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8:35 (금)
이념의 진지전과 민주주의 논쟁
이념의 진지전과 민주주의 논쟁
  • 허영수 기자
  • 승인 2006.12.19 11: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결산] 2006년 학계 주요 흐름

한미 FTA 협상 논란, 헌법재판소 소장 임명 논란, 북한 핵실험 강행 파문에 이르기까지 2006년이 정치·사회·경제적으로 바람 잘 날 없던 한 해였던 것처럼, 학계도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논란, 교과서 포럼의 교과서 논란, 들뢰즈·가타리의 ‘노마디즘’ 개념  논란 등 다양한 논쟁들이  시끌시끌하게 이뤄졌다.

좌·우편향으로 구획된 역사학계

□ 역사 = 올해 역사학계 논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학자들을 좌편향·우편향으로 가르는 언론에 의해 쟁점들이 먼저 부각되면서 이데올로기적으로 구획됐다는 점이다.

2월에 출간되자마자 반향을 일으킨 ‘해방전후사의 재인식’(박지향 외 지음, 책세상)은 역사를 다원적으로 인식하자는 측면에서 보자면 여러 논쟁거리를 촉발시킬 수 있었던 서적이었지만, 일부 언론들이 앞다투어 찬성하면 뉴라이트 쪽이고 반대하면 좌편향적인 학자라니 하는 바람에 당시 비판적 학술논쟁으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논쟁의 구도가 이미 굳어진 상황에서 논쟁을 벌이다간 뜻하지 않게 ‘좌익=친북’ 학자로 단정지어지는 데다, 언론에 의해 왜곡된 방향으로 자신의 주장이 이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에 참여한 일부 필자들조차 ‘뉴라이트’라는 용어가 나오기 전에 논문을 썼는데 “뉴라이트의 출사표”라거나 “우파 교과서가 출간되었다”라는 표현하는 언론의 정치적 해석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언론에 의해 논쟁 자체가 일그러져 있는 상황이라, 저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 지닌 친일사관, 사료 해석, 선행 연구 평가 등에 대한 냉정한 검토는 차후 역사학계의 과제로 남게 됐다.

비슷한 맥락에서, 내년까지도 회자될 역사학계 논쟁으로는 11월 언론 지상을 뒤흔든 ‘교과서포럼’의 ‘한국 근현대사 역사교과서’ 논쟁을 들 수 있다. ‘자유주의연대’, ‘뉴라이트전국연합’ 등 언론의 관심을 지대하게 받고 있는 뉴라이트 진영 인사들이 ‘교과서포럼’의 집필진과 상당수 겹침에 따라, 이들의 교과서 시안이 학술대회에서 발표되기도 전에 공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교과서 시안이 4·19 혁명을 학생운동으로, 5·16 군사쿠데타를 혁명으로 표현함에 따라 대표적인 보수신문들은 “역사 인식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는 평가를 내린 상황이다. 동아일보는 “기존 교과서의 좌편향 기술을 수정하려는 대안교과서가 지나친 우편향으로 흐른다면 이 또한 문제”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좌편향·우편향이라는 표현에서 보여지듯, 역사학계의 올 한해는 운신의 폭이 한없이 좁은 ‘좌·우’ 구도 속에 갇힌 한 해였다.

들뢰즈·가타리의 노마디즘 논쟁 불 붙어

□ 철학 =  지난해에 이어 올해 철학계는 또 한차례의 들뢰즈 논쟁을 겪었다. 한국 철학계의 ‘들뢰즈’ 열풍을 실감케 하는 부분이다. 2005년에는 이종영 진보평론 편집위원과 김재인 서울대 강사 등에 의해 ‘한국의 들뢰즈 수용이 지닌 피상성’ 등이 문제가 되더니, 2006년에는 한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유목주의 혹은 노마디즘’이 여러 층위에서 비판적으로 검토됐다.

논쟁의 발단은 교수신문에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대표가 천규석의 책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실천문학사)에 대한 격렬한 서평을 실으면서부터 시작됐다. 이정우 대표는 이 서평에서 들뢰즈·가타리의 ‘노마디즘’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얘기하지 말아야 하며, 저자 천규석씨는 철저히 ‘유목주의’를 잘못 이해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대표의 서평에 홍윤기 동국대 교수가 계간지 황해문화에 ‘원전 패권주의’ 및 ‘전공자 독점주의’ 등을 지적하면서 논쟁이 가열됐다. 그 과정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철학 원서를 접하지 않은 이들에게 현학적으로 여겨질만큼, 개념 ‘유목주의’에 대한 어지러운 해석 논쟁이 오간 것이 사실.

그러나 이 논쟁은 들뢰즈·가타리가 개념화한 철학적 의미의 ‘유목주의’와 현실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유통·소비되는 ‘유목주의’ 사이의 균열을 드러냄과 동시에, 들뢰즈·가타리의 ‘노마디즘’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힘에 따라, 2006년 철학계의 의미 있는 논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최근 대한철학회를 중심으로 ‘보수와 진보의 이념적 지형도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이뤄졌는가 하면, 다른 한켠에서는 정대현 이화여대 교수와 윤평중 한신대 교수의 ‘成己成物’ 논쟁이 이목을 끌었다. ‘성기성물’ 논쟁은 정 교수가 ‘자유’와 ‘평등’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대안적 실천 가치로 ‘성기성물’을 언급한 것에, 윤 교수가 다원주의 시대에 “특정 가치가 최상위적 근본 가치로 정위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는 반론을 제기하면서 심화됐다.

