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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서평] '이타적 유전자'
[쟁점서평] '이타적 유전자'
  • 양재섭 대구대
  • 승인 2001.09.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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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9-12 16:31:31
양재섭 / 대구대·분자생물학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유전학에 관련된 뉴스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일간신문에 실리는 생명과학의 기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전학에 대한 상당한 식견을 필요로 하는 시대이다. 동시에 인간의 모든 생활을 유전학적으로 해석해보려는 경향이 강하게 작용하여서 유전자 결정론이 상당부분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의에서 본성이 착하다고 하는 성선설과 부단히 교육하고 훈련하지 않으면 기본적으로 사악하다고 하는 성악설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온 상황에서 매트 리들리의 ‘이타적 유전자’(사이언스북스 刊)는 제목만으로도 사회생물학의 가장 예리한 쟁점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저자의 주장은 “인간의 정신은 이기적 유전자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정신은 사회성과 협동성과 신뢰성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본능을 통하여 태어나서 살아가는 동안에 협동 방식을 계발하고 노동 분화를 이루어 나감으로써 윤리적 존재로 거듭난다는 논조를 펴고 있다.
그러나 일찍이 토마스 헉슬리는 자연이란 이기적인 생명체들이 벌이는 냉혹한 투쟁의 장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1976년 리처드 도킨스는 저서 ‘이기적 유전자’를 통해 종래의 진화론자들이 막연하게 표현하였던 개체 수준의 이기성을 구체적으로 유전자의 수준에서 논의하고 표현하였다. 즉 생물체는 종이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유전자를 위해 행동하도록 설계돼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전적 이익과 개체적 이익은 대개의 경우 일치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어서 때로 상충될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개체는 오로지 유전자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상호 협동이라든지 아량, 동정, 친절, 자기 희생 등의 미덕을 가지고 있으며 알버트 슈바이쩌나 테레사 수녀 같은 극단적 자기 희생의 인물도 나타난다. 인간은 이기주의적인 사람을 비난하고 이타적인 사람을 칭찬한다. 이기주의는 악덕으로 규정하고 이타주의는 미덕으로 평가한다. 집단의 이익은 이타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선한 것으로 여긴다. 리들리는 인간이 유전적으로 이타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푸치니의 오페라에 나오는 토스카와 애인 카바라도시 그리고 경찰 총장 스카르피오 사이에서 펼쳐지는 죄수의 딜레마를 예로 제시한다. 그리고 리들리는 인간사회에서 호혜주의는 보편적으로 통용되며, 인간 본능일 가능성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선행은 선행으로 보답 받는다는 말로 단정적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는 성선설-성악설 논쟁에서 확실하게 한쪽 입장에 서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기적 유전자’가 출판된 후 20년이 지나서 발간된 ‘이타적 유전자’는 언뜻 생각하기에 앞의 책에 대한 반론으로 단정하기 쉽다. 그런데 도킨스 자신은 ‘이기적 유전자’의 인간을 위한 제2권이 있다면 바로 이 책이어야 한다고 논평하였다. 이기적 유전자와 이타적 유전자의 구분이 그렇게 단순화 될 수 없음을 시사하는 논평이며 또 성선-성악의 논쟁이 수 천년의 과제가 되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그렇게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기적 행동은 궁극적으로 이타적 목적을 향한다고 하는 통합적 결론을 지향하는 사고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리들리의 관점은 지나치게 단정적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를 쓴 에드워드 윌슨은 그의 책에서 인간의 진화는 분명히 유전적이기보다는 문화적이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 유전자라는 용어를 현대의 분자 유전학적인 개념보다는 막연히 사회에서 통용되는 관념으로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오히려 사회생물학적인 접근을 시도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으로 생각되며 그런 점에서 원제목 그대로 ‘미덕의 기원’(Origin of Virtue)으로 책명을 정하는 것이 좋았을 것 같다.

‘이타적 유전자’라는 번역은 선입견을 가지도록 오해를 유발할 소지가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들리의 시도는 생명현상을 사회학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해석하려는 훌륭한 시도로 평가될 것이다. 리들리는 새로운 시대에 있어서 인류의 생존양식이 더불어 사는 삶이어야 한다는 다분히 합목적적인 결론을 유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은 본능적으로 더불어 사는 삶의 방식을 추구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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