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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뉴라이트와 자본주의
[문화비평] 뉴라이트와 자본주의
  • 김학이 / 동아대 독일사
  • 승인 2006.12.21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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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이 / 동아대 독일사

얼마 전 인터넷 뉴스 사이트에서 괴로운 장면을 보았다. ‘교과서포럼’의 회의장에 폭력이 난무하고 있었다. 그 순간 필자의 머리에는 학문, 정치, 기억, 역사, 폭력 등의 단어들이 맴돌았는데, 정작 괴로웠던 것은 필자가 개인적으로 잘 아는 서양사학자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던 탓이다. 그 분은 현재 한국 서양사학계에서 생산성이 가장 높은 학자가 아닌가! 그 순간 필자가 깨달은 것은 뉴라이트가 세칭 ‘수구 집단’의 일회적 포장이 아니라는 점이다. 뉴라이트는 진지한 트렌드이고, 그들을 소위 ‘꼴통’으로 간주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꼴통일지도 모른다. 평소 뉴라이트에 관심이 없던 필자가 대표적인 뉴라이트 인사들의 인터뷰와 글을 찾아본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발언은 필자가 아는 서양의 신보수주의와 무척 달랐다.

 우선 작금의 뉴라이트는 서양의 ‘극우’가 아니다. 극우는 민족을 절대적 가치로 선양하면서, 자국 내의 소수자(유대인, 유색인, 망명 신청자)와 외국을 민족의 적으로 설정하고, 그들에 대한 퍼포먼스 폭력을 통하여 무엇보다도 현재의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자국의 사회 하층에 호소한다. 한국의 뉴라이트는 민족주의를 거부하고, 전지구적 자본주의를 옹호하며, 내부의 타자를 공격하지 않는다. 뉴라이트 일부는 자신들이 ‘새로운’ 보수인 이유가 바로 ‘빨갱이 타령’을 하지 않는 데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신보수주의자일까? 미국 네오콘의 사상적 대부로 알려진 레오 스트라우스를 참조해야 할까? 주지하다시피 스트라우스는 자유주의를 거부하면서, 개인의 이해관계에 입각하여 물질주의적으로 조직된 사회는 궁극적으로 허무주의와 사회적 해체로 귀결된다고 단언하고, 그 치유책을 시민적 도덕과 종교의 부활에서 찾았다. 그의 이상은 정치와 사회가 분리되지 않았던 고대 폴리스였다. 스트라우스가 교육 받았던 1920년대 독일의 신보수주의는 사상적으로 스트라우스보다 훨씬 깊고 다채로웠다. 에른스트 윙거, 슈펭글러, 칼 슈미트, 하이데거 등으로 대표되던 그들은 부르주아적 가치와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근대의 소외된 개인을 공동체와의 미학적‧감정적 일체감 속에서 회복시킨다는 대의를 내세웠으며, 그것이 결단주의적 정치에 의하여 구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한마디로, 그들은 우익 니체주의자들이었다. 한국의 뉴라이트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단언하고 물질적 진보에 대한 끝없는 찬사로 일관하고 있으며, 종교, 윤리, 미학, 영혼, 공동체 등을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운동 ‘형식’이 그것이다. 미국의 네오콘은 조직이 아니라 지적인 네트워크로서, 사회적 의제를 선점하고 그 해법을 제시하며, 정당과 관료조직과 연구소와 언론기관을 지도하려 했고 또 성공했다. 1920년대의 독일 신보수주의자들 역시 글을 무기로 하여, 분열되어 있던 우익 정당들을 이념과 의제와 해법에서 지도하고 통합하려 했다. 그들은 독재체제 수립안을 은밀히 회람시켰고, 우익 정당들의 정책안을 조정했으며, 나치당에게 경제정책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동시에 그들은 보수주의에게 대중을 접붙이려 했다. 한국 뉴라이트의 한 유명 인사는, 자신의 모델은 19세기 후반에 출범했던 영국의 페이비언협회라고 공공연하게 말한다. 그들은 또한 대학 총학생회와 노조에 침투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정말 형식에서만 같은 것일까? 레오 스트라우스는 마키아벨리와 홉스와 니체와 베버가 틀렸다고 단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진리를 대중화하고, 그렇게 대중화된 진리에 입각하여 사회가 운영되었기에 위기가 찾아왔다고 말했다. 즉 어차피 이해관계는 불변의 진리이고, 정치와 종교와 문화는 그 진리를 은폐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가 불변의 가치로 정립하려고 했던 것은 근면과 희생이었다. 근면과 희생? 그것은 자유주의 및 자본주의의 근본 가치이다.

그리고 1920년대 독일 ‘보수혁명’의 핵심 관심사는 기술 혹은 물질적 진보와 영혼의 화해였다. 그것은 결국 신비화된 공동체의 외피 아래서 작동해야 할 산업 자본주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신보수주의에게 남는 것은 엘리트주의 하나다. 모든 신보수주의의 중핵은 권위적 자본주의인 것이다. 따라서 히틀러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스트라우스의 의미는 한국의 뉴라이트요, 박정희다. 다만 유념할 것이 한 가지 있다. 파시즘은 탈근대주의적 지식인과 행동주의적 대중이 만나면서 성립하지만, 하이데거의 예가 증언하듯, 성공한 파쇼 운동은 지식인과 끝내 갈라선다. 지식인은 ‘개념정치’를 무기로 파쇼에게 정치의 장을 제공하지만, 그 장은 지식인들의 것이 아니라 정치가들의 것이다. 후자는 위험천만하게도 탈근대주의를 근대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려 들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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