여기서 ‘성기성물’의 경지는 “자신을 인격체로 행위하게 하여 화해로운 사회를 조성하고 자연과도 조화를 이루는 경지”를 말한다. 다원주의와 상대주의, 보편타당한 실천적 대안, 자유와 평등 간의 갈등 등 추상적인 개념들이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논의됐다.

실명비판 전면화 … FTA  협상 저서 쏟아져

□ 정치사회 = 정치·사회 분야에서 세간의 이목을 끈 올해의 저서를 꼽자면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의 ‘한반도식 통일, 현재 진행형’(창작과비평)과 최장집 고려대 교수의 ‘민주주의의 민주화’(후마니타스), 손호철 서강대 교수의 ‘해방 60년의 한국정치’(이매진) 등을 꼽을 수 있다.

인문학자 백낙청 교수의 분단체제론은 사회과학적 개념화가 엄밀하게 이뤄지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6·15 체제 이후의 한반도는 ‘통일진행형’이라는 논제를 던져 논쟁을 촉발시켰다는 점에서 두드러졌다. 백 교수의 주장에 “북한사회의 구조와 동학에 대한 분석 부재”(윤평중), “한미 관계에 대한 근본적 성찰 부족”(구갑우) 등 갑론을박 논쟁도 활발했다.

 특히 백 교수는 최근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안병직 서울대 교수, 박세일 서울대 교수 등 실명을 거론하며 보수 학자들의 ‘선진화론’을 비판하고, 이에 바통을 이어받은 안병직 교수가 주간지 ‘시사저널(12.5)’에 백 교수를 실명 비판하는 등 논전이 확대되는 중이다.

최장집 교수의 저서 ‘민주주의의 민주화’는 ‘절차적 민주주의’는 달성했지만 진보파이든 아니든 간에 민주주의를 잘못 이해함에 따라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을 강조한 저서로,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학계의 다양한 접근을 배태시켰다. 11월에 열린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연구소’의 학술심포지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복합적 갈등과 위기’에서는 ‘민주주의의 실현=권력 독점의 해체’라는 전제 아래 “과연 독점 구조가 해체되었는가, 온존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전면에 등장했다.

한미 FTA 협상을 다룬 저작들이 쏟아진 점도 눈 여겨볼 만한 현상이다. 한미 FTA가 대미 종속을 초래한다고 주장하는 이해영 한신대 교수의 ‘낯선 식민지, 한미 FTA’(메이데이)에서부터, 최병일 이화여대 교수의 ‘한미 FTA 역전 시나리오’(랜덤하우스), 우석훈의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녹색평론사) 등에 이르기까지 10여 개의 관련 저서들이 협상을 둘러싼 여러 측면을 다층적으로 접근했다.

황우석 사건 여파 … 배아복제 연구 재검토

□ 과학기술 = 자연과학·공학 분야를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연구 키워드를 찾기 어렵지만,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 사건의 여파를 떼어놓고 2006년 과학기술계를 말하기 힘들다.

가장 직접적으로 지금 생물학계는 ‘체세포배아복제연구’와 관련해 한시적으로 금지하자라는 쪽과 제한적으로 허용하자는 쪽으로 양분되어 논란이 가라앉지 않은 상황이다. 난자 채취 과정상의 윤리성 뿐 아니라 채취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고, 효율성도 높지 않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에 ‘체세포배아복제연구’가 계속 추진돼야 하느냐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됐다고 할 수 있다.

황우석 교수 사건이 일어나기 전엔 체세포복제 배아 줄기세포 연구에 막대한 정부 자금이 지원됐지만, 사건이 터진 지 1년여만에 상황이 정반대가 된 것이다.

제도적인 차원에서는 과학기술부가 연구윤리·진실성 확보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서, 각 연구기관마다 미국의 연구진실성사무국(ORI)과 같은 부서를 설치하라는 조항을 신설하고 각자의 규정을 제정하도록 했다는 부분이 달라진 점이다. 각 기관마다 기관윤리위원회(IRB)를 운영하는 것도 황우석 교수 사건의 영향이랄 수 있다.

3백7개 자연과학·공학 분야 학회의 추천을 거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가 선정한 바에 따르면, 올해 10대 과학기술 뉴스는 △삼성전자의 40나노급 32기가 D램 개발 △아리랑 2호 발사 성공 및 최초 한국 우주인 배출 △황우석 논문 조작 확인 △전기 흐르는 플라스틱 개발 △북한 핵실험 파문 △암세포 증식 촉진 단백질 발견 △타원 은하 기원 규명 △나노크기 영구자석 원리 규명 △파킨슨병 메커니즘 규명 △차세대 X선 현미경 개발 등이었다.  

허영수 기자 ysheo@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