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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우리 시대의 타자, 노인
[문화비평] 우리 시대의 타자, 노인
  • 박정자 상명대
  • 승인 2006.12.07 20: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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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설가이며 탐미주의 시인인 보들레르는 파리의 길거리에서 만나는 노파들에게 ‘저 쪼그라진 괴물들도 옛날엔 여인이었겠지’라고 경멸 섞인 연민의 시선을 보낸다. 아직 꼿꼿하고 단정하고 대리석 같은 이마를 갖고 있어도, 버릇없는 주정뱅이가 가끔 지나가며 추잡한 추파로 그녀들을 욕보일 뿐, 옛날 미모와 영광을 누렸던 그녀들을 이제 누구도 알아주는 이 없다.

참을성 있게 불평도 없이 번화한 도시의 거리를 거닐고 있는 노파들을 보들레르는 ‘가슴에 피 흘리는 어머니여, 창녀여, 아니 성녀여’라고 자기 멋대로 명명한다.

그녀들이 어떤 과거를 가졌는지, 지금 그 마음속에 무슨 감정을 갖고 있는지 시인은 구태여 알려고 하지 않는다. 마치 늙은 사람은 더 이상 감정이 없고, 더 이상 내면이 없다는 듯, 그리하여 인간은 늙으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니고 하나의 나무토막 같은 물건이라도 된다는 듯이.

사물화한 인간은 자신의 존재가 수치스러워진다. 과연 그녀들은 살아있다는 게 창피한 듯 오그라진 그림자가 되어 두려움에 등을 구부리고 담벼락에 몸을 붙여 걸음을 재촉한다. 드디어 보들레르는 의기양양하게 ‘임박한 영원의 생을 바라보는 인간 잔해들이여!’라고 읊는다.
      
타자화 된 로라 브라운
 

영화 ‘디 아워즈’의 원작 소설 ‘세월’에서도 노파는 타자화된다. 버지니아 울프의 실화를 포함한 세 개의 에피소드를 ‘우울’이라는 키워드로 묶은 이 영화에서 “엄마!”를 부르는 꼬마 리치의 처절한 외침이 끝내 잊히지 않고 긴 여운을 남겨주었었다. 자살하러 가던 엄마에게 심상치 않은 기미를 눈치 채었던 이 여린 소년은 방황하는 어머니가 남긴 깊은 정신적 外傷을 안고 슬프게 살다가 에이즈 환자로 뉴욕의 고층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한다.

아들의 죽음을 통보 받고 장례식 전날 도착한 그 옛날의 로라 브라운은 나이가 여든을 넘겼으며 키가 크고 등이 약간 굽었다. 머리카락은 강철 빛이 도는 회색이며, 반투명의 양피지 색 피부에는 바늘구멍 크기만 한 갈색 기미가 가득하다.

리치의 오랜 여자 친구인 클라리사(영화에서는 메릴 스트립)는 리처드의 시에 등장하는 그 부인, 방황하던 머니, 자살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일상을 탈출했던 이 여인이 이제 늙어서 검정색 꽃무늬 드레스를 입고 부드러운 노인용 구두를 신은 채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리처드의 시 속에서 원혼이자 여신의 위치를 점했고, 숭앙과 경멸을 동시에 받았으며, 매우 탁월한 예술가가 될 수도 있었던 한 남자를 죽음에 이르도록 괴롭혔던 한 여인이 여기 태연하게 앉아 자기 아들이 위대한 작가였다고 말하는 것에 그녀는 어이없어 한다. 이 늙은 부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어떤 기분인지는 클라리사도 알 수 없고 독자인 우리도 알 수 없다.

그저 우리 앞에는 노인용 구두를 신고 있는, 도서관 사서로 은퇴한, 토론토에서 온 늙은 부인이 있을 뿐이다. ‘댈러웨이 부인’의 문체를 흉내 내어 젊은 로라 브라운의 의식의 흐름을 시시콜콜하게 전달해 주었던 작가의 붓은 마치 나무토막에 부딪치듯 이 늙은 여인 속으로 한 치도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

축적된 시간이 존중받는 사회

 모든 시대, 모든 사회는 자기들 고유의 타자를 갖고 있다. 서양의 중세에서 그것은 癩患者였고, 17세기 중반 이후 고전주의 시대에는 그것이 광인들이었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 푸코의 독창성이었다. 우리 시대 특히 지금 한국의 타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노인이다. 보수적 정치 집회장의 노인들을 야유하는 인터넷 댓글에서, 혹은 또 모든 과거를 부정하는 좌파 주류들의 정치의식에서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다.

쉽게 읽는 인문학 시리즈의 발간을 전하면서 신문의 서평란은 ‘30~40대 젊은 학자 36명이 필자로 참여했’고 자랑스럽게 소개한다. ‘무슨 공부를 얼마나 오래 했고, 어떤 저작물을 가진 필자’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30~40대 젊은 학자’라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는 듯이.

우리 사회에서 ‘소장학자’라는 말이 모든 학문적 업적을 능가하는 최상의 기준이 된지는 오래 되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읽고 공부한 시간’의 축적을 부정하는 것이며, 이런 ‘시간’의 부정이 모든 역사적 과거의 부정과 맥이 닿아 있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모든 ‘소장 학자’들도 조만간 늙어지지 않겠는가? 성실하게 살아 온 모든 사람들의 축적된 시간이 존중받는 사회야 말로 제대로 된 정상적인 사회일 것이다.

박정자 / 상명대·불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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