차츰 소멸한다. 정보가 지방분권적으로, 쌍방적으로 평등하게 흐르며,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 생산자와 소비자의 상호작용이 빗어내는 통합성(생산 소비자)의 모습을 지닌다. 이러한 저자-독자, 쓰기-읽기의 세계가 바로 하이퍼텍스트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이항 대립적 구분은 지나치게 도식적임에도 불구하고 선명성이라는 장점을 지닌다. 개념이란 모호한 현상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분석하기 위한 자의적 장치이며 수단이기 때문이다. 현미경이 미세한 세포를 드러내 보여주듯이 아날로그와 디지털이라는 개념쌍도 하이퍼텍스트 현상에 적용되면서 일반인에게 언뜻 식별되지 않는 하이퍼텍스트의 결과 무늬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개념은 공소해진다. ‘견고한 것’에서 하이퍼텍스트의 “미학을 정립하려는” 저자의 시도가 의심되는 것은 이러한 측면에서이다. 전자오락, 사이보그, 시뮬레이션 레저와 같이 다양한 문화에 관심의 눈길을 돌리지만 저자의 시선은 현상의 깊이로 내려가지 않는 듯이 보인다. 그럼에도 새로운 상품에 이름을 붙이듯이 현상에 개념들을 기계적으로 붙여놓는다. 그래야 현상의 깊이가 열리기라도 한다는 듯이. 하지만 결과는 개념의 공소화로 흐른다. 현상이란 언제나 개념을 넘어서게 마련이다. 현상에 적용되면서 이론에 살과 피가 흐르는 이유도 현상의 초과(과잉)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견고한 것’의 저자는 현상의 깊이를 간과함으로써 이론마저 궁핍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 듯이 보인다.

평자는 ‘견고한 것’에 과다한 요구를 했는지 모른다. ‘견고한 것’은 하이퍼텍스트의 “미학을 정립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저자의 경험의 기록인지 모른다. 만약 ‘견고한 것’에 저자의 개인적 육성이 조금만 더 배어들어 있었더라면 평자는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의 지평을 바꾸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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